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4월 13일 일요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루카22,14―23,56)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오늘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제1독서<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화답송>시편22,8-9.17-18ㄱ.19-20.23-24(◎2ㄱ) ◎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 보는 사람마다 저를 비웃어 대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내젓나이다. “주님께 의탁했으니 구하시겠지. 그분 마음에 드니 구해 내시겠지.” ◎
○ 개들이 저를 에워싸고 악당의 무리가 둘러싸, 제 손발을 묶었나이다. 제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나이다. ◎
○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눠 가지고, 제 속옷 놓고는 제비를 뽑나이다. 주님,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저의 힘이신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
○ 저는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야곱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께 영광 드려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
제2독서<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필리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복음<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루카22,14―23,56)
○ 해설자 +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
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17 ○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19 ○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0 ○ 예수님께서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22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23 ○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24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27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28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30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32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33 ○ 베드로가 말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34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물으셨다. +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6 ○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38 ○ 사도들이 말하였다. ▣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것이면 넉넉하다.”
39 ○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40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41 ○ 예수님께서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42 +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43 ○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44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45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4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47 ○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4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49 ○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말하였다. ▣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50 ○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51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만해 두어라.” ○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52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
54 ○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갔다.
55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57 ○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58 ○ 얼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말하였다. ●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 베드로가 말하였다. ●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59 ○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사람이 주장하였다. ●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소.”
60 ○ 베드로는 말하였다. ●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61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63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매질하며 조롱하였다.
64 또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물었다. ▣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65 ○ 그들은 이 밖에도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퍼부었다.
66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단,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여 예수님을 최고 의회로 끌고 가서 말하였다.
67 ▣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하시오.”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고,
68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69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을’것이다.”
70 ○ 그러자 모두 물었다. ▣ “그렇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
71 ○ 그들이 말하였다. ▣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합니까?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들었으니 말입니다.”
23,1 ○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3 ○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4 ○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5 ○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6 ○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7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8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말하였다.
14 ●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17 ○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18 ◎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19 ○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21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외쳤다. ◎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2 ○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23 ○ 그러자 그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29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32 ○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빈정거렸다. ▣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36 ○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37 ▣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그분을 모독하였다.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40 ○ 그러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44 ○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47 ○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48 ○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50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51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52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53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다.
54 그날은 준비일이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55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56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 (이사50,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 (7)
이사야서 50장 6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義)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이사야서 52장 13절~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 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며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에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의 원형 '나카'(nakah)는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실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 이 예언을 성취하셨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조의를 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 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 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 (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는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로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침뱉음을 뜻하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앞의 이사야서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
이제 이사야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
먼저 이사야서 50장 7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에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 '아자르'(azar)는 이사야서 50장 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구절은 인과(因果)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 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본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 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는 '두다','되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숨'(sum)의 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는 '아주 단단한 물건', '단단한 돌','부싯돌','바위'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을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의 중의성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는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 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 (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생명의 말씀
‘바보’ 같은 당신 모습
동유럽 국가 간 전쟁, 정치인들의 ‘내로남불’,
이성을 향한 혐오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 사회현상은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긴장과 갈등,
역지사지의 부재, 권리 주장과 의무 준수 사이의 불균형에 젖어있음을 말해줍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나의 아픔만 바라보는 것은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하거나 배려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지도 성찰해 봅니다.
그러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의 성경 말씀은 어떤 길을 안내합니까?
제1독서(이사 50,4-7)는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6)라며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바보’ 같은 모습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에 관한 예언입니다.
제2독서(필리 2,6-11)에 따르면,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라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무한 경쟁 시대에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도록 강요하는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님의 이런 모습은 그저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성경 구절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에 관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수난기(루카 22,14-23,56) 장면은
오늘 미사 초반에 들었던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루카 19,28-40)과 대조적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찬미하며 당장이라도 왕으로 모실 기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을 비난하며 모른 체할 것입니다.
급기야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바보’처럼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예루살렘 입성 때 주님을 향해 환호했던 군중과 닮아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이득과 직결될 때는 웃는 얼굴을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상대방을 모른 체하거나 비난하며
‘마녀사냥’까지 서슴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예루살렘 군중과 닮아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고통과 수난을 겸손과 순종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
2022년에도 우리의 죄–즉, 이기심, 공감 능력 부족, 무관심의 죄-를 대신하여
‘바보’ 같은 모습으로 온몸을 짓누르는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십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통과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바보’ 같은 모습의 주님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김상우바오로 신부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그 사람, 그는 누구일까?
(루카19,28-38)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ㅇ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완성하실, 당신의 죽음의 길을 앞장서서 가신 것이다.
