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중대장급 초급 지휘관은 매월 1회씩 병사와 신상면담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우기 철이 오기 전 벙커식
내무반 8개동과 상황실 및 포대장 벙커 건축을 서둘러 끝내야 하는 상황에서 병사들을 불러 가족상황으로부터
애로사항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묻는다는 건 짜증나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규정이라고 해도 나는 1년 내내 병사들을 개별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이 쓰는 편지를 봤다.
들어오는 편지는 개봉할 수 없어도 보내는 편지는 보안검열 대상이고 대부분 장교들은 그 검열을 하사관에게
위임했다. 그 하사관은 숫자가 담겨 있는지 여부만 체크한 후 편지를 봉해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편지를 읽는 검열을 내가 했다. 병사들 개인별로 파일을 만들어 놓고, 편지 내용과 수신인과의
관계를 메모했다. 오는 편지는 주소와 성명만 메모했다. 한 두 장의 편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장
모이니까 신상 파악이 제대로 됐다. 신상면담을 통해선 얻기 어려운 사실들과 생각들이 시시각각 들어 있었다.
포차트럭 운전병이 면허증 갱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3년마다 받아야 하는 적성검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
이었다. 당시는 면허증이 흔치 않아선지 파병에 따른 적성검사 미필문제 해결을 위해 신경쓰는 기관이 없었다.
면허증을 따기가 매우 힘들었고, 취소되면 지옥 같은 면허시험을 다시 봐야 했다.
그리고 시험이 코스도 어렵지만 교통법규와 자동차 구조 문제가 각각 절반이었고 매우 어려워 운전을 많이 한
사람도 시험을 치면 대부분 떨어졌다. 그래서 면허가 최소된 사람들은 돈으로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포차운전병이 파월기간에 적성검사 날짜가 돌아온 것이다. 나는 경남도지사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전투에 전념해야 할 병사가 이런 일에 마음을 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고국의 모든 국민이 파월장병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편지와 위문품을 보내주십니다. 존경하는 도지사님, 이 병사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선물을 부탁드립니다."
어린 대위의 간절한 소망에 도지사는 매우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서명이 들어 있는 이
편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귀국하여 도운수교통과에 제시하면 무조건 갱신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겸한 답장
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당변병을 통해 그 병사에게 전달했다. 생색내는 게 싫어서였다.
또 어느 편지에는 중태에 빠진 어머니를 걱정하는 병사의 애절한 고통이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대대장에게
특별휴가를 부탁했다. 주월사령부에 전화하여 707 여객기의 자리 하나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 병사를 불렀다.
"어머님이 몹씨 아프시다며? 자네, 독자라고 했지?"
"......"
병사는 눈만 크게 뜨고 검벅였다.
"차를 내 줄테니 지금 곧 대대본부 인사과로 가봐. 휴가는 보름간이다. 사이공까지 가면 고국으로 가는 707
여객기를 탈 수 있어. 모래 오전 11시에 출발하는 보잉기에 자네 자리를 마련했어. 잘 다녀 와."
나는 그에게 20달러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말단 포대장이 자기 부하를 태워주기 위해 주월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병사의 여객기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것은 병사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포대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30년쯤 세월이 흐른 1996년 어느 날, 나는 수원에 있는 경기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에 특강을 나간
일이 있었다. 앞 좌석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학생이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그는 나에게 와서 이름을
말했다. 그때 내가 휴가를 보내준 바로 그 병사였다.
그는 지금 귀뚜라미보일러 대리점을 여러 개 가진 부자가 됐다고 했다. 그날 그는, 동원참치 스페셜과 술을
대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포대장님, 그때는 참으로 크게 보이시더군요. 저희들에게 늘 패기의 화신이셨지요."
당시 작은 키에 47kg의 바짝 마른 체구가 병사들 눈에는 크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또 다른 병사는 늘 보약을
만들어 주면서 금전적 지원도 하고 있고, 논산에서 매년 자기가 농사지은 쌀을 보내주는 병사도 있다. 그리고
태권도 5단인 박 병장의 편지에는 갑자기 세상을 비관하는 내용이 있었다.
"박 병장은 평소 쾌활했는데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럴까?... 어쩜 혹시...?"
나는 위생병을 불렀다.
