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5,1-11)

2025. 2. 8. 오후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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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9일 일요일

[연중 제5주일]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5,1-11)

 


1독서<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6,1-2.3-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화답송>시편138,12.2ㄱㄷ과 3.4-5.7-8(1) 주님,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주님, 세상 임금들이 당신 말씀 들을 때, 저들이 모두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주님 영광 크시오니, 주님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2독서<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연중 제5주일 제1독서 (이사6,1-2ㄱ.3-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1~2)

 

앞선 이사야서 1장 2절~5장 30절은 주님을 배반한 남부 유다를 향하여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란 사실과 더불어 주님의 날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가 주님의 오심과 성전 숯불의 환시를 통하여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서에는 그 예언서를 쓴 예언자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술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예언서의 초두에 이런 사실이 소개되는데 (예레1,1~19; 에1,1~3.15), 이에 반해 이사야 예언서에는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이며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사안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 미뤄졌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이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느님의 종이며, 그의 메시지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로도 볼 수 있다.

 

먼저 이사야서 6장 1~3절은 이사야에게 예언자로서 소명을 주신 주님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가 성전 위에 높이 들리고 사람들이 에워싼 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시점을 밝히는 본문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 일은 남부 유다의 제10대 임금이었던 우찌야가 죽던 해에 발생하였다. 그 해는 B.C.739년으로 추정된다.

우찌야 즉 '우찌야후'(uzziyahu)는 '능력'(1역대16,11),'힘'(탈출15,2)이란 의미의 명사 '오즈'(oz)와 '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 '주님의 능력'이란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그는 '아자르야'(2열왕15,1)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돕다'(여호1,14)란 뜻의 동사 '아자르'(azar)와 '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서 '주님께서 도우셨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부친 아마츠야에 이어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남부 유다의 왕위에 올라 죽는 날까지 무려 52년 동안 남부 유다 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통치 후기에 문둥병이 들어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삶을 살다가 병으로 죽게 된다.

 

그의 통치 전반과 중반은 주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필리스티아와 암몬 등을 정복하고, 필리스티아 땅에 성(城)을 건축하고 암몬 왕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나아가 이집트의 변방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는 등 그 왕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가 강성해지면서 교만에 빠지게 되어 사제 외에는 들어가지 못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 하였다.

 

그것이 죄라고 말리는 아자르야 사제의 손을 뿌리치면서까지 분향하기를 고집하는 순간, 주님께서 그를 치셔서 그 이마에 문둥병(나병)이 생기게 하셨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왕궁이 아닌 별궁으로 내려앉고, 나아가 성전 출입을 제한 당하였다.

그런 비참한 말년을 쓸쓸히 보내다가 그의 나이 67세에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2열왕15,1~7; 2역대26,1~23).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받은 소명(召命)은 그가 예언자 직분을 시작하면서 받은 소명이 아니라 예언자 직분을 수행하던 중간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소명임이 분명하다.

즉 본장에 나오는 소명과 별개로 이사야는 과거에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소명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굳이 이를 따로 소개하지 않는 것은 본장의 내용만으로도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예언자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1인칭 단수를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 주님의 환시를 보았다는 증거를 많이 한다.

아합과 여호사팟 임금 당시의 예언자 미카야가 그랬고(1열왕22,17.19-23), 즈카르야 예언자(즈카1,8), 에제키엘 예언자, 예레미야 예언자 등이 그러했다.

이와 같은 1인칭 단수의 사용은 그들 각자가 보았다고 하는 그 환시의 신빙성의 무게를 더해준다. 제3자의 경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경험을 직접 기술한 것이기 떄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나는 보았는데'에 해당하는 '와에르에'(waereh)는 계속적 용법으로 사용된 '와우'(wau)에 동사 '라아'(rah)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것은 우찌야 임금이 죽은 직후에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사실 및 그 때에 일회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사야서 1장 1절에는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것이 '하자'(haza) 동사를 통해 표현된 반면에, 후자는 실제적으로 실체를 매우 확실하고 분명하게 바라봄으로써 실제적으로 이를 체험하여 아는 것과 관련된 표현인 것이다.

