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 20일 일요일
[연중 제16주일] 좋은 몫 (루카10,38-42)
제1독서<나리,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창세18,1-10ㄴ)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3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화답송>시편15,2-3ㄱ.3ㄴㄷ-4ㄱㄴ.5(◎1ㄱ) ◎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
○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
○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 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 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
제2독서<과거의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콜로1,24-28)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복음<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10,38-42)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제1독서 (창세18,1-10ㄴ)
그 무렵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거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1~5)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마므레'는 아브람과 동맹을 맺었던 아모리족의 한 사람인 '마므레'를 가리키는 이름(창세14,13.14)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개인 소유지로서 아브람이 롯과 헤어져 정착한 장소(창세13,18)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창세23,17.19; 35,27).
한편 '참나무들 곁에서'에 해당하는 '뻬엘로네'(beellone)는 '참나무'(상수리나무)를 뜻하는 '알론'(allon)의 복수형과 '속에', '~사이에', '곁에'를 뜻하는 전치사 '뻬'
(be)가 결합하여 당시 아브라함이 '참나무들 사이에', '참나무들 바로 가까이에 (곁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나타나셨다'에 해당하는 '와예라'(wayera; and appeared)에서 '보다'(창세7,1)라는 뜻이 있는 '라아'(rah)의 단순 재귀형이 사용되어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보여준다.
'한창 더운 대낮에'에 해당하는 '케흠 하이욤'(kehm haiyom; in the heat of the day)에서 '날'(창세1,8; 탈출6,28)을 뜻하는 '욤'(yom)과 정관사 '하'(ha)가 결합하여 '그날'(the day)이란 뜻의 '하이욤'(haiyom)이 쓰였다.
그리고 '한창 더운'에 해당하는 '케흠'(kehm)은 '입다'라는 뜻을 지닌 '하맘'(hamam)에서 유래하여 '더위'(창세8,22), '따뜻함', '따끈함'(1사무21,7)이라는 뜻을 가진 '흠'(hm)과 '~같이', '~처럼', '~할때'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케'(ke)가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날의 그 더운 때에'(in the heat of the day; while the day was growing hot)가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오전 일을 모두 마치고 가장 더운 때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였음을 알려 준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제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에 해당하는 '와잇사 에나이우 와야르 웨힌네'(waissa enaiu wayer wehine; and he lift up his eyes and looked and saw)에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발견한 것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지 않고, 감탄사인 '힌네(hinne)를 통해 묘사한 이유가 '잇사 예나이우'(issa enaiu; he lift up)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을 들어 보게 된 경우를 묘사한다.
즉 아브라함은 정오의 햇볕을 피하기 위해 천막 앞에 앉아 졸고 있던 중에 언뜻 눈을 들어 보는 중에 세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가지게 된 것이고, '힌네'(보라)라는 감탄사는 이러한 당황스러움을 묘사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왜 달려나가 그들을 맞이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이것은 그가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만회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보게 된 대상은 '세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혀 사람 이상의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달려 나가'에 해당하는 동사 '루츠'(ruts)는 '달려들다', '돌진하다'(욥기15,26), '급히가다'(1사무20,6) 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계속적 '와우'(wau)와 함께 쓰여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보자마자 곧바로 달려 나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맞으면서'에 해당하는 동사 '카라'(qara)는 '만나다'(창세46,29; 탈출4,27) 라는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급히 나갔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낯선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서둘렀음을 말한다.
이것은 손님을 맞이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졸고 있었기에 눈앞에 까지 그들이 왔어도 알아채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기 위해 평상적인 모습보다 더 과장된 행동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에 해당하는 '샤하'(shaha)는 재귀형으로 쓰여 외부의 간섭없이 자의적으로 '엎드리다'(창세23,7; 이사51,23), '절하다', '경배하다'(탈출11,8; 신명8,19) 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몸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이런 인사는 귀한 방문자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었다.
성경에서는 야곱이 에사우를 맞이할 때(창세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하며
맞아들일 때(창세48,12), 그리고 예언자 무리(생도들)가 엘리사를 맞이할 때 (2열왕2,15) 등 여러 시대에 걸쳐 이런 인사 풍습을 보여 주고 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나리'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원래 '주'(창세19,18; 여호3,11), '주인' (창세18,12; 판관19,11), '소유주'(창세42,30; 이사24,2)를 뜻하는 '아돈'(adon)의 강조형이며 남성 복수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나의 주여'(my lord)라고 하면서 1인칭 단수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 중 한 사람이 하느님이심을 즉각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의 기본 어근이 '아돈'이며, 이 단어는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창세18,12), 종이 주인(상전)을 부를 때 (창세24,12) 상대방을 지극히 높여 부를 때 사용되었고,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점(히브13,2) 등을 들어 아브라함이 그들 중 한 명이 하느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지극히 높여 부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들을 발견했을 때 '세 사람'이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되며, 아브라함은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이들 중에 한 명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은 확실하다(창세18,17.22절).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에 해당하는 '임 나 마차리 헨 뻬에네카'(im na matsathi hen beeneka)는 직역하면 '만일 제가 당신의 눈속에서 은혜를 찾아냈다면(발견했다면)'이다.
