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진주에서 한 30분 정도 떨어진
어느 시골 마을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70년대,
모두가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그 소녀의 가정도 입에 풀칠하기 바쁜 하루하루의 연속이였습니다.
서른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그 마을에는 젊은 이장의 선출에 힘입어
활기가 넘치고 있었고,
마을 청년회 조직,
도로 넓히기,
동네 도랑에서 미꾸라지 잡기,
징과 장고 그리고 꽹과리로 마을을 돌고 제를 지내는 등,
단합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던 바,
중학교 성적이 좋았던 그 소녀는
그녀 부모들의 극구 반대 즉,
‘가스나가 중학교 졸업하모 되지, 고등학교는 뭐하러 가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청년회의 강한 어필과 뒷받침,
‘우리 마을에도 이제는 고등학교 졸업생을 배출 해야 한다’ 는
강열한 의식으로 시골의 2개반이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밭농사와 5일마다 들어서는 장날에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소녀의 집안은
힙겨움의 연속이였습니다.
장날은 장사를 돕고, 방과 후면, 몇시간을 일하면서도
소녀의 성적은 학교내에서 선두권을 유지 했습니다.
소녀는 공부 할 수 있는 시간을 얻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그녀의 부모에게
‘이제 저 공부 해도 됩니까?’를
입에 달고 다녔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삼년이 지날 무렵,
개교 4주년이 되는 시골 고교에서는 술렁거림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4년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지금까지 전문대학 입학생을 2-3명 배출한 교사들의 긴장과 흥분이
시골 전체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교사들은 분주해 졌고,
가정 방문을 소녀의 집으로 가기도 하고, 영문도 모르는 소녀의 부모들도 만나고
하지만, 농사꾼인 부모들의 마음은
딸래미의 대학 진학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저 먼 나라의 얘기였습니다.
예비고사 치루던 전 날,
부엌에서 군불을 지피고 있던 어머니 옆으로 다가간 소녀는
“옴마, 내 대학은 안 갈테니까 예비고사만 한번 쳐 보면 안되것나?”
소녀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너거 아부지 알모 니 다리 몽둥이 뿌르진다.”
“안다, 그랑께내 옴마한테 야기 한다 아이가, 진주 가는 차비만 좀 해 조라…”
한숨을 쉬면서 소녀의 어머니는
“진짜 시험만 치는 기다. 대학은 너거 아부지 아니라도, 우리 형편에 어렵다. ”
“알았다.”
“진주까지 차비가 얼마꼬?”
미리 시골 학교 담임 교사가 예비고사 시험 등록을 마쳐준 결과로
다음날 이른 새벽, 학교 간다고 아버지에게 얘기한 소녀는
예비고사만 쳐 본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조건으로 진주로 향하는 완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본고사도 몰래 치루고, ….
소녀의 아버지는 당연히 대학 시험을 치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진주에 있는 국립 사범대학에서 합격자 발표가 있던날,
그 소녀는 작은 사랑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있었습니다.
소리는 낼 수 없었고, 눈물이 얼굴과 이불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소녀의 아버지는
일이 산더미 같이 밀렸는데 일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는데,
시골학교 교사들이 몰려 왔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해 냈다며…
영문도 모르는 소녀의 아버지와 악수하고,
울고 있는 소녀의 방으로 들어가고,
그제사 상황 파악이 된 소녀의 아버지는
밖에서 ‘절대 안된다’ ‘못간다’
‘형편도 안되는데 고등학교 졸업 시켜 놨더니
대학?’
흥분의 가슴을 안고 찾아온 시골 교사들의 허한 가슴,
소녀의 더 큰 울음소리..
그렇게 그날은 흘러 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동네를 이끌고 있는 이장과 동네 청년회에서 소녀의 집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몰려 왔습니다.
청년들의 정의로운 고함소리가 들리고,
끝까지 버티고 있는 소녀의 아버지를 둘러싼
청년회 회원들,
협박(?), 큰소리,
‘우리 마을에도 이제는 대학생이 나와야 한다.’