즉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본장에서 경험한 주 하느님의 천상의 모습과 그에 바탕을 둔 그 자신의 죄의 용서에 관한 환시가 그에게 있어 현실적인 일처럼 분명히 나타났음을 강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이사야 예언자가 본 환시는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 하느님이었다. 이같은 장면은 아합 임금 당시 예언자로 활약한 미카야의 증언에도 나오며 (1열왕22,17.19~23), 욥기에서도 유사한 묘사가 나온다(욥기1,6~12).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물리적인 육체가 없으신 순수한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에게 계시를 주시며, 이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시각적 형상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한편, 본문에서 주어로 제시되는 '주님'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주 하느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인간 세상 뿐 아니라 온 우주를 권능으로 주관하시는 주님의 면모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 바로 '아도나이'인 것이다.

그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그 어떠한 세력도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이 세상을 통치하심을 나타낸다.

 

특히 '앉아 계시는'에 해당하는 '요셰브'(yosheb)는 오래 동안 머물러 있거나 거주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야샤브'(yashab)의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주님의 왕적 통치가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통치는 인생사의 영고성쇠와 관계없이 계속되어 왔고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영원한 임금 되심과 항구적인 통치의 면모는 과거에 위대한 임금으로 통치하다가 범죄로 징계를 당해 비참한 신세에 떨어지고, 결국 죽어 무덤에 돌아간 인간 임금 우찌야의 면모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의 옷자락'에 해당하는 '슐라이우'(shulayu)의 원형 '슐'(shul)은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좌우 손목 부분의 옷자락을 비롯하여 발을 덮어 가리는 옷자락까지 모든 부문의 옷자락이 길게 늘어 뜨러져 성전을 가득 덮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의 위엄과 권능이 온 세상을 덮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님의 권능 앞에 모든 피조물은 굴복하고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성전'에 해당하는 '하헤칼'(hahekal)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지금 이사야가 보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이며 천상의 상황이기 떄문에 이 문맥에서는 천상에 있는 주님의 궁전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성전과 관련지어 이사야가 성전에 있었으며, 성전에 가득한 주님의 옷자락은 분향 제단으로부터 올라간 연기가 성소 안을 가득 채운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설한다.

그러나 그가 현재 성전에 있든 그렇지 않든, 그가 환시 중에 목도한 것은 성전 그 자체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영광 중에 거하시는 천상의 거소로 보는 것이 문맥상 보다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2)

 

이사야서 6장 2절과 3절은 하늘의 사자들이 주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사랍들'에 해당하는 '세라핌'(seraphim)은 '불타다'(예레51,3)란 뜻의 동사 '사라프'(saraph)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 '불탐'이란 의미를 지닌 '사라프'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세라핌'은 문자적으로 '불타는 것들'이란 뜻을 지닌다.

천사들에 대하여 이러한 명칭이 주어진 것은 부정한 것을 불로 태워 없애는 것처럼 그들이 거룩하고 순결한 존재이며, 또한 불꽃처럼 화려하고 접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사랑을 상징한다.

 

 

 

 

 

연중 제5주일 제2독서 (1코린15,1-11)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2)

 

사도 바오로는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적 확실성을 다룬다.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며, 신도들의 부활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1절에서 '내가 이미 전한 복음' 이, 3-4절에서 '돌아가심(죽으심), 묻히심(장사지낸 바 되심), 부활하심(되살아나심)' 으로 요약되어 나타나고, 이어지는 5-8절에서는 그 가운데 특히 부활에 대한 무수한 증인이 있음을 말함으로써, 본 단락에서 다룰 복음의 핵심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글 성경에는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2) 라는 어구가 문장의 말미에 나타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이에 해당하는 '디 후 카이 소제스테'(di hu kai sozeste)가 문장의 서두에 등장한다. 이것은 본절이 '내가 전한 이 복음 말씀' (2) 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디 후'(di hu ; by this gospel)는, 같은 절의 '티니 로고 유엥켈리사멘 휘민'(tini logo euenggelisamen hymin ; the word I preched to you;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 말씀)과 관련된 것으로, 바로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전한 복음이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특히 여기서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로 번역된 '소제스테'(sozeste)는 '구원하다' 라는 뜻을 지닌 '소조'(sozo)의 현재형으로, 구원이 지금 현재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코린토 신도들이 지금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1코린1,18 ; 로마1,16) 구원의 완성은 비록 미래에 온전히 이루어질지라도,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 나시어"(3-4)

