24.
1969년 5월, 22개월의 월남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나는 육군본부에서 준장으로 막 승진한 비육사 출신 장군의
전속부관이 됐다. 장군은 관리참모부 내의 핵심 부서인 예산회계처장이었고 장군의 부속실에는 4명이 있었다.
보좌관인 중령과 중위인 나, 그리고 정 상병과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자 부속실에 아가씨들이 떼를 지어 놀러왔다. 그리고 날마다 놀러오는 아가씨들 얼굴이
바뀌는 것이었다.
"미스 윤."
"네?"
"인기가 대단한가 봐요. 왠 친구들이 그렇게 많아요?"
그녀는 대답은 않고 책상을 내려다보며 실실 웃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문을 열었다.
"강 중위님, 요즘 우리 사무실에 다른 사무실 아가씨들이 왜 자꾸 오는지 아세요?"
".....?"
"베트공 구경하러 오는 거래요."
"베트공? 그게 누군데? 그럼...그게 나....를 말하는 건가요?"
"역시 강 중위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그래요? 근데 내가 왜 베트공이래요?"
"깡마르고, 채구가 작고, 얼굴이 검고, 머리가 짧고, 입술이 푸르스름 해서 영락없는 베트공이라고 소문이
났대요. 장교들이 그랬대요. 월남에 못 가본 아가씨들은 그 방에 가면 베트공을 볼 수 있다구요."
전속부관이하는 일은 주로 전화받고, 공과 사를 불문한 모든 심부름을 잘 해내는 일이었다. 청량리까지 가서
장군댁 세금을 납부하는 일도 많이 했다. 사적인 심부름이지만 열심히 하다보니 사회를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장군이 말만 하면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전속부관의 핵심 능력이고 자기 능력에 벅차다고 보고하면
무능한 장교가 되는 것이다.
장군의 심부름을 잘 하기 위해서는 여러 영관급 장교들의 도움을 받는 요령이 필요했다. 고급장교들의 능력을
활용해야 심부름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웃 영관장교들에게 점수를 따고 이쁘게 보이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과 장군과의 인간관계에 대한 센스도 필요했다.
장군이 귀찮아 하는 전화를 연결하면 그에 대한 짜증을 전속부관이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속실 정 상병은
흔히 말하는 기생오래비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매끄럽게 생겼다. 그는 가끔 장군의 지시내용을 잊기 때문에
장군 방에 불려가 자주 꾸중을 들었다.
나는 그를 단지 경상도 말을 쓰는 병사라고만 생각했다. 9월초, 나는 결혼식을 4일 앞두고 있었다.그런데 어이
없게도 정 상병이 갑자기 휴가를 가겠다고 했다.
"어이, 정 상병.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9월 6일 결혼하는 거 알고 있나?"
"예, 압니다."
"장군을 모시는 일은 너와 나만 할 수 있는데, 네가 휴가를 가면 내가 결혼식을 연기해야 하지 않나? 어떤가?
이미 청첩장도 보냈고 식장도 예약이 돼 있는데."
"그래도 저는 가야 합니다. 이미 여자 친구들 하고 조를 짜 놓았습니다."
나는 입장이 곤란하여 중령 보좌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중령이 화를 내며 언성을 높여 야단을 쳤다.
"야, 임마. 네가 인간이냐? 결혼식장에 가서 심부름은 못해 줄 망정, 이 놈아,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정 상병은 장군이 파티에 가려고 차에 오르는 순간, 느닷없이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뭐? 휴가? 그래, 잘 갔다와."
장군은 나와 보좌관이 그의 휴가를 이미 허락한 것인 줄 알고 건성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런 정 상병의 돌출
행위에 나는 몹씨 화가 났다. 2층 사무실로 올라오자 정 상병에게 다그쳤다.
"야, 임마. 너 그 따위 버릇 어디서 배웠어?"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장군님이 허락하셨는데 부관님이 왜 이러십니까?"
"정 상병, 한 인간에게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 줄은 너도 알지?"
이런 설득은 그에게 아무 소용없었다. 누적되는 화를 꾹꾹 참았다. 장군 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 상병, 휴가 못 간다. 알았어?"
"그게 무슨 명령입니까?"
그는 시니컬하게 비웃으면서 모욕감까지 주었다. 겨우 간신히 참고 있었던 감정이 순간 폭발했다. 그 때부터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주먹 몇 대가 날아갔다. 그래도 그는 약을 올리려는 듯이 피식피식 웃었다. 두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고 덤빌 기세까지 보였다. 아마 내가 채격이 작다고 우습게 본 듯 했다.