‘등록금은 농사 지어서 우리도 조금 보탤 수 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옆집 아지매는
‘우리도 올 마늘농사 매상하모 조금은 보태께’..
‘보리 타작 끝나모 보리 두 대는 보탤 수 있다’
마을 사람들로 북적되던 소녀의 집에서
완강하게 ‘너거가 학비 보탤래’ 하며 버티는 소녀의 아버지도
나중에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나는 모른다, 너거들 알아서 해라’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힘으로 간신히 등록을 마친 이후,
단 한번도 소녀의 집에서 학비, 생활비 지원없이
소녀는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보기 드문 4년 동안의 장학생,
아파트, 백화점 등에서 밀대를 밀고 있는 그녀를 봤다고도 하고,
진주시 상봉동동 허름한 자취집에서
남동생을 3년동안 밥해 주면서도,
그녀의 학과에서 2번째 성적으로 졸업했기에,
교사로서의 발령이 지연되든 80년대 초반에도
졸업과 동시에 발령을 받았고,
합천군 청도 중학교에서의 1년 근무 후,
곧바로 소녀의 고향 시골 중학교로 발령받았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환호했고,
자기 자식들 공부 좀 가르쳐 달라는 부탁으로 저녁이면
국민(초등)학생, 중학생들로 가득 찬 소녀의 집.
마을 학생들의 무료 진학 상담자이자 그들의 무료 과외 선생.
그리고 소녀의 이름을 부르다가도 ‘아 참 선생님이지’
하면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마을 청년회 회원들.
장날 아침에 삐극 삐극 소리나는 자전차를 끌고 나가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용돈이라고 몇 만원이라는 거금을 집어 주는 소녀에게
‘괜찮다, 돈이 내가 와 필요하노, 괜찮다.’
그러면서 소녀의 손을 뿌리치지만,
‘아부지!’ 하면서
억지로 소녀가 호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면, 못 이기는 체 그냥
받았다고 합니다.
훗날, 자전차를 몰고 시골의 강 다리를 달리면
‘가슴이 와 이리 시원한지 모르겠다’ 라는 말을 남겼고,
그렇게 지낸 꿈같이 황홀한 ‘선생님의 아버지’란 타이틀을
2년 밖에 경험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울산의 어느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도
이제는 많이 변한 느낌을 받습니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이것 좀 해 조라’ 하면 지체 없이 노력하더니만,
지금은
‘니도 장가 가서 알라가 둘이나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동생을 ‘천재’, '다재다능', ‘멋있는 머서마’, ‘정의로운 사내’쯤으로 알고 있는 그녀를 보기가
현실은 부끄럽고, 민망하고....
그녀가 교사 생활 하면서 내밀었던 대학시절의 용돈이 이제와 생각하면,
그녀 스스로 돈 없어 비굴하고 처절했던 대학 시절 경험의 산물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한숨이 나오게 하는 이른 저녁입니다.
주변에 있는 교포나 가진자들은 미국 유학을 보낸 자녀들을
방학 기간동안 한국으로 불러 강남에서 몇백만원짜리 고액 과외를 시키는
얘기를 어제도 오늘도 듣고 있습니다.
마흔 후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격세지감’ 을 느끼게 하는,
그래서 떠올린 과거의 기억 이였습니다.
울산의 어느 성당에서 고정 ‘독서’를 한다면서,
자기의 독서를 듣고, 많은 신자들이 감동하고 너무 잘 한다고 자랑하는
그녀가,
작년 여름 방학 때 우리 집으로 와서 ‘인창동 성당’미사에 참가 했습니다.
신부님 강론이 감동 이였다고,
그리고 동생을 하느님 곁으로 두기 위해 20년간 기도 했다면서,
내 장모님 손을 붙들고, ‘고맙습니다’를 여러 번 외쳤습니다.
오늘 하루 기도하고 내일 은총을 기대하는 나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바램을 기도하고 곧바로 응답을 바라는 못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래서 하느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자고,
11시 30분에 부활 미사 마치고,
구리 우체국 앞에 있는 ‘밤푸스’에서 술 한잔 마시고,
이렇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