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9일 일요일
[연중 제29주일(전교 주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28,16-20)
제1독서<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이사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화답송>시편98(97),1.2-3ㄱㄴ.3ㄷㄹ-4.5-6(◎2) ◎ 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제2독서<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28,16-20)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연중 제29주일제1독서 (이사2,1-5)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3)
앞선 2절에서는 세말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집(성전)으로 모여드는 영광된 미래를 예언하였다. 이제 본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날에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예언한다.
그 가운데 본문에서는 주님의 통치를 받으러 모여드는 사람들이 아직 관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여정을 떠나자고 촉구하는 내용이 직접화법으로 소개된다.
여기에서 '자'(오라)에 해당하는 '레쿠'(leku)는 '걷다' 라는 의미의 동사 '알라크'(alak)의 명령형으로서, 적극적으로 주님 신앙을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요청의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에 해당하는 원문인 '엘 뻬트 엘로헤 야아코브'(el beth elohe yaqob ; to the house of the God of Jacob)에는 동사가 없다. 다시말해서 본문의 동사는 앞 문장에 나오며, '우리가 ~ 올라가자' (let us go up) 로 번역된 '웨나알레'(yenaalle)이다.
따라서 본문은 실질적으로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올라가자는 촉구이며, 여기서 '야곱의 하느님의 전'은 앞서 나온 '주님의 산' 과 동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주님의 산' 이 바로 '야곱의 하느님의 전' 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이 받을 축복이 본래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근거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성도들의 신앙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성조들이 섬겼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만들었던 성전에 임재하신 하느님을 신약의 교회도 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여겨지는 것은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원사의 점진적 전개 과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폐쇄적으로 배타적인 선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민족중에서 하느님의 소유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을 민족 중 사제의 나라로 삼으셨다고 밝히셨다.(탈출19,5.6) 이것은 결국 그들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만민을 중재하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사제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 자신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들, 곧 천하만민의 구원이 전제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이며, 거룩한 민족 공동체와 예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과정에서부터 구체적으로 표명된 것이기도 하다.(창세12,1-3)
이같은 측면에서 세상 만민,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의 성전에 나아가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본문의 내용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가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전혀 새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스라엘의 실패와 허물, 하느님의 구원사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바로 잡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주님의 성전에 오르기 전까지 이방인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그 산에 오른 후로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살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의 길' 에 해당하는 '밋데라카이우'(mydderakaiu)의 원형 '떼레크'(derek)는 원래 여러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밟아서 만들어진 탄탄한 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3인칭 단수 소유격 접미어가 붙어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이상적으로 정해 놓으신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상관없이 육신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왔던 이방인들 중에서도 새롭게 그분 은총의 통치 아래 들어온 자들을, 당신 백성들이 이전부터 지켰던 삶의 방식으로 가르치실 것이란 사실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 결과는 주님의 산으로 올라온 자들이 주님의 길로 걷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분의 길' 에 해당하는 '뻬오레호타이우'(beorehothaiu)의 원형 '오라흐'(orah)는 '떼레크'(derek)보다 약간 작은 길을 의미한다.(창세49,17)
본문에서는 '~안에' 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뻬'(be)가 접두되어, 새롭게 주님의 백성된 자들이 그분의 길 안에서 살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의 빛 아래 비추어 이해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 된다.(예레31,34 ; 요한14,26)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유의 접속사 '키'(ki)로 시작되는 문장으로서, 주님의 통치 아래로 모여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길 안에서 거닐 수 있는 것인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준다.
또한 본문은 '가르침'(율법)과 '주님의 말씀' 이 대응을 이루고, '시온에서 ~나오고' 와 '예루살렘에서 ~나오기'가 대응을 이루는 평행 대구 구조의 문장이다.
여기서 그 이유는 '가르침'과 '주님의 말씀' 이 '시온' 즉 '예루살렘' 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으로 제시된다. '가르침'(율법)에 해당하는 단어는 '토라'(torah)이며 기본적으로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에는 관사가 부착되어 있지 않는데, 이것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포함하여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거룩한 삶을 위해 그들에게 계시해 주신 모든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말씀' 에 해당하는 '따바르'(dabar) 역시 주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주님은 그분 계시의 말씀, 그분의 백성들이 분명히 분별할 수 있는 율법을 근거로 해서 그분에게 모여든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실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명확히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 '가르침'(율법)과 '말씀' 이 '시온' 즉 '예루살렘' 에서 나온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와 현존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나올 것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될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예언은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구현되었다.
