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일요일
[연중 제30주일] 세리의 기도 (루카18,9-14)
제1독서<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집회35,15ㄴ-17.20-22ㄴ)
15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16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17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
20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21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살펴 주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
22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의 송사를 듣고 판결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화답송>시편34,2-3.17-18.19와 23(◎7ㄱ)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
제2독서<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16-18)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8,9-14)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연중 제30주일 제2독서(2티모4,6~8.16~18)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7~8)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티모테오 2서 4장 6절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티모테오 2서 4장 7절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인데, 티모테오 2서 4장 8절과 함께 암송까지 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세 가지 단언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는 '내가 훌륭히 싸웠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싸우고'로 번역된 '에고니스마이'(egonismai)는 '싸우다', '투쟁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고니죠마이'(agonizomai)의 현재 완료형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9장 5절이나 콜로사이 1장 29절 등에서 나타나듯이 바오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며, 바오로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투쟁의 삶을 살았음을 나타내준다.
새 성경은 그냥 '훌륭히'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톤 칼론 아고나'(ton kalon agona; a good fight)로서 '선한 싸움을' 이란 말이다.
여기서 '싸움'이라는 것은 이어서 등장하는 '달릴 길'이란 어구를 참조할 때 바오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싸움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운동 경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올림픽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고 이제 그것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 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달릴 길'로 언급된 '드로몬'(dromon)은 일반적으로 '경주 코스'를 뜻하는데, 이는 본문이 운동 경기 가운데서도 마라톤 경기와 관련된 비유임을 암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마치 마라톤 선수가 그 긴 거리를 완주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마라톤 경주를 마쳤다고 회고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다 달렸다'로 번역된 '테텔레카'(teteleka)가 본래 '끝내다','완수하다'는 뜻을 지닌 '텔레오'(teleo)의 현재 완료형이라는 사실은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한 그 영광스러운 복음 전파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왔고 이제 드디어 그 일을 완수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즉 본문의 핵심은 사도 바오로가 그다지도 긴 믿음의 코스를 완주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세째로 사도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틴'(pistin)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신실성'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한번도 굴하지 않고 줄곧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켜왔던 것이다.
이것은 '지켰습니다'로 번역된 '테테레카'(tetereka)가 '지키다','보존하다'라는 뜻을 지닌 '테레오'(tereo)의 현재 완료형이란 사실이 보여 준다.
이 단어는 경기하는 자가 자신이 참가한 종목에서 경기 규칙을 지키는 것, 군인이 군대와 그 상관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지키는 것, 나아가 청지기(집사)가 자신의 주인이 위탁한 재산을 지키는 것과 결부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정리하면 이제 죽음에 즈음한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과거의 생을 돌아 보건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만큼은 당당히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8)
'이제는'으로 번역된 '로이폰'(loipon)은 문자적으로는 '이제 남은 것은'이란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6절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7절에서 자신의 과거 상황에 대해 언급한 반면, 이제 8절에서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믿음에 관한 한 떳떳한 인생을 살아온 사도 바오로의 미래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의로움의 화관'으로 지칭한다. 여기서 '화관'으로 번역된 '스테파노스'(stephanos)는 일반적으로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인 월계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주어질 '의로움의 화관'이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해 두신 것으로서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에서 수여되는 영원한 생명과 충성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1티모6,12; 야고1,12; 1베드5,4; 묵시2,10).
한편 본절에서 '마련되어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포케이타이'(apokeitai)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쓰였다. 이것은 '의로움의 화관'이 수여되는 시점이 미래이지만 현재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자신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수여할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것은 바로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이다.
여기서 '의로운 심판관'에 해당하는 '호 디카이오스 크리테스'(ho dikaios krites)는 문자적으로 '정직한 재판장'(the righteous judge)이라는 의미에 가깝지만, 문맥상 일체의 오류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인류 곧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분(2티모4,1),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 의로운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날'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재림의 날에'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주님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려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수여하실 것이다.
