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몬터레이 반도에서 보는 태평양은 특별히 아름다워 보였다. 유난히 희고 길게 이어진 파도, 넘실거리는 검푸른
물결, 타조 등처럼 생긴 그 지역 특유의 사이프러스 나무, 불타오르는 듯 붉게 깔린 카펫, 병풍바위로 둘러
쌓인 천야만야 낭떨어지 밑에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말 할 수 없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긴 선으로 끝 없이 뻗어간 백사장, 사람을 향해 먹이를 달라는 물개들,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한가롭게 누워서
조개를 깨먹는 능청스런 바다 수달피들, 사람만 나타나면 먹이를 달라고 두발로 일어서서 손을 벌리는 다람쥐들
해안을 따라 열 시간을 달려도 달리는 곳마다 특유의 장관을 연출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다 보면 다람쥐들이 나와 사람 손끝에 코를 갖다 대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먹이를 놓아주면 손처럼 생긴 두 개의 앞 다리로 먹이를 움켜쥐고 사람처럼 서서 앙증맞게 먹었다.
어쩌다 한국 아이들이 이곳에 들르면 주위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다른 생명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인들은 아이들에게 커다란 모션이나 빠른
모션을 하지 못하게 가르쳤다. 큰 소리로 말하면 다람쥐가 놀란다며 귓속말로 주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았다.
몬터레이 반도에는 이 지역 주민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매우 훌륭한 병원이 있다. 복도는 물론 구석진 어느
곳에서나 티끌 하나 없었다. 화장실이나 부엌에서는 윤이 반짝이며, 정결한 유니폼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 병원에서는 통상 한국 여성들이 청소에 고용되고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여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혹사당했다. 청소에는 약품들이 사용되고 청소 후에는 소독약들이 뿌려졌다. 병원은 그야말로
무균지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보호자라는 개념은 미국에 없다. 일단 입원하면 모든 시중은 간호원이 든다. 하다못해 환자를 방문한 가족들이
환자의 요청으로 침대를 세워줘도 주의를 받는다. 간호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허락 없이 환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도 안 된다. 환자실에 마실 것을 사 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국 병원과 미국 병원과의 차이는 이런 외형에서부터 관찰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의 느슨한 자세에 비교하면
미국의 의사나 간호원은 혹사에 가깝게 뛰어다녔다. 그러면서도 환자에겐 언제나 극진하고 상냥했다. 병원에서
사이렌 소리가 나면 모든 사람들이 놀란 또끼 눈으로 몸을 벽쪽으로 붙였다.
엘리베이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정지하여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즉시 비워주었다. 도로에서 병원차가 사이렌을
울리면 모든 차량이 옆으로 붙어 기어갔다. 환자를 보면 시민들이 시간과 공간을 양보하는 것이다. 한참 전에
일본에서 보름을 지낸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농촌지역을 지나는데 농촌 트랙터가 느린 속도로 지나가자 교차로에 있던 모든 승용차가 10분씩이나
기다려 주었다. 승용차들이 얼마던지 지나갈 수 있는데 왜 모두 서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물었더니, 농촌에
왔으면 농촌 사람들에게 예의를 표해야 하고, 이렇게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사관학교라는 요람에서 포근히 지내다가, 졸업을 하자마자 곧 바로 월남 전쟁터에 가서 42개월을
지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미국으로 온 것이다. 미국에서 받은 친절과 배려가 나에게는 민주시민의 기본적인
에티켓으로 받아들여졌고,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해 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한국 사람들을 접하면서부터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면서도 마치
이 민족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자주 외국을 왕래하는 사람들 말을 들어 보니 이런 느낌은 나만 그런 게 아니
었다. 문화적 충격(Cultural Shock)이란 통상 한국에서 살다가 외국에 갔을 때 첫날 겪는 충격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 서울에 왔을 때 문화적 충격을 겪었다. 살아 있는 생명들은 존중돼야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이 말은 피부에 와 닿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나는 생명과 인권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김을 별로
받아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병아리를 사다가 2층에서 아래로 떨어트리며 누구 병아리가 살고, 누구의 것이 죽느냐를 놓고 내기를
했다. 여름방학이면 잠자리 채를 들고 다니며 곤충채집을 한다며 마구 잡아 죽였다. 동물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자란 미국 어린이들은 자라서 미국을 인권국가로 만든 반면, 한국 어린이들은 자라서 남을 배려하지도 않고
구급차가 왱왱거려도 피해주지 않고, 남의 인권을 예사로 유린하는 것이 그 때문 아닐까?
나에게는 꼬마 아들이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나이에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옆에서 작은 소리로 부르면 못
들은 척 했다.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유명하다는 병원을 다 찾았지만, 의사들은 한결 같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손목시계를 좌우로 흔들면서 소리 나는 쪽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센스가 빠른 꼬마는 잘 알아 맞췄다. 나는 귀국 3개월 전에 논문심사를 마쳤다. 그리고 녀석을 육군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사가 녀석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비위를 맞춰가며 청력을 테스트했고, 또 한 번은 귀뿌리 뒤에
있는 뼈에 부착해서 체크했다.