실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머물러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으며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다.(사도2장)
당시 16개국에서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및 경건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전파된 복음을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들었으며, 그때부터 복음이 만방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의 빚진 자들이며, 이스라엘이라는 원 올리브나무에 접붙혀져 그 진액을 먹고 성장한 자들이다.(로마11,17.24)
본문에서 이사야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 700 여년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계시로 이런 일을 내다보며 이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사가 우연이나 계획없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철저한 계획과 작정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 나아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연중 제30주일] (전교 주일) 매일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우리는 전교 주일을 지냅니다.
교회 본연의 사명은 무엇보다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일, 곧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음화 사명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에서 비롯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신앙의 길로 먼저 초대된 이들은 그 신앙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은총으로 얻게 된 믿음을 모든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가 끊임없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그런데 선교는 매우 험난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천 년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거부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박해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가 복음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현존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복음서의 시작(1,23)과 마침(28,20)에서 장엄하게 선포되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걸어가는 선교 여정의 시작에서 마침에 이르기까지 늘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하십니다.
혹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어떤 특별한 훈련을 거친 전문가들이나 하는 것쯤으로 여기면서 그들에게 선교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나누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 사랑을 전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교 주일을 맞아 과감히 그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입당송 시편 67,2-3)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길을 세상이 알고, 당신의 구원을 만민이 알게 하소서.
= 하느님, 자비의 얼굴, 구원의 길은 성경에 있다.
*(본기도)
하느님, 참 빛이신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약속하신 성령을 내리시어 사람들 마음속에 언제나 진리의 씨앗을 심고 신앙의 꽃을 피우게 하시며, 모든 이가 세례로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얻고 하느님 나라에서 한 백성을 이루게 하소서.
2독서(로마10,9-10.17)
9 예수님은 주님(주인)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우리 모두의 죄의 대속의 죽음(死亡)이며 부활이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말씀을 나 자신에게 먼저 들려주어 믿음을 가져야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복음(마태28,18-20)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의 계획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다 이루셨고, 성령께서 완성하셨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죄인이 무죄한 하느님의 자녀로 선포하셨다. 그 말씀을 믿도록(간직 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다.
그 말씀을 믿도록(간직 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 그 계약(약속)을 진리로 깨닫도록, 하늘의 영, ‘성령을 받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14,26)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15,26)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구원이 진리)를 증언하실 것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로마8,8-9)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의 용서, 평화, 위로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사, 세례 행위로 얻는 용서, 평화, 위로가 아니라,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믿음으로 얻어 지키는 주님의 용서, 평화, 위로다. 그래서 우리의 착한 삶을 넘어 성령을 통한 말씀 선포가 선교이며 이웃사랑이다.
☨주님의 용서(容恕)로 평화(平和), 위로(慰勞)로 늘 함께 하시는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29주일 복음 (마태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18ㄴ~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해당하는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pasa eksousia en ourano kai epi tes ges;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에서 '하늘과 땅의'로 번역된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en ourano kai tes ges)는 '하늘 안에 그리고 땅 위에'로 직역되는데,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권한'에 해당하는 '엑수시아'(eksousia)는 신약에서 '권세', '권능', '권리', '힘', '자유함'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보자(중재자)로서의 권한'이 강조된다.
또한 '나는 ~받았다'에 해당하는 '에도테 모이'(edothe moi; was given to me)에서 '에도테'(edothe)는 '주다'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 동사의 직설법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로서 '그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인 것은 성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동사가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받은 권한이 단번에 받은 것임을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화(강생) 이전에도 성자로서 성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셨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자연계와 영계를 제어하는 권한을 나타내보이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권한은 신성(神性)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지니셨던 권한에 비하면 제한적이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상 구속(대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잠시 성부 하느님께 맡겨 드렸던 본래의 권한을 다시 받아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속 사업과 부활 이후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오직 구속 사업을 완수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행사하기로 하셨다(요한5,20~22.30).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그 권한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서 제자들에게 선교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영역인 하느님의 나라는 선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확장되고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희는 가서'로 번역된 '포류텐테스'(poreuthentes; go)는 복수 2인칭 명령 분사이며, '너희'는 직접적으로 승천 직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지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사도1,8참조).
그리고 제자로 삼아야 할 대상은 '모든 민족'이다. 여기서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네'(ethne)는 '에트노스'(ethnos; nations)의 목적격 복수로서 제자를 삼는 대상이다.
또한 '제자로 삼아'에 해당하는 '마테튜사테'(matheteusate; make disciples; teach)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복수 2인칭 명령형 동사이다.