그렇게 생각되자 이제는 반쯤 죽여 놓지 않으면 안 될 천하에 나쁜놈이라고 생각됐다. 나는 합기도로 저만큼
던져 버리듯이 매어 쳐 박아버렸고 그는 억ㅡ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한 바뀌 돌아 콘크리트에 나가 떨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짐승을 패듯 사정없이 두들겨 했다.
하지만 두드려 팰수록 분노가 더욱 증폭되었다. 책상 위에 있는 재털이가 날아가고 주전자와 컵들도 날아갔다.
그런 나의 기세가 무서웠던지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볐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나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분노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성이 끼어들지 못한다. 본노의 세계에서 지나치다 과잉이다 따지는 것은 전혀
쓸데 없고 부질없는 일이다.
"강 중위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요란한 큰 소리와 뭐가 깨지고 부딪치는 소리에 인근 사무실에서 병사들이 달려왔다.
"강 중위님, 그만 하십시오. 저희들이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의 팔이 부어올랐다. 나는 병사들과 함께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Xㅡ레이를 찍었다. 의사가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듯 보더니 필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정도면 괜찮아. 찜질만 하면 돼."
하고 나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나는 다시 사무실로 갔다. 일직 근무를 서던 소령이 갑자기 나를 힐난했다.
그는 평소 나에게 매우 친절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면을 바꾼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소령은 정 상병의
어마어마한 배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잘못은 장군님에게 평가받을 테니, 소령님은 상황보고만 하십시오. 내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으면 나를
힐난하지 마십시오."
이 말 한마디에 소령은 머쓱해 가지고 돌아갔다. 이어서 병사들이 나섰다.
"중위님, 저희들이 찜질해 줄테니 퇴근하십시오. 탈영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정 상병 역시 반성하고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틑날 정 상병은 약속을 어기고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으면 탈영한 것이다. 장군이 출근하자마자 나는 지난 밤에 있었던 일과 탈영 사실을 보고했다.
"잘했어. 그 놈은 혼좀 나야 해. 불성실한 놈이야. 같은 일을 여러 번 시켰는데도 한 번도 제대로 할 때가
없었어. 괜찮아."
하지만 그날 오후, 장군이 김계원 참모총장 비서실에서 받은 전통(전언통신문)을 한 장 가지고 왔다.
"강 대위, 이거 읽어 봐. 염려는 하지 말고."
그때 나는 1969년 9월 1일에 대위로 임시진급해 있었다. 중위를 3년 달아야 대위가 될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
대위가 모자라 중위 1년 반만에 임시진급을 시킨 것이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전통은 이런 내용이었다.
"병사를 무단 구타한 몰지각한 장교가 있는 바, 엄중히 처벌하고 그 결과를 보고할 것."
이 전문은 9월 3일에 내려왔다. 장군이 이 전문에 대한 이야기를 대령급 과장들에게 했다. 3~4명의 과장들이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국무총리실에 다리를 놓아가며 구명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정면돌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옆 사무실 병사에게 정 상병 집 주소를 물으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 상병은 내무반에서 '상당한 집' 아들로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다. 퇴근 길에 주소 쪽지를 들고 찾아가 보니 서교동 어느 2층집이었다. 30세 가량의
꼬리치마를 입은 여인이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다. 냉냉한 표정의 얼굴이지만 깔끔하고 매우 예쁜 여성이었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자리를 권한 후 말문을 열었다.
"외국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바로 어제 돌아왔어요. 와보니 글쎄 내가 가장 이뻐하는 막내 동생이 매를 맞고
얼굴과 팔이 퉁퉁 부어있지 뭐에요. 때려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릴 수 있어요? 우리 아버님께서 화가 몹씨
나 계세요."
"알고 왔습니다."
그녀의 모친이 돌 직전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를 안고 TV를 보고 있었다. TV소리에 대화하기가 거북했다. 그녀가
짜증을 냈다.
"엄마, TV 끄고 2층으로 올라가이소 마."
"국무총리실에서 총장실로 전문을 보냈더군요. 사병 내무반에서도 정 상병은 상당한 댁 자손으로 알고 있구요.
저는 4개월을 정 상병과 한 방에서 일했는데도 그걸 몰랐습니다. 만일 그걸 알았다면 더 많이 때렸을 겁니다."
잘못했다고 빌러 온 줄 알았던 그녀에게는 나의 말이 세도가에 대한 증오심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몇 시쯤 오시나요?"
"10시쯤 돼야 오실 겁니다."
"세 시간 남았군요. 불편하시겠지만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꼭 그 어른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2시간 정도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손님을 혼자 두고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9시가 됐다.
"아버님께서 늦으시는 모양입니다. 저와 이야기 하시지요."
"아, 아닙니다. 저는 똑 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 반복하기 싫습니다.