여기서 '입다'(창세6,8; 탈출33,12)에 해당하는 '마차'(matsa)는 '얻다'(창세19,19; 신명22,3), '발견하다'(창세36,24; 민수24,1), '만나다'(민수35,27; 여호2,22)라는 뜻을 지닌 '임'(im)과 함께 쓰여 '발견했다면'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은혜', '은총'에 해당하는 '헨'(hen)은 '불쌍히 여기다'(2사무12,22)라는 뜻의 '하난'(hanan)에서 유래하며 '은총'(탈출33,12; 잠언3,4), '호의'(신명24,1; 탈출39,21)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뻬에네카'(beeneka)에서 '아인'(ain)은 '눈'(창세3,5; 1사무2,30)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서 '당신의 눈들 속에'라는 뜻이다.
'내가 당신의 눈들 속에서 은총을 발견했다면', '내가 당신의 눈들 속에서 나에 대한 사랑을 찾아냈다면,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면'하면서 아브라함은 지금 나그네들에게 쉬어 갈 것을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명령형과 함께 사용되지만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을 할 때 혹은 더 나아가 간청할 때 쓰이는 '제발', '부디'라는 뜻이 있는 부사 '나'(na)가 창세기 18장 3절에는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세 명의 나그네에게 자신의 거처를 그냥 통과하여 지나가지 말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특히 아브라함은 자신을 '종'에 해당하는 '에베드'(ebed)이라고 까지 표현하며 손님들을 최대한 예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손님 접대에 대한 열성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씻으시고'에 해당하는 '라하츠'(rahats)가 '발'에 해당하는 '레겔'(regel)을 목적어로 하는 명령형으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처럼 히브리어 부사 '나'(na; 부디, 제발, 청컨대)가 명령형과 함께 쓰일 때에는 명령보다는 애원의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제발 당신들의 발들을 씻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쉬십시오'에 해당하는 '샤안'(shaan)은 '의지하다'(2사무1,6; 2열왕5,18)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지팡이(에제29,7), 창(2사무1,6) 혹은 팔이나 손(2열왕5,18; 7,2.17)과 같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의지하여 기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동작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재귀 명령형으로 쓰여져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식사하기에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어 왼팔로 몸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식사 관습을 반영하는 표현으로서 식사 대접을 편안히 받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요한13,23).
창세기 18장 4절에서 아브라함이 제공할 발 씻을 물과 나무 그늘에서의 휴식은 더위에 지쳐 있는 여행자가 가장 고마워할 것들이다.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로 번역된 '웨싸아두 립베켐 아하르'(wesaadu libbekem ahar)에서 동사 '싸아드'(saad)는 '지탱하다'(이사9,7), '강하게 하다', '만족시키다'를 뜻하는 말로서 명령형으로 쓰였는데, 보통 '레브'(leb; 마음)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서 마음을 강하게 지탱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여행으로 인한 피곤한 육체를 쉬게 하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쇠잔한 기력을 힘있게 회복하고 재충전하라는 말이다.
한편 창세기 18장 3절과 5절에 '종'에 해당하는 '에베드'(ebed)는 '노동하다', '일하다'라는 뜻의 '아바드'(abad)에서 유래하여 '노예'(창세43,18), '종'(창세9,25) 이란 말로 사용되거나 낮은 신분에 처한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거대한 부자였으며, 한 가문을 대표하는 족장이었다.
그런 그가 신분조차 모르는 나그네들 앞에 자신을 낮추어 '종'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 아무리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크나큰 겸손의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녹] 연중 제16주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특별한 묵상 거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마음의 과녁은 언제나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를 묘사하는 단어는 “듣고 있었다”입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 제자처럼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면 마르타를 묘사하는 단어는 “분주하였다”입니다. ‘사방에서 마음을 끌어당김’을 뜻합니다. 예수님 앞에 머물러 있더라도 주변에 마음을 빼앗기면 분주할 수 있고, 반대로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들을 수 있습니다.
