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해가 지면 하늘을 찌를듯 우뚝 솟은 앞산이 온 주위에 망령 같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이는 기지 분위기를
마치 귀신이라도 곧 엄습해 올 것만 같이 음산하게 만들었다. 밤이 되면 산 밑에서부터 봉우리에 이르기까지
넓고 높은 공간에 관솔불 같이 훨훨 타는 불꼿들이 날아다녔다.
짐승의 눈에서 내뿜는 불꽃이라면 겹겹으로 포개진 정글의 두터운 나뭇잎 층을 뚫고 나올 수 없었다. 그 음산한
불꽃들은 분명히 날아다녔지 뛰어다니는 게 아니었다. 포를 쏘면 없어졌다가 포가 멈추면 다시 돌아다녔다.
그 불꽃들은 포의 위력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이것이 기분 나빠서 나는 가끔씩 화력 쇼를 벌렸다. 앞산에 대고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것이다. 기관총을 떠난
예광탄이 검은 공간에 붉은 색의 선을 그으며 산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신호로 모든 총과 포들이 기염을 토했다.
105m 포, 155m 포, 무반동총, 기관총, 그리고 Mㅡ16 소총들이었다.
나의 포대가 벌이는 화력 쇼에 고무된 이웃 보병대대 병사들도 박격포 등을 동원하여 가세했다. 앞산을 향해
전개된 검은 공간은 총알들이 긋고 지나가는 붉은 선들과 포탄들이 작렬할 때 퍼지는 주황색 섬광들로 가득
했고, 기분 나빴던 공간은 이내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공간으로 변했다.
기지에서 나는 콩 볶는 소리, 온 산에서 작렬하는 파열음들이 뒤 섞여 내는 화음의 잔치에는 그 어떤 록 음악
으로도 구현해 낼 수 없는 힘과 쾌감이 듬뿍 들어 있었다. 화력 쇼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었다. 스스로 쏘아
대면서 스스로 감탄했다. 총 한자루 포 한발의 의미는 미미했다.
하지만 집단이 내는 힘은 참으로 엄청났다. 바로 여기에서 벙사들은 개인보다 집단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했을 것이다. 드디어 쉭ㅡ 딱 하고 조명탄이 하늘 중턱에 켜지면서 바람에 나부끼며 흘러내리면 온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진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총을 놓고 하늘을 보며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것이 화력
쇼의 휘날레였다. 이렇게 한바탕 하고 나면 병사들의 스트래스가 확 풀리고 분위기가 한층 더 밝아졌다. 그 무렵
미군 당국은 한국군이 쏘는 실탄과 포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른 부대들은 실탄이 남아돌았다. 실탄도 부지런해야 많이 쏠 수 있었다. 나의 중사와 상사들은 실탄이
남아도는 부대에 돌아다니며 남는 재고들을 수거해 왔다. 다른 부대에서는 배정받은 실탄을 소화하지 못해
가끔씩 사격장으로 나가 소나기 식으로 사격해 버리기도 했다. 창고에 실탄이 너무 많이 쌓여 있으면 검열에서
지적받기 때문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 1980년 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군 부대들은 배당받은 쌀이 남아돌아 갑자기 검열 나오면
다급한 나머지 뒷산에 구덩이를 파 묻어버리는 부대도 있었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게 하면 될 일을 '정확'을
기한다며 매일 인원을 파악하고, 그 파악된 인원에 맞춰 쌀은 576g, 보리는 252g씩 곱해서 배급해 주니까 쌀과
보리가 늘 남았던 것이다. 곧이곧대로 남는다 보고하면 상급부대 참모들은 행정이 귀찮아진다며 짜증을 냈다.
"당신네 부대는 규정을 어기고 외출과 외박을 많이 보내서 쌀이 남아도는 게 아닌가?"
하면서 오히려 책임추궁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급부대 행태를 너무나 잘 아는 예하 부대 간부들은
"배급받은 쌀 100%를 이상없이 소진했음"
간단명료한 보고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군수품에 해당되는 낭비였다. 나는 훗날 국방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이런 배급제를 가계살림 개념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군수인들의 반발로 욕만 잔뜩 먹었다.
"학자가 뭘 알아."
군수품과 예산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나는 적(enemy)으로 인식됐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군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부처에 공통된 현상으로 아마도 지금까지 시정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다시 월남으로 돌아가서. 저녁에 음산한 앞산에 대고 화력잔치를 벌이는 것이 베트공들의 의표를 어느 정도
찌르는 것이기는 해도 베트공이 쏘아대는 박격포 세례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다. 부대에 부임하자
내가 제일 먼저 해결해야 했던 것은 베트공의 박격포 공격으로부터 병사들의 공포심을 해소시키는 일이었다.
진지라 해봐야 야전 천막뿐인 상태에서 가끔씩 산 위에서 박격포를 쏘아대니 사는 길은 오직 베트공이 우리를
살려 주는 길뿐이었다. 수많은 선배 장교들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묘책이 없다고들 했다. 그때까지
알려진 적의 박격포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5만분지 1지도에서 몇 개의 봉우리를 찾아 6문의 포를 집중해서
날리는 것이 전부였다.