 

여기서 '먼저'라고 번역된 '엔 프로토이스'(en protois)는 시간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의 우선성을 뜻하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바오로의 선교 여정에서 시간적인 순서로 코린토 교회가 바오로의 복음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내용적으로 가장 우선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전한 복음의 내용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3-4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셨다' 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바오로는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주체를 '예수'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을까?  그것은 역사적인 예수와 구원자 그리스도가 동일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 출신의 일개 목수의 아들로서 역사적으로 실재한 한 개인의 이름이다.

 

그러나 복음서와 바오로는 초지일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란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역사상 예수라는 이름으로 실재하였던 바로 그분이 다름아닌 메시아 그리스도, 곧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사도들의 선포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사도2,36)는 선포가 아닌가!

복음 선포의 핵심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데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가 믿음의 그리스도요, 생명의 주님이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때문에 돌아가시고"

 

바오로는 예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신 대속적 죽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예수님 자신의 결정이나 돌발적 사고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성경 말씀대로' 표현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성경'에 해당하는 '그라파스'(graphas)는 복수형으로 '성경을'로 번역될 수 있다. 즉 예수의 죽으심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예언된 사건이었다. 실제로 구원사의 핵심인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은 구약 성경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세22장 ;탈출12장 ;시편22장 ;이사야53장 ;다니엘9,26 등등)

 

또한 여기서 '죽으시고' 로 번역된 '아페다넨'(apethanen ; died)역시 '죽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일회적인 역사적인 사건이었음을 가리킨다.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4)

 

바오로는 3절과 4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밝히고 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다시 살아나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핵심 단어인 '묻히셨으며' 와 '되살아나시어' 란 두동사는 모두 3인칭 단수 수동태로 쓰였으나, 그 시제가 다르다.

 

먼저 '묻히셨으며' 에 해당하는 '에타페'(etaphe ; he was buried)는 부정(不定 ;indefinite)과거형이다. 여기서 이 시제는 육화(肉化 ; Incarnation ;강생)하심으로 시작된 자기 비하(卑下)의 단계가 드디어 묻히심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최고조의 부정 과거 (Culminative Indefinite Past)이다.

 

반면에 '되살아나시어' 에 해당하는 '에게게르타이'(egegertai)는 완료형이다. 예수의 부활이 과거 사실(he rose again ; he was raised)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와 다르게 완료형을 사용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적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효력이 계속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살아계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 쓰였다. 우선, 예수의 부활을 말하는 후자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친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자는 예수께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등에 의해 장사되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마태27,57-61)

그러나 이것 역시 사도 바오로는, 구속 계획을 세우신 성부 하느님께 순종하며 장사지내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수동태를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단락에서 바오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단지 죽으시고 묻히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챤(신도)간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인고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한 신도 역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장차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흗날에'(te hemera te trite ; 테 헤메라 테 트리테 ; on the third day)라고 바오로가 굳이 표현한 이유가 뭘까? 바오로가 죽음에서 부활까지 걸린 기간을 명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 가운데 실재로 일어난 틀림없는 사실이란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안식일 전날 금요일에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사흘이 지난,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 즉 주일(主日 ; The Lord Day)에 부활하심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초대 교회 당시, 주일에 드리는 공식 예배와 성찬의 정당성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부활 사건은 그의 죽음심과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대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시편 16장 10절이나 이사야 54장 7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그의 죽으심의 사건과 동일하게, 코린토 교인들로 하여금 신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란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 다음 15장 5절부터 8절까지, 바오로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적 확실성을 논증하는 가운데,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수많은 증인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케파 베드로와 열 두 사도, 그 다음에는 오백명이 넘는 형제들, 그 다음에는 야고보,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났다고 전한다.

