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음악: 야훼 나의 주여 - 시편8/ 조영희 노래)
<플레너건 지음 "구원의 역사" 제2부 신약성서(구원의 선물), 제6장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 중에서>
죽음을 이긴 승리 :
그러나 구원 사업은 죄를 보상하기 위한 사랑과 순명의 가장 고상한 실천으로서 예수의 죽음에만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구원 사업에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면이 있다. 사탄의 왕국의 주요 특징은 죄와 죽음 두 가지였다.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은 죄에 대한 승리를 가져왔다. 이 승리는 죽음을 극복한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여자에게서 태어난는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을 쳐부수셨다. 첫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으나, 둘째 아담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의 생명을 보장해 주셨다.
바울로는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부활을 숙고함으로써 죽음을 조소할 수 있었다. 바울로에게 죽음은 무서운 것이 못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셨고 다시 부활하셨다. 바울로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지만, 그 죽음은 이 세상으로부터 비할 데 없는 영광과 행복에로 들어가는 길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를 입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의 비극은 잊혀졌다.
구원은 정확히 말해서 죄를 보상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과 그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왕국을 쓰러뜨리셨다. 우리는 바로 이 사탄의 왕국에서 해방되어야만 했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기에는 두 가지 면,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로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이는 우리의 범행들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로마 4, 25).
바울로는 사탄을 쳐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묘사할 때에 꼭 전쟁에서 승리하여 쇠고랑을 찬 포로들을 이끌로 개선하는 로마 황제를 연상케 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누는 모든 이에게는 사탄은 쇠고랑을 찬 포로와 같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권력들과 권세들을 발가벗겨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고 그분을 통해서
그들을 사로잡아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골로 2, 15).
자기 백성을 위하여 그 생명을 내어 주시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소중한 공동 재산이었다. 사도행전 3장 13절과 26절에 보면, 베드로는 성전에서 설교할 때 그리스도를 종이라고 한다. 필립보 부제는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양에 관한 성서의 예언을 완성시키셨는지를 설명해 줌으로써 복음을 전한다. 바울로도 야훼의 종, 즉 그리스도께서 모욕을 당하신 끝에 현양되시는 것을 강조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찬미가에게 똑같은 식으로 해석한다.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
그러므로 하느님게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어
어느 이름보다도 빼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내리셨도다.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 앞에
천상 지상 지하계 모두가 무릎을 끓고,
모두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도다 (필립 2, 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