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리는 비 [41ㅡ1]

2012. 3. 7. 오후 10:46:52

글자

41ㅡ1

나는 1974년 6월에 생전 처음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방학 없이 1년 6개월만에 마치는 미해군대학원 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미국의 군사원조 중에서 끊어지지 않고 가장 오래 지속됐던 것이 교육원조였다.
나는 한국 정부 배려로 유학을 한 게 아니라, 미국 정부 배려로 유학을 한 것이다.
 

미 해군대학원은 미국 육, 해, 공군 장교를 위한 학교였지만, 학교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연합군의 육, 해, 공군
장교들도 일부 수용했다. 그 대신 교육비는 이웃 스탠포드나 버클리 같은 명문대학에 비해 약 3배 정도 비쌌다.
심지어는 교수와 1:1로 공부하는 제도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모든 자료 복사는 무제한 공짜였다. 그 당시 이런 대학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1:1식의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민간의 일반 대학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느 의미에선 일종의 귀족학교였다.
 

내가 입학했을 때 한국군 육, 해, 공군 장교는 11명이었으며, 그 중에 육군이 6명이었다. 많게는 8년, 적게는
2년 선배들 틈에 끼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4점 만점에 3,65학점 이상을 받으면 명예롭게 학교 게시판에 부착
되는 "Dean's List"에 올랐다.
 

내 이름도 거의 빠짐 없이 올랐다. 이에 대해 선배들은 내가 한국 장교단의 명예를 올려주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질시하며 못마땅해 했다.
 

"경영학 과정은 쉬운 과정이야. 우리 시스템 공학과정에서 낙제된 장교들이 가는 데가 바로 그 경영학과지."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컴퓨터공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기상학과, 원자물리학과, 수학과, 시스템공학과,
경영학과들이 있었다. 이들 과에 등록된 학생들은 다른 과에서 제공하는 과목들을 선택해 가며 학문의 인프라를
넓게 쌓았다.
 

나는 선배들의 그런 말에 화가 나서, 시스템공학과에서 제공하는 Stochastic Modeling 이라는 확률수학 과목을
택하여 선배들과 경쟁했다. 선배들 코를 납작하게 해줄 심산이었다.
 

"강 소령은 한국 장교들은 안중에 없고 교수들만 상대한다."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냐?"

"박사 자격시험에서 떨어질 거다."
 

선배들은 그처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말들을 했다. 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뛰면서도 예수님을 생각했다.
 

"예수님 같이 훌륭한 성인도 남에게 조롱 받고, 모함 받다가 결국 가시관까지 쓰고 돌아가셨는데, 내가 얼마나
잘 났다고 그런 비아냥에 속상해 하는가?"

 


나는 40대 대부분을 국책 연구소에서 보냈다. 1980년대 초에 처음으로 연구소에 보직돼 갔을 때, 그 연구소는
몇 명의 특정 지역 현역 박사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그 연구소에는 많은 선배들이 있었지만, 이들에게 '선후배'
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이들은 선배들을 그들 방으로 불러 따지고 지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텃세는 정도를 훨씬 지나쳤다.
연구소에 먼저 들어와 높은 호봉을 향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중령 박사가 대령 박사보다 높은 보직을 차지
했고, 대령 박사를 중령 박사 사무실로 오라 가라 불러 대는가 하면, 심지어 브리핑까지 하라 하기도 했다.
 

내가 연구소에 부임하자 이들은 나를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했다. 자기 대령 시절 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가 내게 욕을 하고 멱살을 잡아 몸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싸웠다는 이유로
예비역 2성 장군인 연구소장이 나를 불러, 국방대학원으로 보내 줄테니 연구소를 나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투사가 되지 않고서는 이 연구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양손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이 연구소에 왔습니다. 소장님은 이 연구소에 무엇을 하려고 오셨습니까?
저는 연구소에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연구소장님은 그냥 발령만 받아 오셨습니다. 이 연구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전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는 사람이지만, 연구소장 자리는 아무나 와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두 사람 중에 연구소를 나가야 한다면 누가 나가야 하겠습니까? 나이 어린 학자들이 싸울 수도 있는 일입니다.
싸웠으면 자초지종을 따져 주시든지 화해를 시키셔야지, 어째서 소장님은 그들 세력만 감싸십니까?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 나갈 사람 아닙니다.

소장님께서는 그들을 싸고도시기 때문에 연구소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계십니다.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함께 나가셔야 합니다. 같이 나가시지요?"
 