"김 상병, 박 병장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볼래? 그 녀석 혹시 남에게 말 못할 병 걸린 거 아닌지 알아보란
말이지. 내가 그러더란 말 하지 말고, 김 상병이 이상해서 물어보는 것처럼 알아 봐.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곧 보고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김 상병이 찾아 왔다. 눈을 동그랗게 해 가지고.
"포대장님, 맞습니다. 그런데 포대장님이 그런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래, 얼마나 심하다고 하던가?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건 자네 책임이야. 교육 좀 잘 시켜."
나는 연대 군의관에게 부탁해서 그 녀석은 도무지 구할 수 없는 명약?을 구했다. 그리고 김 상병에게 주면서
포대장이 구해주었다고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이런 조치를 할 때마다 소문은 바로 모든 병사들에게
퍼졌다.
포대장은 자기들과 일일이 상담하지 않고 평소 대화도 별로 하지 않는데도 병사들의 행동과 애로를 귀신처럼
꿰뚫어보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리고 포대장이 일일이 생색내지 않고 애로를 해결해 주듯이 그들 역시
나에게 생색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다.
하루는 연대 기지에서 보급품을 수령해오던 병사가 연대 헌병초소에서 뺨을 맞고 왔다. 인사계와 중위가 쉬쉬
하며 소곤거리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뭐야?"
"아, 포대장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맞았다구? 어서 말해 봐."
김 병장이 연대 헌병초소에서 Cㅡ레이션을 뺏기지 않으려다 뺨을 맞고 왔답니다."
나는 이 말을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김 병장을 오라고 해."
"포대장님, 졸병들은 밖에 나가면 헌병에게 맞게 돼 있습니다. 예사로운 일 가지고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그만 진정하십시오."
사관학교 2년 후배 중위의 말이었다. 그는 후에 2성 장군으로 예편했다. 나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났다. 그리고
우람한 체격의 고참 병사 15명에게 탄알을 장전시키고 트럭에 태웠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트럭을 타고
가다가 베트공에게 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연대 헌병초소에 차를 세워 모두 내리게 한 다음.
"야, 이 초소에 있는 헌병 놈들 포위해."
헌병들이 덜덜 떨었다. 뺨 맞은 김 병장을 나오라고 하여 헌병들 앞에 세웠다.
"때린 놈이 어느 놈이냐? 앞으로 나와."
"접니다."
"너 임마, 계급이 뭐야?"
"옛, 상병입니다."
"뭐? 상병? 어라? 하극상을 저질렀잖아? 내 너를 당장 영창에 집어쳐 넣을 꺼다."
겁이 났는지 그 녀석은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한참 엎드려 뻗혀를 시켰다.
나는 그래도 분이 안 풀렸다.
"야, 사단 헌병대장에게 전화 걸어, 빨리."
주월사령부 헌병참모인 대령의 사랑을 받았던 터라 예하부대 헌병장교들은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퇴근했는지 없었다. 단호한 내 모습을 본 헌병 세 녀석은 모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처럼 절절매며 애걸복걸 비는 모습을 보는 병사들 얼굴에 만족감이 흘렀다.
남의 부하들을 혼만 내주고 돌아오는 것이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그래서 가지고 간 Cㅡ레이션 5박스를 주면서
앞으로 필요하면 병사들에게 달라하지 말고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Cㅡ레이션은 그 당시 시중에서 1박스에
5달러에 거래됐다.
그후부터 헌병들은 우리 포대 차번호인 '30포 2ㅡ'자만 보면 무조건 통과시켰다. 이는 모든 병사들에게 신나는
무용담이 됐다.
분대장 이상의 간부회의는 매일 2시간 이상 계속됐다. 첫 번째 회의는 우리가 사용할 내무반에 대해서였다.
"내부반을 어떻게 지어야 적으로부터 안전하고 편리한가?"
배트공의 박격포 공격 때문에 내무반 지붕을 지면과 같은 높이로 땅에 묻으라는 상부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빨간 진흙 속에 내무반 지붕까지 묻으면 더위에 숨이 막히고 냄새 나는데다, 우기에는 습기가 차고 마루에서
물이 솟아 계속 퍼내야 하고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부 명령이라고 하지만 이런 내무반에서는 병사들도 그럴 것이고 나도 생활하기 싫었다. 난 간부들이
남기고 간 작업장에 쪼그리고 앉아 궁리했다. 그리고 궁리 이틀만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루의 물을 퍼내지
않으려면 마루 밑에 차오르는 물이 자동으로 흘러 나가도록 마루 밑 바닥을 경사지게 파는 것이다.