이 동사는 '너희는 가서'에 해당하는 '포류텐테스'(poreuthentes),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가르쳐'에 해당하는 '디다스콘테스'(didaskontes)의 세 개의 분사에 둘러싸여 있다.
원문의 뜻은 '제자로 삼는 일'이 '가는 것'과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의 궁극적인 핵심을 보여 주는데, '제자로 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이며, 나머지는 이에 수반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baptizing)는 현재 분사인데,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세례가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 세례가 바로 제자로 삼는 수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밥티존테스'(baptizontes)의 기본형인 '밥티조'(baptizo)는 본래 '담그다'는 뜻을 지닌 '밥토'(bapto)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동사가 '세례를 받다'(사도1,5)는 세례 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일 때에는 '담그다'와 '씻다'(루카11,38참조)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가 있다.
먼저 이 동사를 '담그다'는 의미로 볼 때, '세례'는 몸을 물에 담그는 의식을 나타내며, 영적으로 믿는 이들이 세례 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 강조된다(루카12,50; 로마6,3).
또한 이 동사를 '씻다'는 뜻으로 보면, '세례'는 '죄의 씻음', '죄의 용서'라는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사도2,38; 22,16).
실제로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뜻과 더불어 죄사함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한 분이심을 명확하게 하셨다.
[연중 제29주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사야가 그려 보인 마지막 날의 모습,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은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거기에서 주님의 길을 배우며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전쟁 기술은 배울 필요도 없고, 칼과 창은 쳐서 농기구로 만드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티나의 상황을 보면서, 이사야 시대의 그곳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아하즈 임금 때는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남 왕국 유다로 쳐들어왔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다음 히즈키야 임금 때는 아시리아가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성읍이 정복되었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모든 지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 전쟁을 겪었기에 오히려 전쟁 없는 세상을 그렸습니다.
이사야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금 유다인들과 팔레스티나인들이 서로 죽이는 모습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로마인들은 유다인들을 몰아냈고, 중세에는 십자군 전쟁도 있었으며, 지금은 지금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유다인들보다 덜 호전적이어서 그들을 덜 죽인 것도 아닙니다.
유다인들과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 근본적으로는 같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인데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의 날은 이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를 위한 날이지만,
오늘의 독서를 들으면서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가 참으로 ‘복음화’되어 주님의 길을 배우고 서로 맞서 칼을 쳐들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하느님의 지혜, 진리이신 성령께 우리 모두를 의탁하며~
선악의 법을 깨고 벗어나는 것, 선과 악을 하나로 갖는 것, 선악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 진리다.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서 엉뚱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진리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가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율법과 세상 선악의 논리를 끊어버림 이며, 하늘의 생명, 의를 지키도록 가르쳐야 할 진리의 복음 선포다. ‘제사와 도덕과 윤리, 그 인간의 계명을 진리로 가르쳐 지키도록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티토1,14)
2독서(로마10,9)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우리의 죄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인간의 의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이신데 어떻게 하느님이 죽으실 수가 있는가? 어짜피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을 살리실 수 있으니까 잠시 당신을 죽였다가 살리신 것? 그러면 십자가는?~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일을 우리에게 ‘쑈업’ 하신 것? 그것은 우리가 가진 말에 정의와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진리의 내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요 우매(愚昧)한 생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 죄, 생명, 의, 선’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가진 국어사전적 개념과 많이 다르다.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의 죽음과 같은 그 죽음을 죽으시겠는가?
이 ‘호 코스모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이다. 아기의 탄생도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고, 결혼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육신의 죽음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끝인가? 나쁜 것인가? 더럽고 무서운 것인가? 이미 그러한 결정이 내려져 있기에 하느님이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금방 우리의 선, 악, 체계로 돌아가서 ‘이것은 나쁜 것, 이것은 좋은 것’ 이렇게 판단하고 그것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개짐, 쓰레기’라고 하는 것이다.(이사64,5)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선악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죽음, 그 죽음이라는 것은 진리와 분리된 피조물의 상태와 결국(結局)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영원의 나라에서 보면 그 죽음이 찰나(刹那)에 불과한 역사의 죽음으로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시작이다. 모든 인간은 영원을 산다.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그러니 반드시 진리를 알고 가야한다. 모든 존재는 영원을 사는데 역사(歷史)는 찰나(刹那)다. 그런데 인간들의 제한된 이성 안에서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끝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나쁜 것, 무서운 것, 두려운 것이라고 자신들이 정했을 뿐이다.