여기서 '애타게 기다린'으로 번역된 '에가페코신'(egapekosin)은 본래 '사랑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가파오'(agapao)의 현재 완료 분사 복수형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상급을 받을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의로움의 화관이 주어질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연중 제30주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 예로 바리사이가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의로움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런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본디 유다교에서는 속죄의 날에 단식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율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열심히 종교 생활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단식하는 횟수를 차츰 늘려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에 경건하다고 스스로 여기는 이들이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을 지키는 것도 철저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원에서 얻는 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바칠 정도였습니다(루카 11,42 참조).
기도 내용을 보면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법을 열성적으로 따르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계층이었으며,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차이는 ‘기준’입니다.
바리사이의 기준은 자신의 행실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규정을 지키며 자랑스러워하는 바리사이의 기도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기준이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잘잘못을 떠나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그분의 구원을 청합니다.
자신의 행실만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0주일 복음
천국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는 곳
천국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는 곳이지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은혜)으로 가는 곳이지 사람의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루카18,9-14)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 교회에는 의롭다고 착각하는 죄인들과 죄인임을 아는 죄인들, 두 부류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이는 다 죄인이라 하셨습니다.
(로마3,10-12)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 하느님의 뜻인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한 깨달음이 아닌 사람의 뜻, 땅의 목숨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잇기에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 그 호의를 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 두 사람- 기도의 두 모습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강도짓과 불의, 간음을 하지 않으며 단식과 감사의 십일조를 바치는 종교인~ 참 신앙의 모델이 아닌가요?
그런데~
(루가12,1) 그러는 동안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 바리사이들의 그 자기 의로움은 위선이라 하십니다. 세상에 자기 명예,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자기 의로움으로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자기 의로움으로 간다면 죄인들의 대속으로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그분의 죽음, 그 하늘의 의로움을 헛되게 하는 죄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의 대속, 그 의로움으로 가는 곳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2코린5,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1베드2,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로마3,24)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 하늘의 대속으로 받는 용서, 의로움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의로움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고 우리 창조의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이사43,7) 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 신앙인 입니다.
(에페1,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은혜, 선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 인간들의 계명으로 이룬 그 자가 의로움으로 드리는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인 나무의 희생(탈출15,25), 곧 십자가의 예수님 그분의 의로움으로 드리는 영광입니다. 하느님은 그 영광만 받으십니다.
(요한5,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 죄인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진리로 깨닫고, 믿어서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인간들의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늘의 대속으로 받은 의로움으로 입니다. 하늘의 대속, 그 죄에서의 자유, 그 약속의 말씀은 죄인임을 깨달은 그 낮은 자리에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야고1,21.25)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아멘,
= 자유의 법, 십자가의 사랑, 그 복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대속 그 사랑으로 가는 천국입니다.
♡ 아멘
연중제30주일 복음 (루카18,9-14)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복음 18장 1~8절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절망하지 말고 인내하며 항상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교훈을 주었다면, 루카 복음 18장 9~14절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에 해당하는 '에프 헤아우토이스 호티 에이신 디카이오이' (eph' heautois hoti eisin dikaioi; in themselves that they were righteous)에서 '에프 헤아우토이스'는 직역하면 '그들 자신들'로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위선적인 의(義)를 행하는 자들이었다(마태6,1).
고전 희랍어 문헌에 보면, '의로운 자'란 그 행위가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 신들과 이웃들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를 말했다.
그러한 의무 이행은 그 사람을 불의한 자들과 구별해 주는 기준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할 정당한 의무도, 그리고 이웃에게 행해야 할 진정한 사랑과 공의도 완벽하게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의로운 자라고 불렀다(루카20,20).