시험 결과를 손에 든 병사는 꼬마가 청력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했다. 무슨 근거로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하느냐 물으니까, 귀 내부 시스템엔 이상이 없는데 외부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내노라 하는 병원들 의사들이 이 병사보다도 못한 것이다. 테스트 결과를 살펴본 육군병원 의사는 2시간
정도 떨어진 오클랜드에 있는 해군병원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병원규모를 보면 육군병원이 컸지만 해군병원은
소수의 어려운 환자들만 치료했다. 병원에도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해군병원 소령 군의관이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입원실로 들어왔다. 귀 구조가 자세히 그려진 큰 그림을 가지고
병의 성격, 수술 절차, 위험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사를 신뢰한 나는
"내 아들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의사는 이 말을 경건한 자세로 듣고는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라고 무겁게 대답했다. 이틑날 수술을 했다. 고막에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파이프를 박는 수술이었다. 그
파이프를 통해서 고막 안에 고인 물을 밖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수술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체크해
보니 실망스럽게도 수술이 실패한 것으로 판명됐다. 다른 의사가 또 수술을 했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이 두
의사가 내게 다가와 고개를 떨구며 사과를 했다.
"물론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 우리들 실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동부에서 참으로 훌륭한 의사가 왔으니 한 번
더 맡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새로 부임한 의사가 진료실로 들어오자 다른 남녀 의사들이 마치 여왕을 모시듯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선임
의사가 현미경을 환부에 고정시켜 놓고는 다른 의사들 얼굴을 둘러봤다.
"자, 보시오. 이게 바로 Retraction Attics의 Defintion(정의)입니다."
현미경은 하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양쪽에서 환부를 볼 수 있었다. 의사들은 돌아가면서 환부를 관찰했다.
"이 아이의 귓속에 세포 가루가 쌓이고 있소. 많이 쌓이면 신경을 눌러 안면근육이 마비됩니다. 물론 이 아이
귓 속에는 물이 고여 있소. 그 물이 청력을 상실케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단순히 귓속에 가느다란
파이프를 꽂아 물을 빼낸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오. 이 아이의 병은 심각하오. 이 아이를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소. 나는 한국 의사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소. 이 아이는 내가 수술해야 하오."
아이의 이쪽 저쪽 귀에 시계를 대보던 서울의 의사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가장 빨리 날짜를 잡아도 한 달 후에
수술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달 후면 귀국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이 수술 때문에 귀국을 연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첫 번째 의사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의사님, 이 아이 아버지는 군인이라 한 달 후에 서울로 귀국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그 선임 의사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이 아이 아버지 사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아이의 병을 내가 아는 이상 이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이 아이를 한국 의사에게 맡길 순 없습니다."
난처해진 첫 번째 수술 의사가 내 어깨를 짚었다.
"강 선생님, 이 아이를 내게 맡겨놓고 가십시오. 제가 후속조치까지 완료하여 김포공항으로 보내드리겟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 아이 또래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잘 어울려 놀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임 의사가 수간호원에게 수술 스케줄을 보자고 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을 점검하더니
어느 환자와 수술 차례를 바꿨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당장 이 아이를 수술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고, 첫 수술의가 내게 축하 악수를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들 녀석이
불안해 했다. 선임 의사가 나를 불렀다. 그의 배려로 나는 의사처럼 수술의를 입고, 신발을 신고, 마스크를
하고 모자도 쓴 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빠, 나 수술할 때 아빠가 같이 있어 줄거지?"
"그럼, 아빠가 이렇게 손잡고 옆에서 지켜 줄게. 걱정 마."
언제나 아빠를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온 아들 녀석은 아빠의 동행에 안심하는 듯 했다. 의사가 고깔 콘 같이
생긴 하얀 플라스틱을 코에 댔다. 녀석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의사가 말했다.
"He is gone" (잠 들었다.)
수술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자동 유리문 밖에 의자를 놓아 주면서, 거기에 앉아 수술 장면을 지켜보라고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배려였다. 수술대에서 같이 수술하던 여의사가 간간이 내 쪽으로 다가와 유리문을 통해
손가락으로 공그라미를 지어 보이며 윙크를 보냈다. 수술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환자 아버지에 대해 이렇듯 극진히 배려하는 이들에게서 나는 천사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밤이되자 나는
아이 곁을 떠나야 했다. 간호사들이 염려하지 말고 숙소에 가서 편히 쉬라고 했지만, 아이가 영어에 서툰데다
목이 아픈 아이를 혼자 남겨 둘 수 없없다.
나는 쪽지에 글을 썼다. 아이가 밤에 필요로 하는 게 뭘까 생각하며 추측하여 좌측에 쓰고, 오른 쪽에 영어로
번역을 해 놓았다. 녀석이 왼쪽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그 번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간호원이 오른쪽
번역된 영어를 보고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녀석에게 사용법을 교육시켜 놓은 후에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틑날 회복실에 갔더니 5~6명 간호원들이
일제히 다가와 내 앞에 서서 이구동성으로 원더풀을 연발했다. 어떻게 그런 쪽지를 생각했느냐는 것이다. 그
쪽지가 없었다면 간호원도 아이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언제나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해맑은 웃음을 선사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심하게 혹사당한다 할 만큼 항상 바쁘게 뛰어다녔다. 특히 의사들은 수술실, 진료실, 세미나실을 뛰어다녔다.