머무름과 분주함을 가르는 것은 태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아이를 돌보고, 일하고 사랑하며,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그 일들 안에서 예수님이라는 과녁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둘째,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행동이 배제된 들음은 허공에 떠다니는 구름을 쫓기 쉽고, 반대로 들음이 없는 행동은 자신을 드러내는 수준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듣는 삶, 마르타와 같이 봉사하는 삶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말씀 안에 머물 줄 알아야 하고, 말씀 안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은 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활동의 진정성을 가지게 해 줍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하셨던 그 공간이 오늘 우리 마음과 삶 안에서 체험되면 좋겠습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복음 (루카10,38-42)
마르타와마리아
(루카10,38-42)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오늘 또한 어제 묵상했듯이 율법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읽어 행위의 신앙으로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여자와 그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찾고다 들음의 신앙을 사는 여자의 이야기인 것, 사람의 규정과 교리의 신앙은 예수님께 다가가 사람의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기도)
그런 이들은 마르타 처럼 말씀에 열중하는 이들을, ‘활동에 열심 하지 않는다‘ 비난하며 싫어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말하면 개신교 신자 같다느니 하니 언제부터 성경이 개신교의 것이 되었는지 원~~
우리 교회 안에서도 ‘교회 다닌다’하면 개신교 신자로,~ ‘기독교 신자’라 해도 개신교로 듣는다. 그 만큼 우리 신자들은 성경의 단어와도 멀어져 있고 말씀도 모르고, 말하는 것도 어색해 한다.
그러니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보다, 3~40분 걸리는 미사를 제사로 드리는 그 종교 행위에 만족해 하고, 좋아해 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聖 예로니모)
그리스도를 모르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그래서 죄인인 내가 그분과 한몸이 되었다는 사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모른다면, 믿지 못한다면, 그래서 내 밖에 그리스도로 시중드는, 섬기는 그 신앙을 不義라 하신 것이다.(마태8,21-23참조)
어느 사제께서는 ‘성경보다 교리가 먼저’라고 여기 굿뉴스에 묵상글을 올려 신자들을 헛갈리게 하시는데, 아무래도 그분은 성경을 모른다는 결론이다. 성경을 올바로 보셨다면 그런 묵상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 신자들이 얼마나 있겠냐는 것이다. 대부분 사제의 글이라면 맹종으로 신자들은 그냥 ‘딸랑 딸랑’이니 말이다.
(신명12,28) 28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
= 말씀을 듣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 좋은,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묵상했듯, 말씀을 하느님의 눈(뜻, 지혜, 계명)으로 보고 듣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관점)으로 보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마르타 신앙이 된다는 것이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신앙인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좋은일, 옳은 일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일 한 가지 뿐인 것, 예수님께서 그 한가지 일을 하셨을 뿐이라 하셨쟌은가(요한7,21)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하느님의 일은, 그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길(십자가)을 구원(생명)의 진리로 믿는 그 한 가지 뿐인 것이다.(요한6,29참조)
그러나 천주교나 개신교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기 위한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본당(창4동)의 경우 많은 단체, 심지어 취미 단체도 많지만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단체가 없다.(청년 성경공부 외에는) 참으로 답답해서 주임사제께~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단체를 부탁드렸더니 사정상, 여건상 힘들다 하신다.(코로나19발생전에~) 하느님의 교회에서 그분의 말씀 공부가 다른 단체들(세상적)에게 밀려야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말라1,10) 10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너희가 내 제단에 헛되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였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너희 손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으리라.
= 지금은 제사 드릴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감사의 잔치(미사-에우까리스티아-①용서하다 ② 감사하다 ③ 이해하다.)를 드릴 때인 것이다.(히브서10장참조)
그 중에~(히브10,18)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십자가)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 ! 오늘 같은 날에 주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고, 이웃과 매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복음 (루카10,38-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
루카 복음 10장 38~42절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앞의 10장 25~37절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루카 복음 10장 27절에서 언급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보기를 역순으로 하나씩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의 교훈은 '이웃 사랑의 모델'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느님 사랑의 모델'은 '마리아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대의 랍비의 문헌들은 여자들을 탐욕스럽고 호기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며 수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여, 여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랍비들은 '불신자나 야만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예수님 당대의 여자들은 그렇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과 이야기하고'(요한4,27), '여자들을 가르치고'(루카10,39), 그리고 '병든 여자를 치유하기도'(루카13,10; 마르1,31)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버림받고 소외받은 대표적 계층인 여자들을 수용하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남녀 빈부에 관계없이 오직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루카19,10).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타라는 여자가'에 해당하는 '귀네 데 티스 오노마티 마르타'(gyne de tis onomati martha; a woman named martha)에서 '여주인'이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여성형 고유명사 외에 '한 여자'에 해당하는 '티스'(tis; certain)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여기서 '여자'로 번역된 '귀네'(gyne; a woman)는 처녀든, 기혼이든, 그리고 과부든 모든 연령 계층의 여자를 일컬들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루카는 '한 여자'라는 기록을 첨가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이 바로 '여자'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0장 39절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앉아'에 해당하는 '파라카테스테이사'(parakathestheisa; sat)는 '옆에 놓다'를 뜻하는 '파라카티죠'(parakathizo)의 수동태 분사이다.
