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글의 내용이 길고 지루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성적으로도 흔들림없이 하기위해
믿음과 과학적 사실이 충돌함을 느끼면서 고민하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의 고민해결이라는 제 나름대로의 열쇄를 선물하니
조금의 시간투자를 하셔서 받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제나름대로의 생각이라 부족하지만 원하신다면(소주한잔 사주시면)토론장도 오케이입니다.
과학과 신앙
어떠한 사실을 기술하거나 설명을 필요로 할 때나 그것을 증명하려할 때 우리는 논리적이어야 하며, 그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제시하여야 하고, 그러한 내용들이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참이라 하며 진리로 받아들인다.
어떠한 명제가 논리적으로 참인가의 문제는 이러한 전제들이 충족될 때 우리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간의 한계, 즉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차원적 사고의 한계를 경험적으로 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력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론적 한계나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도구적 한계를 경험하며 또 그와같은 실존적 한계상황을 우리는 사실을 좀더 깊고 넓게 추구해 가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인류의 문명을 키워가며 사고의 폭을 넓혀왔고 그 도구 또한 부단히 개발해 왔다.
어제의 과학적 사고나 과학적 도구들이 부정되고, 새로운 과학적 사고의 지평을 열며,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냄으로써 과거의 과학적 사실들을 부정하고, 개선시키며, 보완하고, 새 이론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실이란 항상 시간속에 종속되며, 영원한 과학적 진리란 허구이다.
과학적 진리란 오직 시간속에서만 진리이며,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의 발견과 판단으로 과거의 과학적 진리는 수정되며, 대체됨을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참임을 안다.
이러한 과학적 진리의 시간적 종속성이란 과학이 갖고있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과학은 어떠한 명제가 과학적 진실 또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과학적 온전한 도구로 증명된 도구로써 증명할 때에만 그것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엄격함의 한계를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당시의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또 다른 과학적 방법으로 부정되지 않는 한 가설로 받아들이며, 그 가설은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될 때 과학적 진실 또는 사실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거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과학적 방법으로 지금 부정된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사실이 아니며 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할 뿐이며, 과학적이지도 못하다.
신앙은 이러한 우리인간이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어떤 권위를 받아들여 과학적 논리로는 현재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의 시간적, 존재론적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권위를 믿어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다.
과거에 신앙의 범주에 있던 것이 과학적 축적된 사실들로 인해서 과학적 사고의 범위 안에 들어 왔고, 그것이 과거의 신앙적 사고내용과 차이가 있다하여 전에 믿었던 신앙 전체를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매우 비과학적인 발상이다.
단지 한 신앙의 부분을 우리가 과학적 사고를 통해서 과학의 테두리안에 지금 넣었을 뿐이며, 과학적 방법으로 신앙의 한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주장될 수도 없으며 시간적 종속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면제부를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시간이 감에 따라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될 지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며,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적이며 진실에 가깝다.
이에 대한 증거는 과학의 발달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예를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신앙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이 매우 불가해해 보일지라도 과학적 논리로도 부정할 수 없다.
왜?
신앙은 과학적인 시간종속적 도구를 사용하자않고 논리를 전개하며, 인간의 인지력이나, 존재론적 한계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에 벗어나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신념의 문제이며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도 신앙적 사실이나 주장을 과학적으로 말할 수는 있다.
과학적 방법으로 그 근거에 대한 설명이나 증명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과학적 방법으로 시도하든 그냥 놔두든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만약 어떤 신앙인이 그 과학적 방법에의한 결과물을 토대로 자신의 신앙을 수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이며, 그 자신이 신앙의 내용이나 신앙의 권위를 바꾼다고해서 그 신앙 자체가 바뀌어야한다는 당위성을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물론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설득하고 자신과 같은 신념이나 신앙적 내용을 공유하도록 설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공유된 주관일 뿐이며, 그것이 객관적 방법으로 증명되기 때문에 그 신앙이 참이라고 주장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적 본질에 벗어나 있다.
신앙은 인간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와의 신비적 체험을 통한 주관적 교통이며, 그 결과물이다. 여기에 유일한 도구는 믿음 뿐이다.
과학적 근거로 신앙의 대상이나 내용을 설명한다 하여도 그것은 그 당시에 사는 이들에게 유용한 수단일 수는 있으나 그 본질을 바꿀 수는 없으며 한계성을 벗어날 수도 없다.
