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리는 비 [39ㅡ1]

2012. 3. 5. 오후 9:15:05

글자

39 ㅡ 1

1980년 10월, 나는 학위증을 받은 후에 김포공항으로 귀국했다. 기체를 떠나 연결 복도를 통해 공항 건물로 막
들어설 때,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청년이 내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왜 나를
찾는가 물으니, 중앙정보부에서 아무개 차장님이 모셔오라고 해서 나왔다고 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나를 국방과학연구소에 데려 가셨던 그 육사 11기 선배님이,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나간 것을 난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짐을 찾아야 하는데요."

"아, 짐은 저희가 다 챙기겠습니다."
 

두 사람은 김포에서 이문동으로 이동하는 동안 일체 말이 없었다. 이틑날부터 나는 중앙정보부로 출근을 했고
부장이나 차장급에게 보고되는 일일정보 보고서를 읽을 수 있었으며, 이른바 Sㅡ리포트라고 불리는 도청자료도
읽었다.
 

그런 자료들 중에는 A 맥주회사가 대만에 수출길을 터 놓았는데, B사가 뛰어들어 과당경쟁을 유발시켜 수출가를 
떨어트려 서로 피해를 보는 내용도 있었고, A 정유사가 남미로부터 싼 가격에 원유수입 계약을 체결한 상황에서
B 정유사가 또 그 업체에 뛰어들어 수입가격을 올리는 등 그야말로 추한 내용들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정부기관 대표자들이 모여 회의를 했지만, 답답하게도 해결책을 만들지
못했다. 내 생각 같아서는 무역협회에 권한을 주어 어느 한 업체가 뚫은 길에 다른 업체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던데, 처음 간 풋내기가 서슬 시퍼런 사람들 앞에 끼어들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일단 중앙정보부 요원이 되기 위한 4개월짜리 단기 속성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들여
북한자료, 공작, 심리전 등 될수록 많은 분야의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견문을 넓혔다. 당시의
중정은 개입 범위가 넓었고, 권한이 큰 데 비해 해결책을 이끌어 내는 조정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두환대통령의 동기생인 그 선배 11기 차장이 내게 세 가지 안을 놓고 2개월 안에 선택하라고
했다. 하나는 청와대 비서실로 가는 길, 하나는 중앙정보부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길, 마지막 하나는 국방연구원
연구소에서 일하는 길이었다. 나는 2개월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을 했다.
 

"저를 국방연구원 연구소로 보내 주십시오."
 

가장 먼저 손을 댄 부분이 국방비의 72%를 차지하고 있던 운영유지비 관리에 대한 것이었다. 각 부대별 자원
배분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배분되고 있는지, 배분된 자원들이 각 부대 단위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실태분석과 대안을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는 곧바로 국방부 과장급 이상 군 수뇌부 모두가 모여 있는 국방부 전체회의에서 40분간
발표되었다. 연구소로 간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연구원들은 대회의실 뒤에 있는 영상실에서 슬라이드를 넘기고,
나는 국방장관과 연합사 부사령관, 각군 총장 등 수많은 장군들과 대령들 앞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라 해도 여러 번 읽어 발음이 숙달하지 않으면 소리에 윤기가 없기 때문에, 미리 연습을 많이
해 두었다. 나로선 일생에서 처음 해 보는 처녀 발표였다.
 

"이 자리에 계신 장관님, 각군 총장님, 그리고 참모님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혹시 전방의 사단이나 비행단이
각기 1년에 얼마의 국방비를 사용하고 있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아마 없으실 것입니다. 각 부대에 가계부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의 물자를 사용했는지, 어디의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는지를 기록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몇 개 부대에 나가서 흩어진 자료를 대략 쓸어 모아 봤습니다. 전방 1개 사단은 대략 연간 300억원 정도의
돈과 물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삼성이나 대우의 연간 운영예산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관리책임자가 없었고, 사단장님께
물어봐도 자기는 이 300억원에 대한 관리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자가 부족하면 청구한다. 주면 쓰고 안 주면 그럭저럭 보낸다. 이런 판에 내가 무슨 책임을 지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예로 제1사단이 사용하는 비용에 대해 제1사단장이 책임이 없다 하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겁니까? 장관님이 책임을 지십니까? 총장님이 책임을 지십니까? 아니면 모두에게 공동책임이 있는 겁니까?
두 사람 이상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국민들 혈세인 국방비의 72%이나 되는 운영유지비가 바로 이렇게 무책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은 
한 사람에게만 부과돼야 합니다. 공동의 책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단의 예산은 사단장이 단일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단장이 책임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사단 단위의 관리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단별로 관리참모를 가져야 하며, 관리회계 시스템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부대는 경제주체입니다. 부대와
부대 간에는 거래관계가 형성돼야 합니다. 군수부대는 물자를 퍼주는 부대, 전투부대는 아쉬운 소리 해가면서
받아쓰는 동냥아치의 부대가 되어선 안 됩니다.

이제까지 군수부대는 물자를 사서 산타크로스 입장에서 미운 자 고운 자를 가리고,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가려 가며 물자를 배급해 왔습니다. 한마디로 군수물자는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였던 것입니다."

 

"경제기획원은 돈에다 색깔을 칠해서 나누어 줍니다. 국방예산 담당관도 이런 식으로 경제기회원에게 예산을
신청합니다. 이는 마치 100만원 봉급자에게 한 가지 돈으로 100만원을 주지 않고 노랑색 3만원, 파랑색 5만원,
빨간색 12만원 하는 식으로 색을 칠해서 100만원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색깔이 없는 100만원의 돈을 주면 가정주부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현실에 맞게 창의적으로 예산을 사용
합니다. 그런데 만일 100만원 중에서 3만원은 노랑색을 칠해서 쌀 사는 데만 쓰도록 하고, 4만원은 파랑색을
칠해서 문화비로만 쓰라고 해 보십시오.