수동태가 여기서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발치에 자리잡고 앉은 후에 말씀을 들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은 당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즉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당대의 통념을 따를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이 랍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대받던 여인들의 지위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예수님에 의해 복음인 하느님의 말씀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제 민족 등의 모든 구분과 한계를 뛰어넘어 만인에게 전달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되는 '에쿠엔'(ekuen; and heard; listening)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kuo)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마리아가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억지로가 아니고, 매우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루카 복음 10장 40절에서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나온다.
여기서 '분주하였다'에 해당하는 '페리에스파토'(periespato; was distracted; was cumbered)의 원형 '페리스파오'(perispao)는 '둘레', '주변'을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eri)와 '당기다'를 뜻하는 동사 '스파오'(spao)의 합성어로서,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마르타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고, 분주하고 들떠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을 음식 준비를 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10장 41절과 42절의 말씀을 유추해 볼 때, 마르타는 음식 준비도 하면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싶은 열망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즉 마르타의 마음은 현재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신경을 뺴앗겼던 것이다.
루카복음 10장 40절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의 말 속에는 음식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혼자서 편안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동생 마리아에 대해 얄미운 심정이 들어 있다.
마르타의 이러한 요청의 뉘앙스는 몹시 바쁜 와중에 있는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과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지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연민을 품은 애정을 가지고(반복된 호칭의 의미), 마르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여기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에서 '염려하고'로 번역된 '메림나스' (merimnas; you are worried; you are careful)는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마르타는 음식을 무엇을 준비할까, 좌석배치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지금 마리아는 왜 나를 돕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몹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걱정하는구나'로 번역된 '토뤼바제'(thorybaze; upset; troubled)도 '어수선하다', '어지럽다'를 뜻하는 '토뤼바조마이'(thorybazomai)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서, 음식 준비로 인해 분주하고 어수선한 마르타의 심적 상태를 보여 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는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택한, 말씀 경청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당시 마르타가 했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으므로, 그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주도록 일러달라는 마르타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타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다.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선택하였다'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 has chosen)은 항상 중간태로만 사용되는 '선택하다'는 뜻의 '에클레고마이' (eklegomai)의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혹은 '그녀 자신을 선택했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에는 마리아가 '좋은 몫'('아가텐 메리다'; 'agathen merida'; what is better; good part)을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된 '우크 아파이레테세타이' (uk aphairethesetai; will not be taken away)는 부정어 '우크'(uk; not)와 '제거하다', '가져가 버리다'의 뜻을 지닌 '아파이레오'(aphaireo)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이 나란히 쓰였다.
이것은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타의 항의조가 담긴 요청이나 예수님의 권고로 인해 빼앗기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좋은 몫을 선택하여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유익을, 외부의 어떤 것이 박탈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타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025년 07월 20일 일요일
[연중 제16주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루카 10,40)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외롭고(“혼자”[10,40]) 아무도 자신을 신경 써 주지 않는다고(“내버려 두는데도”[10,40]) 느낍니다.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이러한 느낌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마르타도 다른 사람 때문에 어렵다고 여기어 그를 변화시키려고 합니다(“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10,40].).
이제 주님께서 마르타를 도와주십니다.
상대에 대한 친밀감의 표시인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면서 그의 영혼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마르타가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10,41).
마르타는 예수님을 모셔 들였지만 예수님은 잊은 채 일을 중심에 두고 일에 끌려다니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이런 상태에 빠지는지요!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해 주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10,42).
어차피 사람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일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때 정말 필요한 한 가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이 무엇인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섬기려 모셨고 예수님께서도 마르타를 돌보고 계십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연중 제16주일]
루가복음 10장의 결론이다.
복음(루카10,37-42)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강도(强盜)만나 초주검이 된 유대사람이 마리아인(예수님)의 자비를 받아 살아났듯이, 너도 가서 그렇게 그의 자비(慈悲)를 받아라.’ 하신 것이다. 곧 ‘율법교사야 너의 율법, 그 결함 있는 옛 계약의 자기 의(義)를 부인(否認)하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으로 거저 주시는 의로움, 그 자비(慈悲)를 받아 살아나라.’ 하신 것까지 지난주에 공부했다.