대개 집을 지을 때 건물을 세울 바닥 좌우를 수평이 되게 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다. 그런데 건물의 가로와
세로가 다 같이 한쪽 귀퉁이로 기울어지게 내무반을 지울 땅을 파는 것이다. 네 개의 코너 중에 한 개 코너를
향해 고인 물이 흐르도록 경사지게 파는 식이다.
마루 밑에서 솟는 물이 한쪽 코너로 내려갈 것이고 그곳에 드럼통을 묻으면 물은 위에 있고 흙은 가라 앉는다.
물은 더 낮은 곳으로 스스로 흐르도록 파이프를 묻고 흙은 가끔씩 마루 뚜껑을 열어 퍼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지붕이 지면 높이와 같으면 바람이 통하지 않아 무덥고 냄새가 난다.
나는 바람이 잘 통하여 시원하고 냄새도 나지 않는 내무반을 짓기 위해 건물 벽을 50%만 땅 속에 묻기로 했다.
그리고 박격포 파편으로부터 벙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철판과 흙으로 덮힌 튼튼한 지붕을 벽에서 3m쯤
길게 나가도록 만들기로 했다.
그럼 지붕 위에 떨어진 박격포탄 파편들이 내무반 안으로 들어오려면 3m를 수평으로 날아와서 다시 수직으로
낙하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여 병사들이 안전하고 시원한 내무반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되자 나는
일방적으로 병사들에게 지시하지 않고 병사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내무반을 상부 명령대로 지으면 우기 철에 마루 밑에서 샘이 솟는다. 그럼 밤새 내내 물을 퍼내야 한다. 물을
퍼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건물을 지을 수는 없을까?"
"그런 방법이 있으면 다른 부대에서 벌써 했게요?"
좀 늙어 보이는 상사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괜찮은 척 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반드시 있다면 우리는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자, 분대장들 중에 누가 먼저 말하겠나?"
내 눈이 가는 곳마다 하사들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얼굴을 숙였다.
"갑자기 물어서 그런가? 어이, 맥주 한깡씩만 가져와. 커피도 끓여서 가져오고. 마시고 나면 말해야 해."
10여 분 후에 제2분대장을 지명했다. 그는 약간 말을 더듬어서 고문관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가 얼떨결에 한참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중사가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니는 마, 좀 알아묵게 말해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한겨?"
"아,아, 김 중사, 이 자리에서는 계급이 없습니다. 모두 다 편하게 말하는 대화 장소입니다. 2분대장의 말을
들으니까 나는 조금은 알아 들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나는 그가 한 말 중에서 살릴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를 찾아 내가 생각해 둔 방법과 연결시켜 주며 그런 뜻의
말을 한게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마 맞습니다. 포 포대장님, 바로 그런 말인데 제가 말하는 게 서툴렀습니다. 감사합니다. 포 포대장님."
나는 김 중사를 돌아보면서
"거 봐요. 김 중사. 2분대장이 일리 있는 아주 좋은 말을 했잖아요."
나는 그 하사에게 여러 번 발표 내용을 따라하게 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다들 알아 듣겠나?"
"예, 알아 먹겠습니다."
이 얼마나 멀고 먼 길인가? 나는 토의가 막힐 때마다 힌트를 주면서 하사들을 표나지 않게 유도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내가 생각한 결론이 그들로부터 나왔다.
"첫째, 지붕을 넓고 길게 뽑을 것, 둘째, 바닥을 경사지게 팔 것, 이 두가지만 준수하고 각 분대는 마음대로 집을
지어라. 원형으로 지어도 좋고, 사각형으로 지어도 좋다. 물론 빨갛게 지어도 좋다. 이의 없지?"
자신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자신들이 시행하는 것이라 주인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토의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거르게 된다. 하사들은 매일 무엇을 해야 포대장이 이뻐하고 동료에게 쭉정이가
안 될까 생각하면서 일했다.