언제부터 내게 이렇듯 대담한 기운이 담겨저 있었을까! 만만하게 보였던 나에게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얼굴이 일거에 백지장이 됐고, 손과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연구소장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그리고 소문이
일시에 퍼졌다.
 

"강 박사가 아무개 박사와 한판 붙었대."

"연구소장하고도 한바탕 했대."
 

그처럼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의 체신도 떨어졌다. 그후부터 연구소장과 그들은 한편이 되어 틈만 있으면 나를
왕따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 연구소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응원했다. 명절 때 연구소 경비병들에게
양말과 비누 같은 것이라도 선물을 했고, 이들 기득권자들에게 박해 받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제공했다.
 

한때 국회의원을 한 여성 박사도 내가 보호하여 축출을 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남들은 편하게 사는데 어째서
나는 괴롭게 세상을 사는가? 혹시 내 운명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괴로웠던 어느 날
새벽, 나는 평창동에 용하다는 점집 할머니를 찾아갔다.
 

"실타래처럼 엉킨 일을 풀 사람은 임자뿐이야. 누구도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어. 다행히 임자에게는 총명함이
있으니 가서 풀어 봐요. 수학문제처럼 말야."
 

아! 저헐게 연노하신 할머니가 어떻게 이렇듯 과학적일 수 있을까? 역시 내 운명은 내가 헤쳐 나가가야 했다.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나는 목포 출신인 윤성민 국방장관에게 달려가 그들의 파행을
호소했다.
 

"장관님, 저들이 장관님과 동향임을 내세워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도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고
저는 대령인데 아무개는 중령인데도 그 중령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령도 장군도 중령
밑에 있어야 한다면, 군 인사 규정에 그런 예외조항을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인사규정을 복사하여 가족과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 주며, 연구소에서는 대령이 중령 밑에서
일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제게 달아주신 이 계급장은 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장관님, 제게 대령을 달아 주셨으니 이제 대령을 떼어가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장관은 노기를 숨기며 말했다.
 

"이런지 얼마나 됐나?"

"1년쯤 됐습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나?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컸겠나. 그래, 알았다. 이후부터는 내가 나서마."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 결과를 가지고 전군에 예산개혁을 주도하고 있었고, 나를 국보(國寶)라고
공언하며 총애했다. 내가 1년간 고통을 참아온 것은, 이런 불미스런 일을 가지고 장관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허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관을 그런 일로 써 먹으면, 아무래도 장관과 나 사이가 이전처럼 부드러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에 들으니, 장관은 나를 내보내자 마자 장관 보좌관을 불러 화를 많이 냈다고 했다.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고도 했다.
 

국방장관은 그들 모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연구소장을 파면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교묘하게
비호세력을 이용하여 미국의 연구소 등으로 피신했다. 연구소장은 1주일 내내 매일 같이 장관실로 출근했다.
겨울 새벽 7시부터 장관실 문 앞에 꿇어 앉아, 장관 출근을 기다렸다가 용서를 빌었다.
 

그들 집단이 해체되고 난 후부터 새 연구소장은 연구소 일을 나에게 의논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신임
했고 좋아했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명에 의해 율곡사업 10년을 평가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히 일종의 핵폭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핵폭탄 중의 하나가 222사업이라고 명명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이었다. 당시 2억 5천만 달러에
구입한 공군방공자동화 장비에 대해, 나는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품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당연히 군 전체가 뒤집히듯 시끄러웠고 요란했다. 그 당시 이기백 국방장관과 김인기 공군참모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국방차관, 황관영 기획실장 등이
주축이 되어 나를 연구소에서 쫒아내려고 했다.
 

이전의 연구소장은 나를 적극 감싸고 보호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불과 3개월 후, 10년 선배인 황관영 당시
기획실장이 연구소장으로 부임해 오자 마자 나를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낸다 해도
비서관들이 중간에서 장난을 칠 것이 분명하여, 나는 내 발로 연구소를 나갔다. 그러면서 소장에게
 

"선배님, 오래 사십시오."
 

그런데 그의 행위에 몹씨 실망하여 배참으로 던진 나의 이 말 한마디가 저주가 된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여하튼 1988년 봄, 내가 연구소를 나와 미국으로 떠난지 2년쯤 지났을
때, 누가 봐도 건강해 보였던 연구소장이 유명을 달리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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