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그늘 (김수복 스테파노)

2005. 3. 17. 오전 10:16:16

글자
 

살구꽃 그늘


김수복(스테파노)


용서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걷는 동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불러세워 물어 보아도

모른다고 한다

앞지르는 바람조차 모른다고 한다


봄이 와도 물오르는 봄밤이 와도

용서하며 걷는 나를

얼굴을 가리고 모른다고 하고

집앞의 살구꽃도 휘드러진 봄밤을 감싸안고

용서하며 사는 법을 모른다고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때로는 의견이 충돌하기도 하고, 별것 아닌 일로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영원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관계로 악화되기도 하지요. 위에 인용된 시에서는 이와 같이 악화된 감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그러한 상처를 안겨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용서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걷는 동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라는 구절에서 그렇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그 핵심에 바로 ‘나-자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시에서처럼 ‘앞서가는 사람들’도, ‘앞지르는 바람’도, ‘봄’도, ‘봄밤’도, 모두들 ‘용서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모른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용서하는 마음’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처를 받은 바로 ‘나-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때, 그 때에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사하게 핀 ‘집앞의 살구꽃’까지도 ‘용서하며 사는 법을 모른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 길고 추웠던 겨울을 지내고 한 줄기 햇살에 기대어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린 ‘살구꽃’에게 있어서 지난겨울은 원망과 질타의 대상이겠지만,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그 모진 시간을 견딘 보람으로 이 화창한 봄날에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워 올린 ‘살구꽃’의 마음, 주변상황을 원망하고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그저 묵묵히 하고 있는 마음―그 마음이 바로 이 시에서 시인이 찾고 있는 ‘용서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14-15절),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루가복음, 6장 37절),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 3절)라고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마음의 모든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혹한의 겨울을 이기고 시골 어딘가에 환하게 혼자 피어 봄을 손짓하고 있는 ‘살구꽃’의 마음이 되어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할 때에 더욱 의미 있는 사순시기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윤호병 빈첸시오, 문학평론가,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영혼의 속삭임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