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몽(先夢) 까지 경험한 사람의 불심(佛心)은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잠은 자고 있지 않은데, 꿈같이 눈 앞에 펼쳐 지는 선명한 현상이라고 할까요?
불경으로 매일 기도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절(寺)을, 버스 서너번 갈아 타면서도 자주 기도하러 다니는
한 여인의 모습에,
주지 스님의 생각에도 참으로 괜찮은 보살로 보였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시골 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진학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체, 곧바로 부모님을 도우고
여고생활은 꿈도 꾸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는 부산의 어느 공장으로 취직을 해서,
남동생들과 여동생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는 인생을 산….
남동생들과 여동생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는 인생을 산….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겐, 천금을 준다해도,
그 마디마디 서러움으로 굴곡진 그 시절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녀와의 대화에서도,
지금도 후회없다고,
다시 그 시절이 온다해도, 똑같은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 시절의 삶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머리는 뛰어 난지라,
상급 학교로 진학한 동네 친구들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들고
그녀에게로 가져와서 물었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가 자라면서 가끔 듣기도 했습니다.
한번 쯤은 진학 못함에 대한 불평을,
그런 삶에 무게에 후회와 한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불평,불만을 늘어 놓는 것 조차도 그녀의 인생에서 ‘사치’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였습니다.
동생들의 입학식 때 가방과 학용품은 그녀의 몫이였습니다.
단 한번도 그녀가 번 돈을 그녀 자신을 위해서 쓴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동생들의 행복만이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였든 것이였습니다.
한번 길들여진 희생의 삶은 육십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같은 가족이 같이 어울리는 가족 모임에서는 가장 가난한 그녀가 가장 많은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시댁에서도 마찬가지로 생활 하다보니,
시댁의 모든 조카들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숙모' 하면서 그녀를 찾고, 같이 해결을 모색하곤 합니다.
시댁의 모든 조카들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숙모' 하면서 그녀를 찾고, 같이 해결을 모색하곤 합니다.
친정 모든 가족이 카톨릭이였지만,
그런 그녀가 절에 다니면서 행복해 하니, 아무도 그녀의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종교가 우리들의 종교보다 위대해 보였고,
그녀 하나로 인해, 불교을 미워 할 수 없고, 오히려 괜찮은 종교로까지 생각하게 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는 계속 되었습니다.
마음의 상처 주지 않는, 자연스런 기도가 지속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인지,
가끔은 ‘천주교는 굿 같은 것은 안 하제’
‘자식에게 영가가 붙어 다닌다는데.. ‘ 라는 말들을 하곤 했습니다.
귀신이나 영가를 이길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래도 용기가 없었습니다.
부산의 '가야 성당'을 다니고 있었던, 올케는 어느 날 밤, 그녀의 가게로 찾아 갔습니다.
몇 시간의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그녀의 올케가 드디어 말을 꺼냈습니다.
전도의 이야기를 큰 용기로 꺼낸 것이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작년 어느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영아! 오늘 절에 다녀 왔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서 기도 했다.”
나는 또 생각 했습니다.
‘그래 좋지, 부처님에게 기도 하면서 행복해 하면 나도 좋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엄청난 이야기였습니다.
“절의 각 방을 돌면서, 각종 부처님들 앞에서 똑같이 기도 했다.
‘부처님 제가 이제 종교를 바꿀려고 합니다. 그 동안 부처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고마왔습니다.
이제는 자비하신 부처님을 떠나서 가족들과 함께, 하느님을 믿어러 떠나려 합니다.
그 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과 이별을 했다. “
이제는 자비하신 부처님을 떠나서 가족들과 함께, 하느님을 믿어러 떠나려 합니다.
그 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과 이별을 했다. “
순간 가슴 가운데서 물결 치듯 내 몸 전체로 퍼저 나가는 전율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도 하고, 작은 불상들.. 불교 관련 서적과 모든 도구들을 한 보따리 싸 가지고
절 부엌에서 일하는 아줌마에게 드리면서,
‘혹시 이런 것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냥 드리세요’ 하고 돌아 왔다고 합니다.
나도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영가를 쉽게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신 분이라고…
기도 하나로 지금까지 한 ‘굿’ ‘부적’ 이런 종류의 신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하느님이라고..
그렇게 처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올케 도움을 받은 그녀는 부산의 ‘가야 성당’ 에서 교리 수업을 시작했고,
이른 새벽에는 집에서 먼 '가야 성당'엘 가지 않고,
집 근처의 ‘범일 성당’으로 그 날 이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새벽 미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집 근처의 ‘범일 성당’으로 그 날 이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새벽 미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넉넉한 살림이 아닌,
아직도 생업이 절실한 상태에서 새벽미사를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더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습니다.
아직도 생업이 절실한 상태에서 새벽미사를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더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습니다.
항상 미사 직전에 조배실에서의 기도도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사중에 자신도 모르게 쏫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투리로 강론하시는 신부님의 말씀에도 울고,
미사 도중 드리는 기도에서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를 외칠때도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몇 개월의 꾸준한 교리 수업을 끝내고 지난 12월 17일 토요일 저녁 7시 30분
드디어 부산의 ‘가야 성당’에서 그녀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부산의 ‘가야 성당’에서 그녀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그녀 자신보다도 더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헌신해 오신,
내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였던 제 큰 누님이였습니다.