6발의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에는 가공할 공포가 형성되겠지만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베트공들에게는 웃음
거리밖에 안 되는 그런 방법이었다. 베트공이 박격포를 쏘는 지점이 꼭 산봉우리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포신만 덜렁 메고 다니면서 산의 어느 곳이나 눈으로 목표물을 직접 관측하면서 나뭇가지나 팔뚝에 포신을
의지한 채 포탄을 날린 후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래서 나는 산봉우리를 향해 포사격을 하는 건 넌센스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그 을씨년스런 도깨비불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옛날이 생각났다. 수색중대에서 정찰작전을 나갔다가 월맹 정규군에게 포위됐던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베트공 소굴에서 밤을 새면서 나는 그 위치에 한국군이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우리 병사들 앞에다 포를
쏘아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포탄이 바위틈에서 작렬하는 소리는 포에 대한 상식이 없는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공포였다. 1km 밖에서 터지는 포탄소리에 사색이 되어 가지고 내게 다가와
"포대장님, 파편이 바로 옆에 떨어집니다. 포를 멀리로 보내주십시오."
하던 병사가 생각났다. 연이어 또 다른 장면도 생각났다. 소위 때였다. 산악작전에서 길을 개척하기 위해 우리
중대가 가야 할 능선을 따라 50m 간격으로 포를 내려 쏠 때였다. 포탄이 1km 앞에서 작렬하니까 그 독하다는
중대장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었다.
"아하! 이것이 바로 1km의 공포로구나."
나는 신들린 듯이 사격지휘소로 달려가 지도 위에 그리스팬으로 격자를 그었다. 2km단위로 적당히 바둑판 격자를
그은 것이다. 그 바둑판 네 귀퉁이에 포탄이 한 발씩 작렬한다면 가운데 들어있는 베트공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격지휘 장교 중위는 그 격자들에 대한 사격제원을 쏜살 같이 산출해 냈다. 포탄은 소총과 달라 손으로 던지는
돌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포탄을 멀리 날아가게 하려면 추진용 화약의 양이 많아야 한다. 정해진
목표물을 명중시키려면 그 화약의 양을 계산하고, 굴뚝 같이 생긴 포신을 상하로 몇도, 좌우 몇도에 지향시킬
것인지 계산해야 한다.
이때에 공기의 온도, 습도, 바람을 계산에 넣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렇게 결정된 자료를 사격제원이라고 하며
이러한 계산은 숙달된 병사만이 할 수 있다. 이 사격제원들이 각 분대별로 배급됐다. 하나의 포에 20개 정도의
표적이 배당됐다.
각 포들은 계속 포신을 돌려가면서 20개의 목표에 포를 날려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바둑판의 정점을
약간씩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한판을 쏘면 산 전체가 콩을 볶는 것이 된다. 아무리 간 큰 베트공이라도
이런 융단폭격에는 혼비백산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때마침 베트공이 박격포 세례를 가해왔다. 병사들은 신들린 듯이 이 융단포격을
가했다. 포탄을 포구에 집어넣는 속도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멀리에서 포탄을 포구를 향해
던지면 그게 곧 장전이었다.
나는 혹시 포구에 신관이 부딫쳐 사고가 나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숙달된 병사들은 걱정말라고 했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이런 대책이 없을 때는 병사들은 박격포 세례가 끝날 때까지 공포에 떨면서 목재 틈에
숨어서 엎드려 있었지만 이제는 아닌 것이다.
600발의 포탄이 단숨에 날아갔다. 1개 포마다 100발씩 신나게 쏜 것이다. 박격포는 겨우 3발 떨어진 후 중단
됐다. 박격포를 쏜 베트공이 혼비백산 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사격을 지휘했던 중위가 대대작전주임인 소령
에게 긴급한 목소리로 박격포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과 포대가 발사한 포의 양을 보고했다. 소령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렇게 많은 포를 쏘는가?"
야단을 쳤다. 미군이 탄약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데 웬 정신나간 짓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대대장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원체 많은 양을 쏘았기 때문인지 대대장도 난감해 하는 눈치였다.
"대대장님, 사실 그대로 포사령관님에게 보고해 주십시오. 600발은 속일 수 없는 큰 숫자입니다."
대대장도 다른 대안이 없었는지 포병사령관에게 꾸중을 들을 각오를 하고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런데! 꾸중을
예상했던 대대장은 사령관으로부터 의외로 칭찬을 들었다.
"포탄은 아낄 때는 아껴야 하지만, 쓸 때는 시원하게 써야 하는 거야. 야, 고놈 배포 한번 시원시원하구나.
포는 그렇게 운영해야 하는 거야. 베트공 놈들, 간담이 서늘했겠구먼."
나는 포병 사령관으로부터 그 후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의 사랑은 한국에 와서까지 계속됐다. 이때부터 나는
포를 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3개 포대가 쏘는 포탄 양의 70% 이상을 나의 포대가
쏘았다. 어떤 때는 하루 3번도 쏘았고 어떤 때는 며칠을 거르기도 했다.
낮에도 쏘는가 하면 밤중과 이른 새벽에도 쏘아댔다. 베트공은 나의 포대가 언제 융단포격을 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1년간의 재임기간 중 나의 병사들은 단 한발의 박격포 세례도 받지 않았다. 공격이
역시 최선의 방어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