"내 판단이 곧 아버님 판단이니 나하고 이야기 하시지요."
"정말입니까?"
"가정에서 그 정도의 역할은 하고 삽니다."
밤중까지 기다리겠다는 나의 기세에 오히려 그녀가 더 초조해 하는 기색이었다.
"그럼 정 상병을 불러 주십시오. 저는 그 애 앞에서 떳떳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 상병이 2층에서 내려왔다. 나는 정 상병을 앉혀놓고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누나의 얼굴에서
노기가 일기 시작했다. 누나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을 눈치 챈 정 상병이 내 말을 끊으며 반발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위엄있게 제지했다.
"누님께서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나라도 두들겨 팼을 겁니다."
"누님,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제가 어깨에 달고 있는 이 계급장, 그저께 단 것입니다. 누님께서 보시기에는
하찮은 계급장이지만 제 일생에는 귀중한 이정표입니다. 저는 4개월 전까지 월남에 있었습니다. 어느 집 자식
치고 귀하지 않은 자식 있겠습니까? 소위에게는 대위가 하늘입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소위의 명령에 따라서
수많은 병사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21명의 우리 병사가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몰살한지가 불과 5개월 전의 일입니다. 그 중에 살아 나온 병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야전삽으로 논바닥을 이리 파서 구르고 저리 파서 구르면서 몸을 숨겼습니다. 5시간이나
공포 속에 지냈습니다.
어둠이 깔리자 그 병사가 소대장에게 달려왔습니다. 소대장을 붙들더니 엉엉 울었습니다. 소대장이 그 병사의
아버지였습니다. 월남에서 죽고 다친 병사들도 다 귀한 자식들입니다. 여기에 있는 정 상병, 그 병사들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배경 좀 있다고 상급자를 우습게 여기다가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국무총리까지 동원해 그 상급자를 처벌
해 달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정 상병 하나만을 위해 있는 겁니까? 만일 국무총리가 이런 사소한
일에 나선다면 그분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동생 말을 들을 때는 강 대위님이 우락부락하고 힘도 쎄고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듣고 보니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동생을 꾸짖기 시작했다. 세상에 못난 놈이라고!
"결혼식 잘 올리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저 애를 내일부터 부대로 보내겠습니다. 제가 가서 장군님께도 사과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뜻만 전해드리세요. 그리고 애가 나가거든 혼을 더 내 주세요. 그냥 두면 사람 노릇을
못합니다. 아버님께서 내일 당장 전문을 최소하실 겁니다. 제가 책임지겠어요."
그녀는 밖에까지 나와 택시를 잡아주며 다시 한 번 결혼을 축하한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이틑날 아침에 나는 정 여인과의 만남에 대해 장군께 상세히 보고했고, 장군은 만족해 했다.
이어서 정 상병이 출근했다. 기가 푹 죽어 있었지만 곧바로 장군 방으로 들여보냈다.
정 상병이 들어가자 장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고성으로 꾸중했다. 그녀는 사리가 분명했다. 어려 보이는
내게 얼굴까지 붉히며 사과했지만 내 마음 속에 비친 그녀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깔끔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이겼고 그녀도 이겼다.
만일 그녀의 정신 세계가 세속적이었다면 그때 그녀의 위치로서는 나 같은 풋내기는 철저히 무시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틑날 국무총리실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건 당사자인 나와 정 여인 사이에 주고 받은
말만 믿고 참모총장실에서 국무총리가 보낸 전통에 대한 응신을 생략할 수도 없는 일이다.
국무총리실로서도 일단 육군 참모총장실로 내려 보낸 전통을 상당한 절차 없이 취소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형식과 체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내가 또 그 해결을 위해 정면돌파에 나섰다. 퇴근 후 정복을 입고 국무
총리실을 방문했다. 비서관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한 비서관에게 전문 사본을 보여 주면서
"이 전문을 기안하신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얼떨결에 당하는 일이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그분은 출타중이십니다."
"전 내일 아침에 결혼식을 합니다. 오늘 밤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합니다. 국무총리실이 병사 구타 사건과 같은
사소한 일을 다루는 곳인지 확인만 하면 됩니다. 어느 분입니까? 이 전문을 기안하신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는
있을 거 아닙니까? 전 오늘 밤 그분 댁을 찾아 가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알려 주십시오. 공문을
띄워놓고 왜들 주저하십니까?"
내가 이처럼 막무가내로 나가니까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듯 하더니 나이 든 비서관이 내게로 다가왔다.
"아, 대위님, 그 전문 때문이시라면 염려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에 취소 전문을 보내겠습니다. 취소
하라는 명을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약속합니다."