아마도 그들은 율법에 해박하였고, 비록 위선일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열성적인 율법 이행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근본 정신을 저버림으로써,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껍데기 외형적 행동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신들의 고정 관념의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높여 세우는 위선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이었는데, '업신여기는'으로 번역된 '엑수테눈타스'(eksouthenountas; despised; looked down on)는 '경시하다', '얕보다'는 뜻을 지닌 동사 '엑수테네오'(eksoutheneo)의 현재 분사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에 해당하는 '호이 로이포이 톤 안트로폰'(hoi loipoi ton anthropon; other men)는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 집단 외에는 모두 의롭지 못한 부정한 자들로 여기는 극히 독선적이고 편협한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루카 복음 18장 10절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모든 도시의 건물들 위에 높은 지대인 모리야 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에 대한 외경심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보통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현재의 시각으로 말하자면, 오전9시, 정오, 오후3시이며, 유대의 시간법으로는 각각 제3시, 제6시, 제9시였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기도하던 장소는 성소가 아니라 성전의 뜰로서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워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리는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을 볼 때, '여인의 뜰'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중 하나는 '바리사이'에 해당하는 '파리사이오스'(pharisaios; a pharisee)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사이와 확연히 구분되는 '세리'에 해당하는 '텔로네스'(telones; a publican; a tax collector)이다.
바리사이는 율법의 외형적 준수를 중요시하던 당파로 자신들 스스로에 대하여 의롭다고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책에 따라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수탈하언 자로서, 사람들에게는 죄인으로 여겨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바리사이는 의(義)를 대표하는 자처럼, 세리는 마치 부정과 불의의 대표처럼 여겨졌다.
한편, 루카 복음 18장 11절에 나오는 '서서'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자세였다.
여기 '서서'에 해당하는 '스타테이스'(statheis; stood)는 '서다', '두다', '위치하다'는 뜻을 가진 '히스테미'(hystemi)의 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세리가 서서 기도했다는 표현이 능동형으로 쓰인 것과 달리, 바리사이의 경우에 수동태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바리사이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즉 자신을 드러내고자 의식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태도를 암시한다.
그리고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한 것으로 나오는데, 원문에는 '꼿꼿이'가 '프로스 헤아우톤'(pros heauton)이다.
여기서 '프로스'(pros)는 '~에게로 향하여'(towards)라는 뜻의 전치사이며, '헤아우톤'(heauton)은 '그 자신'(himself)이라는 뜻의 재귀 대명사이므로, '그 자신에게로'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자신을 치켜세우면서 기도했다는 의미도 있고, 문맥상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무리들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자신의 자랑거리만을 늘어 놓으며 하느님께 거만하게 기도했던 것으로도 보며, 혹자는 바리사이가 하느님께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이제 바리사이는 세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하는 것으로 나온다.
'강도 짓'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robbers)는 형용사로, 이리처럼 '탐욕스러운', '게걸스럽게 먹는'이라는 뜻이며, 명사로는 '강도', '사기꾼'이라는 뜻이 된다. 그 당시 세리는 로마에 고용되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으며, 그래서 세리는 지배자들인 로마보다 더 악하고 불의하다고 여겨졌고, 동족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더군다나 단순히 로마에서 원하는 세금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세금 외의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바리사이도 너무나 잘 알기에 세리의 죄를 간접적으로 들추어 내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리는 '강도짓' 뿐만 아니라 '불의'를 저질렀다고 지적받는다.
'불의'에 해당하는 '아디코이'(adikoi; unjust; evildoers)는 정의를 해치거나 범하는 자들에 대한 표현으로서,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속임수로 대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간음'에 해당하는 '모이코이'(moichoi; adulterrers)도 '강도짓'과 '불의'와 다 연결될 수 있는 범죄이기에 여기서 나열한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강도짓을 일삼았고(마태23,14),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불의한 자들'이었고(마태23,28), 여자를 보고 음란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다(요한8,7~9; 마태5,28).
루카 복음 18장 11절에서 바리사이는 세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이들과 구별되는 자로서 의롭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회개해야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없기에 구할 것도 없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루카 복음 18장 12절에서 말한다.
구약에서는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단식(레위16,29~30; 민수29,7)하도록 되어 있지만,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규정에 없는 경건의 습관으로 일주일에 두 번 단식했다고 자랑한다.
바리사이들은 시나이 산에 계약을 맺으러 올라간 날로 여겨시는 목요일과 내려온 날이라고 여겨지는 월요일에 단식했던 것이다.