그리고 오늘 복음(福音)인데,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열심히 지키느라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이 주시는 하늘의 자비의 의(義), 생명을 잃어 초주검이 된 또 다른 사람을 말씀하려 하신다.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 발치에 앉아, 곧 낮은 자세로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40ㄱ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 율법(律法)을 지키느라 분주하고 바쁘다.
40ㄴ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에피스테미-위에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그 율법(律法)에 열심인 신앙(信仰)은 자신을 스스로 세우려 하기에 염려와 걱정만 남는다. 위로 세워지는 것은 하늘의 영(靈), 말씀이신 그리스도로만 가능하다.(요한3,3) 행위의 열심인 신앙은 구원의 확신, 믿음이 생기지 않기에 곧 믿음이 없기에 행위(行爲)에 더 열심을 부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보고, 말씀 안에 숨겨진 뜻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하며 깨달음을 얻을 여력(餘力)이, 시간이 없다.
(에페5,16-17)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꼭 필요한 ‘한 가지’, 먼저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죄인(罪人)들을 목숨 바쳐 살려내시는 그 섬김이다. 곧 창조 이전 약속하신(에페1,4)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이루시러 오신 것이다.
(히브9,15)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율법)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 마르타는, 결함 있는 첫째 계약 그 율법의 실천으로, 두 번째 계약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이 주시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과 믿음을 강도에게 빼앗겨 그의 영(靈)이 초주검이 된 상태이다. *강도(强盜)- 옛 계약의 율법 자들이다.(요한10,8 참조) 그래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하신 것이다.(마태6,33)
(에페3,6)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내 밖에 예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율법신앙의 나를 버리는, 부인(否認)하는 그 자신의 머리(생각)를 자르고, 그리스도를 내 머리로 그분의 지체(肢體)가 되어 한 몸이 되는 것, 그 한 가지 뿐이다.
그런데 교회(敎會)는, 사제(司祭)들은 마르타를 정당화 시키려 억제, 애를 쓴다.(오늘 교중미사 강론(講論)도..) 왜? 마르타의 열심을 정당화(正當化) 시키지 않으면 교회(敎會)의 많은 단체(團體)들이 마비(痲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과 관계되지 않은 모든 단체는 마비(痲痹)되어야 한다.’ 왜? 교회 밖, 곧 세상(世上) 사람의 일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마치 그것이 하느님의 일, 봉사(奉仕)인냥 둔갑(遁甲)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惡)의 짓이다.(마르8,33)
마리아의 좋은 몫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진리로 믿기 위해(요한6,29) 성경(聖經)을 보고, 생각하고, 깨닫고, 기억하는, 되새기는 그 시간을, 열정, 힘을 뺏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합당하지 않는 단체들이 없어지면, 곧 내 가치, 의(義)를 쌓기 위한 그 불법의 헛된 활동이 없어지고 나면,(마태7,21-23 마르7,7) 말씀을 참 생명(生命)의 양식(糧食)으로 보고 먹기 위한 깨달음의 묵상(黙想), 기도(祈禱)시간이 살아날 것이다.
사제(司祭, 신부님)들 또한 마찬가지다. 같은 말씀일지라도 강론(講論)은 매번 달라야 한다. 곧 더 깊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 전(傳)해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을 죄인들의 생명의 양식, 구원의 진리로 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구원의 힘, 반석, 산성, 방패, 피난처로 전(傳)해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2코린5,17)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늘의 생명, 의, 거룩, 자유, 평화, 쉼, 안식이다.
(갈라5,1)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제사와 윤리의 율법, 옛 계약)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야고1,22.25)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피의 새 계약)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히브10,19-20)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새 계약) 덕분에 성소(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 말씀 안에 십자가(十字架)의 복음(福音), 그 피의 새 계약(契約)을 살아있는 새롭고도 완전한 자유의 법,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믿고, 의탁하여 살며 전(傳)하는 것만이 실천(實踐)이며 실행(實行)이다. 그 ‘살아있는 완전한 자유의 법,’ 그 새 계약을 주지 못하는 모든 활동, 행위는 말씀을 실천,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不法)이다.(마태7,21-23)
(로마8,1-2) 1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 성령(聖靈)의 법(法), 또한 피의 새 계약(契約)이다.(히브10,14-18 참조)
☨영원한 보호자로 탄식하며 기도로 간구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신 진리의 천주 성령님!
저희들 마음 안에 충만 하소서. 좋은 몫을 선택하여 믿음, 생명으로 이끄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