분대원들의 도움도 받았다. 내무반에서는 분대장을 중심으로 모든 병사들이 토의를 했다. 착안 사항들이 날로
예리하고 다양해 졌다. 어제까지는 예사로 지나쳤던 것들이 오늘은 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관찰력이 그만큼
향상돼 가는 것이다. 이렇게 4개월을 훈련하니까 다음부터는 내가 참석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검열이나 전투력 점검 등이 언제 있는지 등의 외부 정보를 얻어 무전기로 포대에 알렸다.
그리고 알리기만 하면 금방 시행됐다. 이처럼 시스템을 구축하고 궤도에 올리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
했다. 하지만 일단 시스템이 돌아가니까 포대장은 여유를 가지고 보다 큰 일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병사들은 그들이 갖게 될 내무반 설계를 아주 좋아 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만큼 진도도 빨랐다. 6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던 작업이 불과 3개월에 끝났다. 병사들마다 철침대가 있었다. 내무반은 웬만한 가정집보다 넓었고
더 깨끗하고 또 시원했다. 휴양을 가라고 해도 내무반이 더 좋다며 가지 않았다.
나는 외부에 나가 부대 교환병들의 친절도를 체크했다. 교환병과 정문 보초병의 메너가 그 부대 대외 이미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적만 해주면 교육은 하사관들이 알아서 철저하게 시켜 주었다.
전쟁터에서는 포성이 자장가였다. 고요와 적막은 오히려 긴장과 공포를 유발했다. 평소에 힘들었던지 곤하게
잠이 든 어느 날 밤, 나민하 소위가 매복을 나가 42명의 베트공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70년 11월이었다.
나 소위는 그 날로 특진했고 영웅이 되어 고국을 방문했다.
나 소위가 김포에 도착하자 국회의원들까지 공항에 나와 영접했다. 바로 그 매복작전에서 우리 포대 장교들과
병사들은 나를 깨우지 않고 베트공 퇴로에 1,800발 포탄을 밤 새워 날렸다. 당시는 미군이 포탄 사용을 통제
했기 때문에 하루 밤에 1,800발을 쏠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런데 간부들은 배짱 좋게도 나에게 묻지도 않고 그 엄청난 포탄을 밤새 내내 쏜 것이다. 그 때문에 베트공
18명이 퇴각하다가 사살됐다. 나 소위의 보병이 24명, 우리 포병이 18명을 사살한 것이다. 배트공들도 우리
포대를 향해 포를 쏘았다. 물론 포대 장교들도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다가 훈장을 받은 셈이었다. 장교들이 나를 깨우지 않은 것은 물론 내가 취할
조치가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47kg으로 바짝 말랐고 가끔 코피를 흘렸다. 월남전에서만 40개월을
보내고 있었으니 월남 사람들처럼 마를만도 했다.
그래서 간부들은 내가 과로하지 않고 편히 자도록 챙겨준 것이었다. 며칠 후 사단 포병사령부에서 1,800발을
문제 삼았지만, 사령관은 이렇게 감싸 주었다고 한다.
"포는 그렇게 운영해야 하는거야."
1970년 11월 13일, 이세호 주월한국군사령관이 참모들을 대동하고 고지로 날아와 나 소위와 그 부하 병사들은
물론, 나와 나의 병사들에게도 화랑무공훈장을 달아 주었다. 그런데 그후 두 달쯤 지나자 사단부관참모부에서
중위가 찾아와 행정착오가 발생하여 화랑보다 한 단계 낮은 인현무공훈장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화랑무공훈장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화랑무공훈장을 그에게 던지며
"나는 인현도 화랑도 다 필요없으니 그냥 가져가고 다시 오지는 마시오."
나는 사이공 사령부에서 전속부관을 하면서 사단부관참모들이 돈을 받고 훈장을 판다는 실로 부끄러운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 중위가 아마 그런 심부름으로 왔다고 직감했기에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 또한 훈장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훈장은 이렇게 해서 인현무공훈장이 됐다. 훗날 사이공에 들러 당시 주월사
정보참모였던 전제현 대령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 일을 말했더니 그는 몹씨 화를 내면서 훈장을 판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훗날 2성 장군으로 예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