신앙의 기본적 도구 또는 수단은 철저하게 자신과 자신에게 들어온 세상의 실존적 한계성을 통찰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인식된 초월적 권위를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많은 이가 공유할 수도 있고, 제한적 일 수도 있다. 숫자의 많고 적음도 어떤 가치평가의 기준이 될 수도 없다. 신앙은 통계학의 범주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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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신앙이라는 동심원 안에 있다. 과학이 신앙의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역사이래로,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어온 이래로 나는 없다고 단언한다.
왜 그런가?
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우리 삶과 관련된 모든 의구심이나, 호기심이지만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고 인지가 가능한 모든 것일 지라도 그것을 알아내고 설명하며 증명하는 그 도구적 수단이 한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객관적 사실이란 많은 주관적 사실들이 모여 시간이라는 그릇에 담겨 서로 공감되고 공통된 사실들을 언어적 수단이나 제스추어로 주고 받음으로서 그들의 주관적 판단이나 사실을 공유하고 그 공유된 사실들이 자신들이 주관적으로 알았던 내용과 조금 다르더라도 그 객관화된 사실이 크게 훼손이나 왜곡되지 않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자신의 주관적 사실판단을 객관화된 사실에 담구어 객관적 개념으로 형상화한다.
이렇게 형상화된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되는 개념들은 공감하는 집단의 수가 늘어나고, 시간적 폭이 클수록 객관적 효력이 커지며 오래 간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사실이 시간성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며 언제고 객관적 지위를 잃어버릴 수는 항상 상존하며, 그것이 과학의 한계이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이러한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과학에 확신과 자신에 차있다. 이러한 우리의 과학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은 고대사회에서도 중세에서도 똑같았으며 그 확신과 자신감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했으리라. 지금 우리는 자신이 과거 확신했던 사실들이 무너져왔던 것을 역사적으로 경험하며 조금씩 겸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겸허함의 정도는 일반인 보다는 전문가 집단들에게서 오히려 두드러진다.
더구나 개념의 공유화와 전달의 수단은 언어적 매카니즘에 의존한다.
언어적 매카니즘은 주관적 판단에서 오는 폭넓은 인식범위를 현저히 축소시키며 매우 제한적 범위로 한정시킨다. 그래야만 약속된 언어로 개념교환을 할 수 있으며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이 과학의 한계이다.
신앙은 어떠한가?
신앙도 주관적 판단이나 인식된 사실을 객관화 시켜 개념의 공유화하는 과정은 과학이나 거의 같다.
신앙도 언어적 도구로 사유된 개념을 공유과정을 통하여 객관화 하려하며 교리화한다.
그러나 신앙에는 도구를 언어적 방법으로만 제한하지 않으며, 객관화된 공유개념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객관화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사실로 약속하며 그 약속된 사실을 믿도록 제한하고 규정하기도 하지만 주관적 상태로 남길 수 밖에 없는 부분을 인정하며 그것을 존중하고, 또 그것을 신비로 남겨놓는다.
또 객관화하지 못한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또다른 중요하고도 유용한 수단인 믿음이라는 도구로 해결하거나 공유화 하려한다.
이러한 해결책은 우리인간의 지평을 실존적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인류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고 보배로운 실존적 확장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과학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우리 인간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다.
여기에서 나는 '유일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넓게 보아서 신앙과 그 속성이나 전달 능력에서 그 가치에 버금가는 인간의 인식표현행태가 있다면 나는 음악을 꼽고 싶다.
인류에게 있어 창조했던 많은 영역이 있지만 음악만큼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없으리라. 음악은 영혼을 위로하며 사고의 끝넘어로 인도한다.
그것은 이성이나 지성의 범위를 넘어 인간 내면의 깊은 심연으로 초대하고, 그넘어에서 우리를 손짓한다.
만약, 인간에게 음악이 없다면 밤길을 걸을 때 비추는 달빛의 위로와 초대스러음이 없는 것과 같으리라.
우리 인류가 신앙을 생각할 수 있었을 때, 나는 그 곳에 음악이 있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신앙은 과학을 감싸안고 그것을 뛰어넘으며 그밖에 있다.
그러므로 과학의 그 저차원적 수단으로 신앙을 바라봄은 하루살이의 눈으로 사계절의 풍광을 이야기함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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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앙과 과학을 이리 길게 설명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신앙의 범주에서 이해되야 하는 것을 쉽게 과학적 판단으로 말하고, 단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조과학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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