결혼하는 이틑날 아침, 나는 전화로 중령 보좌관에게 결과를 설명하고 결혼식에 가기 위해 시간에 쫒기면서
이발소로 갔다. 당시는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이발소가 드물었다. 적당히 빨리 깎아 달라고 재촉하며 이발을
마치기 무섭게 택시를 타고 시계 바늘을 보면서 남산 드라마 센터 예식장으로 달려갔다. 신랑이 나타나지 않아
조바심을 하던 동기생 사회자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마이크를 잡고 예식을 선언했다.
1969년 11월 29일, 나는 월남에서 귀국한지 7개월만에 장군을 따라 다시 월남으로 깄다. 내가 모시던 장군이
사이공에 있는 주월한국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나는 장군의 요청으로 사이공에서 6개월간 전속
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1970년 5월, 전 번 1차 파월 때 22개월에 걸쳐 정이 들고 익숙했던 곳, 투이호아
전투지역으로 다시 내려갔다.
한 달간 항공정찰기를 타고 다니면서 항공관측임무를 수행하다가 이내 포대장으로 부임했다. 전국을 떠들썩
하게 했던 정인숙 여인사건은 바로 그 시기에 발생했고, 나와 여러 시간 대화했던 정 상병 누나가 바로 비극의
여주인공 정인숙이었다.
신문지상에 보도된 정인숙은 내가 만나 대화했던 정 여인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채색돼 있었다. 신문은 그녀가
사리 분별력이 없는 나쁜 여인으로 부각시켰지만 내가 본 정인숙은 사리가 분명했고 공정했다. 자기의 가족이
관련되면 무조건 팔이 안으로만 굽는 세속인들과 전혀 다른 깨끗한 여인이었다.
아마도 기사를 만든 기자들이 세속적인 고정관념을 갖고 마음대로 예단하고 각색하여 삼류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까지 언론들 기사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 정인숙 사건에 대한 이 글 옮긴이의 기억
나는 그때 햇수로 5년, 정확히 41개월만에 제대를 했지만 고향에 가지 않고 후임에게 업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근무했던 국회연락장교단의 친한 친구 두 명과 식사를 하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통행금지에
쫒기며 택시를 타고 강변도로 마포 부근을 달리다가 검은색 짚차를 보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해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술이 세어 3차까지 갔고, 친구들을 따라
다니며 한 방울씩 마신 것 뿐인데도 몹씨 취하여, 차창에 기대어 잠들려고 할 때 택시가 갑자기 정지했다.
"아니? 저 차 까딱하면 큰 일 날뻔 했네. 강으로 굴렀으면 사람들 살기 어려웠을 텐데 정말 다행이네요."
검은 짚차 한 대가 길 옆에 이상하게 서 있었고 앞 바퀴 두 개가 도로 난간의 강쪽 비탈에 걸려 있는 형태로
정지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젊은 택시 기사가 혀를 차며 한 말이었다. 너무 어두워 차 안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택시 기사는 운전대 앞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기사는 통행금지에 걸리면 경찰서 유치장에서 자야 하고 또 즉결재판을 받고 벌금까지 물어야 한다며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그 이야기를 하면서 다쳤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모른 채
두고 온 일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차가 고장난 차가 아니고 사고 난 차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앞 바퀴 두 개가 비탈에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가드레인이 일정한 간격마다 기둥을 세워 세 가닥의 쇠줄을 친 엉성한 것이었고 기둥 한 개가 넘어져
있어 사고가 틀림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틑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정인숙 여인 살인사건' 이 대서특필했고, 정 여인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총을 쐈지만, 죽지 않아 미수에 그쳤다는 정 여인의 오빠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것은 나의 기억인데 그때 택시에 같이 타고 있었던 친구 한 사람은 나보다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글을 옮기며 그 친구 생각이 나서 안부 겸 전화하여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는 나와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친구 기억이 맞는 듯 하다. 친구는 흰색 남바(자가용) 찦차였고 정 여인 오빠가 처음엔 동생을 차에 태우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다른 차가 갑자기 길을 막으며 차를 세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빠가 차를 세우니까 그 차에서 내린 험상굿게 생긴 남자가 자기에게 총을 쏘고 동생도 쏘았는데 동생은 바로
죽었지만 자기는 피하려고 하다가 허벅지에 맞아 죽지 않았다고 처음에는 수사관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 여인은 두 발인가 세 발을 쏴 현장에서 즉사시킨 괴한이 오빠에게는 허적지에 한 발만 쏘았다는 말이
수상하여 추궁한 결과 오빠가 동생을 죽이고 자기 허벅지에 쏴 괴한에게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고 했다는 자백을
받았다...친구는 신문 내용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