그래서 누나의 세례식 하루 전날, 부산으로 내려 갔습니다.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 본 적이 없는…
시집을 가면 남이라고 하는 풍습을 비켜가면서
친정을 생각하고, 친정을 위해 기도 했던 그녀의 세례식을 축하하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우리 가족이 모두 모였습니다.
연로하셔서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하신 어머님도 업고 지하에서 2층으로 왔다 갔다를 하면서
사위와 딸의 교리 수업을 끝냄과 동시에,
병실에서 받은 '병자성사'만으로, 신부님과 수녀님의 몇번 방문 대화를 나눈 것 밖에 없는 것인데도
특별히 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도중 쏫아지는 눈물을 보인 것은 우리 가족들 밖에 없었습니다.
다들 웃고 축하를 하는데, 우리 가족은 왜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면서 세례식을 함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요일 세례식이 끝나고 일요일 교중미사를 '가야 성당'에서 우리 모든 가족들이 같이 봉헌했습니다.
성체 모실 때에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님에게로 신부님은 직접 다가 오셔서,
손수 입에 넣어 주셨고, …
미사보가 불편하신지 자꾸 벗어시고, 누나는 옆에서 자꾸 씌워 주고,
미사 도중, 계속 신경 쓰는 모습을 보신 신부님은 마이크를 통해
“그냥 가만히 놔 두십시요. 할머니 하고 싶은데로 하시도록 신경쓰지 마세요” … 그랬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 두십시요. 할머니 하고 싶은데로 하시도록 신경쓰지 마세요” … 그랬습니다.
우리 가족이 어머님을 업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시고, 신부님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지붕을 뚫고 중풍 환자를 데리고 오는 성경 장면이 연상 되셨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지붕을 뚫고 중풍 환자를 데리고 오는 성경 장면이 연상 되셨다고 하시면서,
주일 미사 끝난 후엔, 손수 어머님을 보시기 위해 우리 가족들 곁으로 오셔서 어머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누나, 자형, 그리고 어머님, 한번에 우리 가족 3사람이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부 대모님들과 전라도, 울산 서울 등지에서 모인 우리 가족들 모두들 점심 식사를 하면서
깊은 신앙심으로 뭉쳐진 그 자리에서 느끼는 행복은 제가 살아 온 사십 구년의 행복중에 단연 최고였습니다.
오랜만에 낮술도 한잔 하고,
부산 역으로 달려가서 서울로 돌아오니, 2박 3일 여정의 피로가 기차 안에서 단잠으로
이끌고, 돌아와서는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또 한잔을 하고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어느날,
갑자기 전화가 누나에게서 걸려 왔습니다.
‘범일 성당’의 수녀님 때문에 울어 버렸다는
누나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 왔습니다.
‘가야 성당’의 교리 수업은 형수님의 이끄심으로 다녔지만,
약간의 거리가 있어 택시 또는 버스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교리 수업 도중에 새벽 미사는 집 근처의 ‘범일 성당’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몇개월의 새벽미사 동안,
다른 신자들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그녀를 쳐다 보았다고 합니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니는 새벽 미사,
조배실에서 매일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그런 그녀가 성체를 영할 수 없는 ‘예비 신자’라는 것을 알고는
신기해 하기도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나의 세례 후,
이젠 당당하게,
곱게 미사보를 쓰고 새벽 미사에서 성체를 영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새벽 미사를 다니던 신자들의 눈빛에서 ‘드디어’ 라는 단어가 발산되었겠지요..
드디어 세례를 받았나 보다..
그녀가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오고 있는데, ‘범일 성당’의 수녀님 한분이
‘마리아 자매님’ 하고 그녀를 부르면서 달려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곱게 포장한 선물을 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자매님, 제가 지금까지 세례받지 않은 신자분이 이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미사를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매님의 모습에 감동을 했고,
언제쯤 세례를 받을까? 하고, 이렇게 선물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체 영하시는 모습을 보고 달려 왔습니다.
세례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누나의 손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수녀님을 갑자기 끌어 안고 누나는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같이 그녀를 둘러싸고 축하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장사를 하고 있는 그녀는
손님이 없을 때 마다, 초라한 학벌에도 불구하고,
성경 필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손님 중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은,
필사하다가 볼펜을 내려 놓으면서 ‘어서 오십시요’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그녀를 보곤 ,
다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깊고, 몇십년을 다닌, 깊이 있는 신자로 생각 하곤 했답니다.
그녀가 예비 신자인 것을 아는 손님은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이 촘촘히 쓰여진 붉은 색의 노트를 보면서,
저는 제가 부끄러워 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녀의 세례를 통하여,
완벽한 성가정을 이룬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수십명의 가족들 중에서 오직 작은 누나, 오직 형수님, 단 2명만이 캬톨릭 신자였던
우리 가정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 두 여인의 기도로
온 가정이 성가정으로 일체가 되었다는 사실, 너무나 행복한 시간들이였습니다.
제 자랑으로, 제 과시욕으로 가득한 이 글을 보고,
우리 구역 신자 여러분들이 돌을 던지신다면,
맞겠습니다.
맞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제 내면의 웃음과 기쁨의 충만은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거뜬한 요즘의 생활에 오랜만에 일찍 잠자리에 들까 합니다. 아직 12시도 되질 않았는데.. ㅎㅎ
15구역 형제, 자매님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들 되시길 빌어 봅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거뜬한 요즘의 생활에 오랜만에 일찍 잠자리에 들까 합니다. 아직 12시도 되질 않았는데.. ㅎㅎ
15구역 형제, 자매님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들 되시길 빌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