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을 위하여 - 이호자 마리아 수녀

2004. 10. 26. 오후 10:46:18

글자

(배경음악: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

요즘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면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아래의 다섯 단계 혹은 여섯 단계로 설명된다고 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나타나는 단계가 모두 이처럼 순차적이고 연속적인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라고 함).

 

     - 첫째 단계(부정과 고립): 나는 아니야.. 이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야...이 단계에서는 환자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자체를 부인한다.

     - 둘째 단계(분노) : 왜 하필이면 나야? 환자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격노, 질투, 증오이다.

     - 셋째 단계(타협과 교섭) : 다가오는 죽음을 조금 더 늦출 수 없을까요? 조금만 더 살고 싶어 한다.

     - 넷째 단계(우울) : 환자는 자신이 집, 재산, 가족, 친구, 생명을 다 잃을 수 밖에 없음을 알게되며

                                엄청난 상실감으로 우울에 빠진다.

     - 다섯째 단계 (수용) : 결국 대부분의 환자는 죽음 자체를 피할 수 없는 사실로 수용한다.

     - 여섯째 단계(희망) : 신앙인들이 갖게 되는 단계로서, 죽음자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기쁜마음과 자세로 죽음을 넘어 영생을 기다리며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희망한다.

 

<아래는 "성서와 함께" 11월호에서 퍼온 글입니다 : 죽음의 순간을 위하여 - 이호자 마리아 수녀>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 여름, 생을 접기에는 아까운 나이에 지인 몇 분이 타계했다.

삶에 대한 미련이 강렬했던 그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람은 살도록 불림을 받은 것처럼 죽도록 불림을 받았고 죽음 또한 하나의 성소다"

라고 한 이냐시오 성인의 말을 되뇌어 본다.

 

인간에게는 확실히 아는 것 한 가지와 확실히 모르는 것 한 가지가 있다.

안다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입시생이 시험을 준비하듯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일 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면 그 일 년을 어떻게 살겠는냐"

는 설문에 대한 답으로 더 많은 도움과 더 많은 미소와 더 많은 사랑을 주겠다고 했고,

어떤 이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해주고 싶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대부분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을 위해 살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헨리 나웬은 그의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삶은 긴 준비의 여정이다. 진실로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고 죽는 준비를 하는 여정이다.

죽음은 작은 죽음들의 연속인데 그 작은 죽음들을 대하며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집착들을 내놓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방향으로 끊임이없이 움직이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거울 너머' 에서)

 

"죽는 것은 모든 인간적 순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우리는 모든 것을 주도록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한편 이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죽어가는 몸을 품에 안고, 우리의 팔보다 더 강한 팔이 그들을 안을 것이며 그들이 항상 원했던 평화와 기쁨을 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죽어가면서 모든 인류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죽어가는 인간 안으로 하느님이 들어간다.  우리의 희망을 위하여" ('예수와 함께 걷다' 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다는 말을 한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하지만 임종을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 번도 그런 느낌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사람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렇다.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기쁨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 숨을 거둔 이들의 얼굴을 보면 생애 가장 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굴레를 벗어나 마침내 고통이 끝났기 때문일까?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 광명의 세계로 나온 듯한 기분을 읽게 된다.

 

어떤 사람이 고통 속에 헤매다 못해 종교에 귀의할 뜻을 품고는 먼저 절을 찾았다고 한다.

번쩍거리는 황금불상 앞에 앉아 아무리 보아도, 그 넉넉한 미소와 얼굴에서는 자신의 처지와 같은

고통과 그늘의 그림자를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 이번에는 교회를 찾아가 가만히 제대 앞에 앉아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고 있으려니,

고통에 짓눌려 처절한 얼굴에서 비로소 자기를 알아 줄 것 같은 위안을 받고 천주교에 귀의했다는 얘기가 있다.

 

누군가 고통에 직면했을 때는 먼저 의지할 기둥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통하는 것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다.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시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움인가"

 

고통은 삶의 동반자다.

땀과 눈물 없이 어찌 인생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얼굴은 사람들의 수많은 아픔으로,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그 깊은 그늘 속에, 그 깊은 주름 속에, 그 깊은 한숨 속에, 그 깊은 신음 속에

하느님의 숨은 얼굴을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누구보다 그늘을 좋아하고 또 그늘이 되어주기를 원하신다.

죽음이라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함께 하신다.

 

고대 이집트 민담 중에,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저울에 다는데 저울추로 깃털 하나를 올려놓는다고 한다.

거룩한 죽음이라는 마지막 회심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무게가 깃털 하나보다 더 가볍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리라.

어쨌거나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라는 장엄한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라" (집회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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