29 올리브 산이라고 불리는 곳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30 말씀하셨다.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31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는 거요?’ 하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32 분부를 받은 이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33 그래서 그들이 어린 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34 그들은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그리고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다. 36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나귀(짐승)와 인간(겉옷, 길)과 하나 된 모습이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사랑인 신(神)의 죽음이다.
37ㄱ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 올리브산은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뜻한다. 곧 하늘에서 땅으로 죄인들을 찾아내려 오심을 뜻하는 신(神 예수)의 죽음이다.(루카1,67-79 참조)
제2독서(필리2,6-8)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37ㄴ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38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 기적(奇蹟) 때문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주님(주인- 왕)으로 평화(平和)요 영광(榮光)이라 기뻐 환호(歡呼)한다. 보이는 기적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숨은 뜻을 깨닫고 하는 환호일까?
본문의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자.~ 삼십대의 장성한 남자가 어린 나귀를 타고 지나가시는 모습이다. 곧 어린 나귀이기에 예수님의 발이 거의 땅에 닿아 어정쩡하게 걷듯이 가는 그 모습이 정말 임금(왕)의 모습일까? 맞다. 그 모습이 기적(奇蹟) 안에 숨겨진 왕(구원)의 모습이다.
(창세22,2-3) 2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 모리야 땅- 하느님의 뜻인 성전(聖殿)이 있는 곳이다.(2역대 3,1 참조) 이사악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모형(模型)이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번제물-속제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오늘 복음의 요점(要點)은 말씀, 기적 안에 숨은 하는미의 뜻을 깨달아야 예수님을 주님, 왕,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뜻(소원)을 위한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따른다면 절대 기뻐할 수도, 하느님께 감사할 수도, 영광도 드릴 수 없다.
그 말은 하늘의 용서, 평화, 안식, 생명, 곧 참 빛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어둠이 정말 싫다. 제일 무섭다. 그래서 늘 빛을 갈망(渴望)한다. 그래서 늘 빛이신 말씀 안에 머무른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黙想)하면서 어린 나귀를 준비했고, “주님께서 필요 하시답니다.”라는 말에 두말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준 그 사람, 그는 누구일까? 생각해봤다.
본 19장 시작 부분에 ‘예수님의 자비(慈悲), 사랑으로 ’세리(稅吏)의 죄(罪)를 용서받은 자케오‘일까? 아니면 11절 이하 하나(미나-사랑)가 열(미나-십계명)의 실체(實體)였음을 깨달은 첫째 종(從)일까? 둘다 맞겠지만 말씀 안에 머무르며 구원을 준비하는 우리(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얻는 자유, 쉼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애뜻(소원)을 위한 기도(祈禱)와 온갖 종교(宗敎)행위에 매여있다면, 또 기적(奇蹟)을 쫓는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신앙(信仰)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라는 말씀에 나는 순종(順從)하고 있나? (되돌아본다)
(마르13,22)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1요한2,16-17)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군중(群衆)은 진실(眞實)을 갈망(渴望)한 적이 없다. 구미(口味)에 맞지 않으면 증거(證據)를 외면해 버리고, 자신들을 부추키면 오류(誤謬)라도 신(神)처럼 받드는 것이 군중이다. 그들에게 환상(幻想)을 주면 누구든 지배자가 될 수 잇고, 누구든 이들의 환상을 깨버리려 들면 희생(犧牲)의 제물이 된다.
군중은 충동(衝動), 변덕(變德), 과민함을 가지고 있고, 무계획적이고, 자신도 모르는 욕구(慾求)에 움직이며, 누군가의 맷세지에 의해 쉽게 조종(操縱)받기 쉽다.>
00사제께서 ‘군중의 심리’라는 글이라며 올려 주셨다. 사도의 말이 생각난다.
(2티모4,3)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 말씀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세상 힘의 논리(論理)에 휩쓸려 나의 구원(救援)이 흔들리게 됨을 깨닫게 한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더러운 짐승(나귀)일 뿐인 우리(나)와 하나가 되시게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참 빛, 사랑을 거짓 가르침에 잃지않고 지킬 수 있도록 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소서, 말씀이 빛, 사랑으로 자라나 굳세어지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5년 04월 13일 일요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오늘 수난기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며 동정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느끼며 감사드립시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루카 23,4).
빌라도가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인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자 자신을 내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늘 그러하셨듯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당신보다 우리를 더 생각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23,28).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죄와 죽음을 이기는 승리의 사건입니다.
가장 짙은 어둠의 순간을 은총으로 비추며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건너게 하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희망을 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승리를 믿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오늘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도록, 주님께서 주신 생명에 감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겸손과 희생 그리고 구원의 승리에 감사드리며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