걸어다니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세미나실에는 세미나가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준비돼 있어 틈나는 대로 찾아가 보았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의사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가. 또는 퇴화하는가? 한국에서는 수술을 많이 하는 것이 의료 기술을 향상
시키는 첩경이라고 말한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의사의 실력 향상을 위해 실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1982년, 국방연구원에 있을 때 나는 연구차원에서 미국에서 유명한 월터리드 육군병원을 찾았다.
의사들의 실력을 어떤 식으로 향상시키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들에겐 시스템이 있었다. 병원, 연구소, 학교가
한 울타리 안에 있었다. 의사는 이 세개 분야를 로테이션으로 옮겨 다녔다. 통상 3년마다 자리를 옮긴다고 했다.
진료 시에 가졌던 의문을 연구소에 가서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학교에서 강의하며, 정리된 실력을 가지고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한다는 것이다.
그 같은 순환 시스템에 따라 열심히 일하면 자동적으로 실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1980년 10월, 나는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가까이 지내던 7년 선배 댁을 찾았다. 그들은 아들을 의대에 보내고 싶은데 말을 도무지 안
듣는다며 설득 좀 시켜 달라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학생을 그의 방으로 데려가 이런 저런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부모님이 의대를 가라 하시던?"
"예, 지겨워 죽겠어요. 의대는 죽어도 가기 싫거든요. 우리 부모님 좀 설득해 주세요."
"그래? 그럼, 암, 그렇게 해 주고 말고. 그런데 부모님은 왜 너더러 의사가 되라고 하시냐?"
"생활이 안정된다는 거지요. 의사가 돈을 잘 버니까요."
"야, 그렇다면 절대로 의사는 되지 마라. 세상에 할 일이 널려 있는데, 하필이면 왜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냐? 우리 한국 부모님들 참 문제가 많다니까."
의외로 자기 편을 들어 주니까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미 해군병원에서 보고 들은 의사들의 실상을
이야기 해주었다.
"사랑스런 아들을 의사에게 맡길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니? 그때 의사 능력이 무한하다면 얼마나 구세주처럼
생각되겠니? 나는 능력 있는 그 의사가 참으로 성스럽고 우러러 보이더라. 그런 의사가 환자와 그 부모에게는
바로 하느님인 거야. 그러나 그런 의사가 되려면 머리도 좋아야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자다가 뛰어
나가야 할 만큼 자기 생활을 포기해야 하고, 오직 타인의 생명을 위해 몸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이러한 각오 없이 단지 안정된 직업과 윤택한 생활만을 위해 의사를 선택하는 건 범죄행위나 다름 없는 거야.
높은 월급을 받기 위해 큰 종합병원에 취직하여 출근한 의사에게 많은 환자들이 밀어닥치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가? 환자에게 불친절한 의사, 짜증을 내는 간호원은 100% 다 돈 많이 벌려고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이지.
그리고 월급만 보이는 그들의 눈에 환자들이 사람으로 보이겠니? 그래서 능력이 모자라거나 희생정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직업은 다 가져도 좋지만 제발 의사만은 되지 말아야 해. 의사가 되려는 사람은 의술 공부에 혼을
빼앗길 만큼 그것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생활에서 자기만족과 성취감을 느껴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나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해도 좋은데, 부모님이 안정된 직업 때문에 의사가 되길 바란다면
그에 찬성하지 않고, 너도 의사에게 필요한 그런 각오와 정신이 아니라면 다른 직업을 권하고 싶다."
그후 여러 해가 흘렀다. 우연히 그 학생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한양의대를 나와 개업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때 만일 내가 그의 부모 편을 들어 의대에 가라고 설득했다면 그 학생은 어떻게 했을까?
의사 능력향상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의료 시스템 개선이다. 미국의 육군 연구소는 3백마리의 양을 산에 풀어
놓고 포탄을 발사했다. 불쌍한 양들은 즉사하기도 했고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연구소는 각 부상 부위별로 죽어
가는 시간을 측정했다.
이는 전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부상자들에게 후송 및 치료에 우선 순위를 부여하는 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개념에 따라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은 전쟁 현장 전문의사를 하나의 과정으로 설치하여 양성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사고 현장에 나가 될수록 많은 응급치료를 하면 그만큼 생명이 연장된다.
후송 도중 의사는 병원을 선정하고, 그 병원에 환자가 도착하자마자 어떤 조치부터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이를 뒷바침하는 시스템도 설치돼 있다. 환자에게 단 1초의 시간이라도 절약해 주려는
노력인 것이다. 환자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박대당하다가 죽어가는 한국인들의 생명을 떠
올리며 몸이 부르르 떨리는 감동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