육신의 죽음이란, ‘영의 생명인 진리’라는 호흡(르하흐-성령), 곧 하느님의 숨(르하흐)이 끊어지면(창세2,7)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죽음의 모형(模型), 시청각교재다. 그 죽음에서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 죽음은 무엇보다도 가치 있고 선(善)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죽음 마저도 선악으로 판단해서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은 나쁜 것이라 결정해 버린다. 마음 안에 믿음, 복음,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쓴다. 모든 것의 끝은 영원으로의 완성이다. 역사의 끝은~.
어떤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되어 그리로 가고, 어떤 이는 비 진리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된다. 그 둘이 그 완성된 존재로 영원을 산다. 한쪽은 천국이라 하고 다른 쪽은 지옥이라 한다. 그래서 전자를 ‘종’ 완성하다. 마치다. 후자를 ‘사망’ 그냥 죽는 것.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두 마음으로 판단해서 ‘죽음은 나쁜 것, 살아 있음은 좋은 것, 깨끗한 것.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 안에 말씀을 진리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악의 말‘ 그 비 진리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 곧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 진리다. 선이 악을 품어 없애시고 선과 악을 하나로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진리)가 아버지의 뜻(생명)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5년 10월 19일 일요일
[연중 제29주일(전교 주일)] (이찬우 다두 신부)
어릴 때는 겨울이 참 좋았습니다.
눈이 오면 눈사람도 만들고, 친구들과 눈싸움도 하고, 긴 겨울 방학도 있고,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좋았던 까닭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기쁜 날’이기 때문이 아닌, 산타 할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이날은 꼭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얼굴을 보고 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밤이 되고, 어느덧 밤 열한 시가 넘었습니다. 슬슬 잠은 오고, 부모님은 빨리 안 자면 산타 할아버지가 안 온다고 하셨지만 저는 꼭 얼굴을 보고 잘 거라고 떼썼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지쳐 잠이 들었고, 제가 걸어 놓은 양말에는 가지고 싶던 장난감 대신에 학용품이 들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일에서 설레어 합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 가던 날이 기억나십니까? 아니면 수학여행 갈 때는 어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나를 닮은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등 우리 삶 곳곳에 설렘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설렘이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느끼는 설렘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선포해야 할까요? 만약에 우리가 로또에 당첨되어서 내일 당첨금을 타러 간다면 잠이 오겠습니까?
어릴 때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나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릴 때처럼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기다려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면 자연스럽게 복음을 듣고 실천하며 선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설레는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
[연중 제29주일]
선교란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삶으로 사는 것.
복음(마태28,16-20)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의심했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은 사람의 지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의롭게 하시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것인가.
2독서(로마10,9-10)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받은 하느님이시라는 것, 곧 땅의 죄, 죽음에서 하늘의 용서, 새 생명을 주시는 권한이다.
(필리2,6-11)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성육신)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관계로 맺어주신 모든 이들, 모든 이웃들이 세례받을 모든 민족이 된다.
20ㄱ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갈라6,15)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예수님의 마음, 사랑으로 사는 것,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요한13,34)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 사신 것, 사랑이다. 서로 사랑할 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이다.(1요한4,12)
땅의 존재가 하늘의 존재가 되는 새 창조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이 되는 새 창조의 말씀을 믿고, 마음에 지켜 삶으로 사는 것이다.(2코린5,17)
20ㄴ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이다. 우리와 한 몸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 곧 진리의 영,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진리, 새 창조, 구원으로 이끌어 주심이다.
(요한14,18-19)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십자가의 죽음),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부활)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16,12-15)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오늘의 멧세지> 세상은 예수님 처럼 제자들 또한 미워하며 박해(迫害)할 것이다. 그때 주님의 가르침, 새롭고 살아있는 것인 새 창조의 기쁜 소식, 말씀을 믿고 지켜, 주님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어떤 시련, 고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 미사강론 중에서~ 선교란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삶으로 사는 것.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만들어 놓은 법의 하느님이 아닌, 참 진리의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련, 고난, 고통이 하늘의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임을 깨닫고, 그 하느님의 사랑, 은총, 은혜에 감사, 기뻐하는 일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야고1,2-4.12)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의 대속, 그 시련, 고난을 이겨내신 그 큰 사랑으로 주신 하늘의 복, 축복이다.
(히브10,20) 20 그분(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대속의 죽음, 사랑)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에페3,17-19) 17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주님!
*오늘 사제께서, 평신도 사도직의 구체적인 의미의 근원은 바로 사도라는 말의 그리스 어원 ‘누구로부터 보내어진 사람’ 으로 출발합니다. 따라서 사도(아포스틀)라는 말에는 파견한 사람이 존재하고, 파견자로부터 삼명을 받고, 파견자의 현존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 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한다고 할 때,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