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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왕십리 미나리 밭에 지어진 한영고등하교 야간반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지원했지만 낙방
했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해도 이런 식의 미천한 독학으로 감히 서울대학교에 도전한 것은 무리였다.
나는 떠돌이 재수생에 당장의 숙식조차 어려운 막막한 처지가 됐다.
그런데 화장품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가정방문판매를 하던 그 마당발 친구가 나에게 또 한번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가르칠 학생은 신당동에 있는 시의원 댁 아들로 사대부고 3학년이었다. 그 학생은 특히 수학
기초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뭐 이런 질문까지도 다 하나 싶기도 했지만, 질문 하나 하나에 대답해 주다 보니 내 실력도 차분히 정리됐다.
결국 그 학생은 서울공대에 입학했고 나는 육사에 입학했다. 그리고 나의 정규교육은 비로소 육사로부터 시작
되었다. 독학 과정에서 형성된 잠재력 때문인지 수학, 물리, 전기, 역학, 토목 등의 수학관련 과목들은 이해가
빨랐고 비교적 쉬웠다.
본문과 예제만 공부하고 주제 뒤에 수십 개씩 나열돼 있는 문제들은 일일이 풀어보지 않아도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기생들은 수십 개의 그 문제들을 일일이 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그 문제들을 풀고
있을 때, 나는 고전소설, 위인전, 영웅전, 사상계 등의 잡지에 심취할 수 있었다.
나는 유학하여 석사 때 경영학을 공부했다. 특히 재무관리, 회계, 기업감사, 경제 등에 치중했으며, 미국에서의
경영학 과정이지만, 그곳에선 최소한의 미.적분과 확률 및 통계를 가르쳤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책을 놓은지
9년이 지났어도, 그래도 내게 미.적분은 아주 쉬웠다.
그리고 확률과 통계도 난생 처음 배우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쉬웠다. 한 클래스에 있는 미군 장교들은 도서관에
토의실을 마련하여 자기들끼리 지혜를 짜내가며 문제를 풀었다. 그러다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넓은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았다.
나도 처음 보는 생소한 문제들이었지만 그래도 막힘 없이 풀어 보였고, 그들은 지켜 서서 내가 푸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돌아가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를 수학의 천재라고 불렀다. 나에게 확률을
처음 가르친 교수는 Richards 라는 성을 가진 키가 2m나 되는 미남 교수였다.
군말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기계처럼 딱딱 끊어서 책을 읽듯이 진행하는 그의 강의가 매우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첫 확률 시험에서 50점 만점에 클래스 평균이 20점이었는데, 나 혼자만 50점 만점을 받았다.
반 성적이 너무 나빠 나만 빼고 모두 재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이 인연이 되어 4년 후 박사과정에서 그 교수는
나의 지도교수가 됐고, 이어서 일생의 친구가 되어 지금도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기업감사 과목을 가르치던 Burns 교수는, 감사를 수리공학적으로 접근하는 파이어니어로 미국학계에 잘 알려진
분이었다. 그 교수는 자신이 박사논문 때 컴퓨터시물레이션에 의해 풀었던 문제를 내게 주며, 그것을 수학적으로
풀라고 했다.
그때 나는 경영학과에 속해 있었지만, 응용수학과에서 제공하는 과목 2개를 선택하여 그 문제들을 풀기 위한
기초를 쌓았다. 확률 모델링(Stockastic Modeling)과 LP 이론이었다. LP의 "Simplex Method"와 같은 알고리즘,
즉 푸는 절차를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배운 것들을 응용하여 수학공식을 만들어 그가 준 문제를 풀었다. 기업을 3개월만 관찰하고도
1년 치에 해당하는 재무제표 건전성을 판단할 수 있는 과학적 기법이었다. 내가 Burns 교수의 문제를 수학적으로
풀었다는 사실은 그 교수에게 큰 충격이었다.
내가 LP 이론을 공부하고 싶었을 때, 그 학기에는 그걸 제공하는 과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한 교수에게
찾아가 이번 학기에 LP의 수학적 이론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학교는 나에게 Howard라는 학교에서 최고수준에
있던 교수를 전용 지도교수로 배당해 주었다.
일반대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배려였다. 교수와 학생이 1:1로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귀족학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교수가 노트에 속도있게 쭉쭉 써 내려갈 때 학생이 맥을 끊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머리가
둔하다는 평을 들으면 이미지가 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습을 정말로 참으로 많이 해야만 했다.