쓰다 보니 파란 돈은 남고 노란 돈은 모자랍니다. 바꾸어 달라고 하면 행정이 불편하고 복잡하다며 불이익까지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가라'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Colored Money System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이제 군수사령부는 물자를 임의대로 사서 하급부대에 일방적으로 배급해 주는 산타크로스가 아니라, 사단으로
하여금 돈을 가지고 와서 필요한 물품만 구매하게 하는 백화점이 돼야 합니다. 지금은 군수예산을 군수부대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사단에 주어야 합니다.

가정주부에게 돈을 주는 것입니다. 군수물자 창고에는 많이 팔려서 모자라는 물자, 적게 팔려서 남아도는 물자가
생기게 됩니다. 남은 물자는 그만큼 다음 해에 적게 구입하고, 모자라는 물자는 즉시 더 사다가 놓아야 합니다.
이제 소비자인 사단은 가정주부처럼 쿠폰을 가지고 백화점에 가서 물자를 구매해야 합니다.

사단은 소비자, 군수부대는 백화점, 경리는 은행이 돼야 합니다.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는 소비부대의
창의력과 능동적인 자원관리 노력에 의해 좌우돼야 합니다. 군수사령부는 물자를 사서 배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를 구입하여 창고에 정돈해 놓고 사단에서 구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희의를 주관하는 실무자 대령이 맨 앞에 앉아 있다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홈런" 쳤다는 식으로 힘있게 엄지를 올려 보이며 윙크를 해주었다.
내가 그 시나리오를 읽어 가는 동안, 그 넓은 회의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날 오후에 연구소장이 나를
부르더니
 

"국방부에 난리가 났소. 강 박사 홈런이오. 축하하오. 장관님이 예산개혁을 시작한다고 하오. 강 박사를 자주
부르실 거요."
 

며칠 후 윤성민 국방장관은 예산개혁이라는 프로잭트를 추진하기 위해 지휘서신 1호를 하달했다. 그 지휘서신은
내가 초안을 작성한 것이었지만, 국방장관은 글자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달했다.
 

당시까지 국방물자는 공기나 물처럼 반자유재로 취급되었다. 주면 쓰고 남으면 내다 팔거나 폐기처분해 버렸다.
정교한 광학장비도 함부로 다루었기 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고장나면 수리보내면 되고, 그게 안 되면 다시 새걸로 요청하면 되지 뭐."
 

이런 것이 물자와 장비를 대하는 군의 일반적인 정서였다. 미군이 거저 주는 물자이기 때문에 주인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예산개혁 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모든 장비에는 관리책임자가 지정됐다. 장비에 비용이 발생하면 관리
책임자의 비용카드에 비용이 기록되게 하여 상도 받고 처벌도 받도록 했다.
 

모든 장병들에게 비용의식이 강요된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에 비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혁명이었다. 모든 사단에
컴퓨터가 들어갔고, 자원관리참모부가 신설됐으며, 부대마다 절약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잔치를 벌이면 중간에 한건 잡아 출세하려는 인간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사단 단위 자원관리 시스템
역시 내가 주도해야 할 일이었는데, 실무부서 장군들과 대령들이 중간에 나서는 바람에 개혁이 내가 의도한 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계급씩 올라갔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강성원 때문에 여러 사람이 장군 됐다."
 

라는 말이 돌았다. 시스템 설계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런데 실무 대령들과 장군들은 내가 거저 해준다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어 업체에게 개발비를 주었다. 하지만 업체가 개발한 프로그램들은 완전히 엉터리였다.그 업체들이
만든 시스템에 의해 수많은 자료들을 생산해 냈지만, 막상 경영개선에 필요한 자료들은 생산하지 못했다.
 

업체들과 어울려 돈 잔치만 한 것이다. 국방부의 예산개혁 분위기로 인해 1982년부터 그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국방비는 물론 정부 전체의 예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도개혁에도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정부 전체
부서에 영기점 예산제도(Zero Based Management System)를 강요했다.
 

이는 당시 미국 대통령 카터가 주도하던 것이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당시의 윤성민 국방장관은 5년에 걸쳐서
예산개혁을 주도했다. 예산개혁이 그를 장수 장관이 되게 한 것이다. 이는 예산관리 근대사에 가장 칭찬받아야
할 의식개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후 지금까지 모든 국방장관들은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난 알고 있다.
 

몇 해 전에 설치된 '국방힉득청' 역시 내가 연구하여 윤성민 장관의 호응을 얻었지만, 중간에 차관 이하 수많은
국방부 국장들과 군수 장군들 반대로 변질됐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처럼 '전차사업단' '155m포 사업단' 하는
식으로 한 단계만 발전하는 선에서 마무리돼 버렸다.
 

육사 지역에 '시스템 대학원' 을 설치하는 방안을 만들어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장관도 좋아 했고, 그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김복동 중장도 좋아 햇지만, 이 역시 김복동 중장과 알력관계에 있던 기획관리실장의 반대로
국방대학원에 체계분석대학원을 세우는 것으로 변질됐다.
 

이 대학원은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육사에 있는 교수들은 대부분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육사생들만을 위해 존재하기에는 매우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당시 60명 정도의 박사들을 대학원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서 나는 육사 지역을 선택했지만, 이 역시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만 그리고 종결됐다.
 

지금도 육사 교수부에 있는 이 아까운 존재들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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