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필립스코트신부 씀, 이인복마리아 옮김, 우진출판사, 가톨릭은 왜 좋은가>
보속이 남아 있는 죄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건 연옥에서건 우리는 죄로 인한 일시적 형벌에 대한 보속을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하느님의 도시-일시적 형벌에 관하여>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일시적 형벌은 생전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사후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생전과 사후에 모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모두가 마지막 심판 이전에 일어난다."
성 어거스틴 시편 주석, <불에 관한 언급>에는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시편 32장 2절. "야훼여! 성난 김에 내 죄를 캐지 마소서. 화나신다고 벌하지 마소서"의 해설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이 나를 깨끗하게 하시어 내가 더 이상 정화의 불꽃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하시니 그것이 바로 불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과 같이 구원을 받았다' (고린토 전서 3장 15절)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심으로 불에 대하여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불로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그 불은 세상에서 사람이 당하는 어떤 고통보다도 가혹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은 비록 사후에라 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 중 어떤 이는 구원 받고 혹은 느리게 혹은 빠르게 연옥 불을 거쳐 소멸해 버린 선행의 정도에 비례하여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연옥의 불을 통해서 말입니다."
연옥의 고통이란 어떤 것인가?
교회가 연옥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의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는 연옥의 고통이 상실의 아픔 같은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연옥 영혼들은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슬픔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냉담한 가슴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 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름침 밖에서 살아야 하는 아픔입니다.
하늘에는 이기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사랑 안에서 완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완전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옥에는 감각적인 고통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아 감각적인 고통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습니다. 연옥의 고통이 어떤 정도의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장하기를 연옥의 가장 작은 고통이 이 세상의 가장 큰 고통보다 크다 했습니다.
아레스의 성인 씨자 ( AD 470~542) 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연옥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긴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연옥의 불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형벌보다도 연옥의 불이 더 어렵다고는 말하지 마라."
역사적인 사실
예수님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고 그래서 축제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늘 가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나 오늘 날에도 정통 유대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행하여집니다. 일 년에 세 번씩, 망자들을 위한 추모 기도가 봉헌됩니다. 유대인은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11개월 동안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카디쉬를 행합니다. 이 기간은 죽은 이의 정화를 위하여 유대 전통이 지정해 준 기간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살아계시던 시기에 바치던 성전 예절의 중요한 일부분이었으며 예수님이 이 카디쉬를 부인하신 흔적은 전혀 찾하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성전 예절을 수용하셨으리라고 추측됩니다.
왜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가 ?
만약 지옥에 있다면 어떤 기도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영혼이 천국에 있다면 아무 기도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3의 장소, 연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