기업 감사를 가르치는 Burns 교수는 내게 시스템공학 박사과정을 택하라 하면서 학교에 로비전을 폈다. 하지만
1907년 그 학교 창설 이래 문과계통의 석사과정을 마친 학생이 곧바로 이과계통의 박사과정으로 연결된 전례와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Burns 교수는 내 편을 들어 줄 교수들을 결집시켰다.
그 교수는 나를 Smart Guy라고 생각하는 교수 4명을 모았다. 대학원에서의 정치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교수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협박했다. 그 교수를 잃기 싫어 한 학교당국은
교수회의를 열어 나의 석사논문을 검토했다. 그리고 나를 옹호하는 교수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결국 조건부의 시스템공학 박사과정 입학이 허가됐다. 조건부란 시스템공학계의 핵심 과목을 1년간 집중적으로
먼저 이수한 후, 성적이 좋으면 박사과정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학교 내에 내 개인적 스폰서로 지정된 경제학과
Whipple 교수가 ,한국의 국방장관에게 나를 박사과정에 입교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취지의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한국 국방부에 PPBS실 이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겼고, 여기에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미
해군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먼저 마치고 귀국한 선배 장교들과, 한국내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선배들이 모여
있었다. PPBS란 맥나마라의 그 유명한 '국방자원관리 기법' 을 말한다.
PPBS실에는 모두 15명 정도의 선배 장교들이 있었고, 이곳 PPBS 실장이 바로 나에게 악몽을 가했던 육사 12기
선배였다. 그리고 이들 중 한 고참 해병중령이 박사과정을 가겠다며 예산을 따 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교수가 국방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가 PPBS실로 이첩된 것이다.
이 편지를 본 선배 장교들이 나를 매우 괘씸하게 생각했다고 했다. 그 해병중령을 위해 확보해 놓은 예산을 내가
가로 채려 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그럴 것 같으면 누구든지 박사 하게?"
그들은 이렇게들 수근거렸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던 나는 국내의 이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귀국
후 바로 PPBS실에 출근하여 명랑한 얼굴로 선배 장교들에게 인사했다. 미국에서 공부에 몰두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려고 정신없었던 내가 국방부에 PPBS실이란 조직이 새로 생겼는지, 또 그 안에 누가 있는지를 어찌 알 수
있으며, 더구나 해병중령이 박사과정을 가기 위해 예산을 따놓고 있는지 어찌 알고, 그것을 중간에서 가로 채려
했다는 말인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예산을 가로 채려고 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출근 첫날부터 모든 장교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아마도 내 명랑했던 얼굴 표정을 보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훗날 안 것이고 당시는 아무도 내게 그것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같은 따가운 집단 눈총은 1년 반이나 계속됐다. 이런 기간에 나는 업무와 관련된 미국 문헌들을 찾아 열심히
연구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각광 받던 국방경영 시스템 즉 PPBS(Planning Programming Budgeting Systems)에
관한 규정과 서적들을 대부분 독파했다. 외롭고 괴로울수록 책에 몰두했고 그 결과 실력도 향상됐다.
신참 소령 때인지라 마음 고생도 고생이지만 군에 대해 희의가 일기 시작했으며, 난 결국 제대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공인회계사 시험 문제집을 사다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속도가 붙을 즈음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재직 중이던 육사 11기 선배님이 로비를 해서 나를 홍릉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로 데려 갔다.
그런데 그곳으로 옮겨 출근한지 불과 1주일만에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나를 그토록 미워했던
PPBS 실장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그 해병중령이 미국의 여기 저기에 연락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여 입학
허가서(Admission)를 받으려고 했지만 실패하여 예산을 반납해야 하는데, 반납 절차가 행정상 골치 아픈데다
체면도 서지 않으니, 나에게 9월에 시작하는 박사과정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누구는 박사 못해?"
큰 소리 쳤다는 해병중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세를 180도 바꾸어 나를 위하는 척 하는 그 10년 선배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실장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박사를 따면 설사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이곳 연구소를 떠나지
않겠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 실장은 나에게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선배에게 전화하여, 마지막 기회이니
후배의 앞길을 위해 나를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11기 선배님은
"마지막 기회라고 하니 공부를 더 하는 게 좋아. 가서 하고 와."
나는 Whipple 교수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입학허가서 문제를 말했다. 그리고 2일 후에 곧바로 연락이 왔다.
"Congratulations, We are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Soon)" (축하한다. 빨리 보고 싶다.)
석사과정을 마친지 2년만이었다. 37세에 시작한 만학의 미국 유학 기회는 이렇게 해서 마련됐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