사실 모든 재산과 소득의 십일조를 준수하는 바리사이들은 신명기 14장 22~23절의 규정을 능가하는 봉헌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단식'하다에 해당하는 '네스튜오'(nesteuo; I fast)와 '십일조를 바치다'에 해당하는 '아포테카토'(apodekato; I give tithes ;I give a theuth of)가 바리사이들의 자랑거리인데, 그들은 하느님 앞에 겸손하기보다는 자신만이 의롭다는 교만과 자신이 정작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기도를 바치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8장 13절에서 세리는 죄인과 같이 취급당하여 거룩한 성소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또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바리사이 옆에 서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일반적인 자세인데, 세리는 눈을 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치도 않았다.
세리는 자신의 더러움과 비천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으며, 겸손함과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의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했으며,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힐라스테티'(hylastheti)는 '힐라스코마이'(hylaskomai)의 수동태 명령형이다.
이 단어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게 만들다', '자신과 화해시키다'는 뜻인데, 가슴을 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참회와 겸손의 극치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호의를 가지소서'라는 말이다.
2025년 10월 26일 일요일
[연중 제30주일] (이찬우 다두 신부)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한 다음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기 불편할 때,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만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난다면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적은 명함을 드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야기를 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명함을 드렸다면,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요?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사이는 당당히 예수님께 이런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의인,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명함을 받아 넣고 다시 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찍이 서 있던 세리는 예수님께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인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
죄인, 세리.’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으시고 그에게 당신의 명함을 주셨을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과 만나기 위하여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리는 예수님의 명함을 들고는 가슴이 설레어 돌아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주님 사랑에 맞갖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많고 약한 모습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명함에 이런 글들을 적고 싶어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이’, ‘날마다 미사에 나가는 이’, ‘무슨 무슨 봉사를 하는 이’, ‘세상의 무슨 직함을 가진 이’라고 말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나는 주님을 만난다면 무엇이 쓰인 명함을 건네드릴지 생각하며, 겸손하게 한 주간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
2025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자신의 잘못된 죄(病)를 스스로 고치겠다는 어리석은 자가 많다.
(루카18,9-14)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 스스로의 열심,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자기 자랑과 다른 이를 판단하게 된다. 그것이 죄(병)를 잉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선, 의는 개짐(쓰레기)일 뿐이라 하신 것이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ㄱ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 하느님의 뜻, 말씀에 의한 기도가 아닌 자신의 뜻, 말에 의한 교만의 모습이다.
11ㄴ‘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 율법을 열심히 지킨, 자기 의로움이다.
(갈라3,10-11.24) 10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갈라5,4)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ㄱ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기에 의로움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으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사53,11) 11 그는(예수)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로마3,24)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5,9.15)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은혜)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은혜)의 힘이 얼마나 큽니까.!
14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평지를 이루시겠다는 말씀이시다. 높은 곳은 낮게, 낮은 곳은 높게~그렇게 하느님 당신 백성을 자비로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루가1,52-55)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끌어 내리시고 빈손으로 내치시는 것, 시련이며 고통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셔서 우리를 살리신다. 자기 의로움이 컷던 욥과, 완전한 바리사이였던 사도 바오로를 그렇게 살리 시었쟌은가!
(호세6,1-3)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부활)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 이틀뒤, 사흘째, 모두 3이다. 사흗날에 씨의 희생, 하늘의 대속,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의롭게 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하느님의 뜻인 말씀을 배우는 곳이다. 그분의 뜻을 완성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마르10,34) 34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로마4,25) 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 우리는 온갖 질병(암)으로 고통 받을 때, 의사에게 돈을 줘가며 나를 맡긴다.그리고 아픈 수술을 자청해서 받는다.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다. 그런데 영적 질병(암, 죄)들을 거저, 아니 대속의 죽음으로 고치시어 의로움과 구원을 주시겠다는 그 주님께는 청하지도, 감사할 주도 모른다. 어리석음이다.
하느님의 얼(뜻)과 인간의 얼(뜻)이 섞인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어리석음을 죄라고 하신다.(마르7,21~) 오늘 바리사이가 자신의 질병, 곧 구원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하겠다는 어리석은 죄인이다. 그가 주님께 돌아와야 한다.(우리 이야기다)
(마르2,17)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요한12,47)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말씀(칼)으로 영의 수술을 잘 받도록 하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