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12월 25일) 우리 15구역에서 아침 9시 미사시간에 성가대를 하였습니다.
처음 성가대 보다는 많이 줄어든 인원을 보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남성 구역 총무로서 ‘인덕이 부족하구나, 더욱더 많은 기도가 필요 하구나’ 라고요..
1월 8일날 또 우리 15구역 성가대가 주보에 나와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15구역 1월 8일날 한번 더 하실거죠?" 하셨습니다.
저는 기뻤습니다. 우리 구역이 한번 더 하는 구나.. 그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오늘보다 정말 더 잘 해야지..
저는 기뻤습니다. 우리 구역이 한번 더 하는 구나.. 그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오늘보다 정말 더 잘 해야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보 인쇄의 오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제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령 주보 인쇄가 정확하다고 해도,
기다리고 있는 다른 구역이
두번이나 연속으로 성가대를 하는 우리 '15구역의 만행'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걸 몰랐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다른 구역이
두번이나 연속으로 성가대를 하는 우리 '15구역의 만행'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걸 몰랐습니다.
그 날 교중미사 시간에 있었던 우리 ‘인창동 성당’의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곧바로 경기도 양주 ‘고읍동 성당’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중학생인 처남 아들의 세례식에 제가 ‘대부’로 선택 되었기 때문이였습니다.
불과 일년 전만 해도 냉담으로 일관해 있던 처남 가족이
장모님 돌아가신 이후에 다닌다는 남루한 조립식 건물의 성당엘
처음으로 가 보았습니다.
장모님 돌아가신 이후에 다닌다는 남루한 조립식 건물의 성당엘
처음으로 가 보았습니다.
도로변의 허허벌판 처럼 보이는 시골 농장 같은 곳에 조립식 건물이 보였습니다.
주차공간은 당연히 없었고, 좁은 성물방에는 포개져 놓은 물건들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성당 내부도 아주 좁았고, 입구도 여느 가정집보다 더 초라해 보였습니다.
제가 괜히 미안했습니다.
성당 내부도 아주 좁았고, 입구도 여느 가정집보다 더 초라해 보였습니다.
제가 괜히 미안했습니다.
세례식 연습한다고 조금 일찍 도착한 고읍동 성당에서는
그날도 성전 건축을 위한 회의는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성전 건축을 위한 회의는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손에 든 자료와 프로젝트 빔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처남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옆에 계시는 신자분들에게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저 양반이 바로 내 처남이요’
하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였습니다.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나요?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저 양반이 바로 내 처남이요’
하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였습니다.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나요?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서 보는 대부의 역할,
그러나, 우리 성당에서의 엄숙함에 비해,
그 쪽에서는 아기자기한 가정집 같은 분위기로 9명의 세례식은 무사히 치뤄 졌습니다.
그 쪽에서는 아기자기한 가정집 같은 분위기로 9명의 세례식은 무사히 치뤄 졌습니다.
물로 세례를 줄 때에는 신부님께서 물의 온도를 보시고
다시 주전자에 물을 떠 오는 일도 세례식 도중에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감히 우리 성당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미사 도중에도 자연스럽게 일어 났지만,
전혀 어색하거나 지루하거나 짜증이 없는 가정집에서의 온화함이 묻어나는 미사와 그리고 세례식이였습니다.
다시 주전자에 물을 떠 오는 일도 세례식 도중에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감히 우리 성당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미사 도중에도 자연스럽게 일어 났지만,
전혀 어색하거나 지루하거나 짜증이 없는 가정집에서의 온화함이 묻어나는 미사와 그리고 세례식이였습니다.
세례식을 축하해 주는 신자들의 마음은 진정 가슴에서 나오는 축하였고,
모든 신자 분들이 직접 알고 지내는 형제 자매님들 이였습니다.
모든 신자 분들이 직접 알고 지내는 형제 자매님들 이였습니다.
미사 도중에 뒤에서 들려오는 성가대의 노래 소리는 자연에서 나오는 그대로의 소리처럼 느껴 졌습니다.
미사 도중 문득 고개를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돌렸습니다.
미사 도중 문득 고개를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돌렸습니다.
아직 준비 되지 않는 성가대의 의복,
각양각색의 통일되지 않은 사복을 입고
성가대 자리가 없어서 어지럽게 모여서 부르는 모습에 또 한번 서글픔이 몰려 왔습니다.
성가대 자리가 없어서 어지럽게 모여서 부르는 모습에 또 한번 서글픔이 몰려 왔습니다.
모든 여건과 상황으로 우리 성당과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벌써 몇 년을 지내 왔는지…
괜히 미안하고 숙연해 지곤 했습니다.
아무튼, 모든 미사와 세례식이 끝나고,
고읍동 성당의 수녀님 두분과 신부님,
그리고 우리 가족들과 처남 가족들이 저녁을 함께하는 엄청난 행운도 누렸습니다.
고읍동 성당 신부님이 말씀 하시길,
“구리 인창동 성당 건물을 건축하신 건축업자가 지금 고읍동 성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당 건축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처남에게 잔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 떠난 후에,
처남댁은 처남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장모님의 배려인지, 사업을 하고 있는 처남은 작년 어느 순간부터,
집으로 퇴근 이후, 매일 밤 10시경이면 그 조립식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불빛도 없고, 길가에 세워진 성모상 앞에서 매일 저녁 묵주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매일 묵주기도를 올렸다고 하는데,
제가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반문 하면서 확인차 물었습니다.
‘불빛도 없는 곳에서, 그러면 처음에는 외우지도 못하는 묵주기도를 어떻게 했냐’고
약간의 비웃음으로 물었더니, 돌아오는 말은
약간의 비웃음으로 물었더니, 돌아오는 말은
‘스마트폰도 모르십니까?’ 였습니다.
그 기도가 6개월 정도 지날 무렵의 어느 날 저녁,
산책하러 가족과 함께 성당 근처로 가는 도중에,
그 성모상이 성당 건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성당으로 옮기는 작업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100킬로가 나가는 처남은 덩치에 맞지 않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처남댁은 처음보는 남편의 눈물에 의아하면서,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 손등위로 떨어지는 것이 자신의 눈물 이였는지는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 손등위로 떨어지는 것이 자신의 눈물 이였는지는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성당으로 건축 기금 모금을 위해 떠날 때는
잠을 자지 않고 처남이 만든 '파워 포인터 자료'를 신부님은 가지고 다시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자료를 준비 했길래,
어떻게 신부님의 설명이 있었길래,
초등학생들의 코묻은 돼지 저금통이 성당 건축 기금으로 봉헌되고,
큰 액수의 기금을 개인이 쾌척하시는 분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제가 입이 벌어지는 금액)
한장에 500원 한다는 벽돌을 수십장 우리도 봉헌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누라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매주 주일 미사를 고읍동으로 가서 지낼까?”
마누라 왈,
“그래도 괜찮겠네요. 성전이 완공되면, 그 때 다시 주일 미사를 우리 성당으로 와도 되겠죠?”
이상의 대화는
제가 15구역 총무라는 것을 깜빡하고,
제가 15구역 총무라는 것을 깜빡하고,
우리 애기가 인창동 성당의 복사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아직 우리 '인창동 성당'도 빚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나눈
현실 불가능한 대화였습니다.
현실 불가능한 대화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