 

 

여기서 7절 '모든 사도'란 표현은, 열 두 사도에 나오는 장 야고보(대 야고보; 축일은 7월 25일)와 소 야고보(차 야고보 ;축일은 5월 3일)와 같은 사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목격하고 복음 선포자가 된 사람들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바오로를 돕던 협력자들까지도 때로는 사도들로 언급되어, 초대 교회 당시 사도라는 용어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last of all)라는 표현은 '가장 하찮은 존재'라는 겸손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도들에 비하면 매우 보잘것 없다는 의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칠삭둥이 같은 나'(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로 번역된 '엑트로마타'(ektromati)는 '~로부터 밖으로' 란 뜻이 있는 전치사 '에크'(ek)와 '상하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는 동사 '티트로스코'(titrosk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산되어 태어난 '사산아'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조산아'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것은 바오로의 외모가 보잘것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이거나, 만삭되지 못하여 갑자기 태어난 아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바오로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이것이 갑작스런 회심을 가리킨다면, 이는 그가 사도가 되기 전, 조직적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죄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칠삭둥이 같은 나'라는 뜻의 '엑트로마티' 앞에 정관사 '토'(to)가 붙은 것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다.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엑트로마티'는 주로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민수12,12 ;욥기3,16)

따라서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본문은 바오로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여, 예수의 지상 선교의 시기인 공생활 동안 줄곧 함께 한 열두 사도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후에 사도가 된 사실을 피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의 열 두 사도가 만삭이 되어서 난 아이와 같다고 한다면, 자신은 달 수를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오로가 정관사 '토'를 붙여서 자신을 '그 칠삭둥이 같은 나'라고  한 말 뒤에는, 그가 사도들 가운데 제일 뒤에 처져서 출발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도들 중에 유독 그만의 특별히 구별되는 방법으로 부름받음 것을 드러낸다.

 




 


[녹] 연중 제5주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되어 특별한 소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묘사한 이사야는 ‘숯’의 정화로 새로워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입술을 지니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처지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당당히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그분께 죄 많은 자신을 떠나 주십사 청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선택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사회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사람들, 별 볼 일 없던 사람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드러날 놀라운 업적이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오늘 제2독서에서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사제가 되기에 한없이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저의 사제 직무를 통하여 이루신 그분의 놀라우신 업적이

마치 제게서 비롯된 것인 양 착각했던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모든 구성원에게도 자주 찾아올 수 있는 유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의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5주일(서울주보생명의 말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구요비 욥 주교 |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우리 한국인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는 유학이며 유학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성인군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그 여정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요약됩니다.

공자님은 “하루 동안이라도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다시 수신(修身)이 강조되는데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내면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양심(良心)을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양지(良知)를 얻는 길을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투철하게 밝힘)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인간관은 어떠합니까?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체험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이 하느님의 성성(聖性) 앞에 인간은 자신이 초라한 죄인(罪人)임을 뼈저리게 통감합니다!

지극히 선(善)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함(聖性)을 인간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성화(聖化)를 위하여 인간의 협력, 곧 인간이 당신의 일꾼으로 파견되기를 바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인 은총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성화(聖化)를 이룩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10)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루카 5,5)라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봅시다!

 

철학자 루이 라벨(Louis Lavelle)은 “성인들의 거처는 바로 이 세상의 내면성(intimité)”이라고 통찰합니다. 이 내면성은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과 존재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과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질 자체를 직접 대면하고 대화하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이 내면(intimité) 안에 머무름은 인간의 내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침잠할 때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고요와 침묵 가운데서 우리의 내면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며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연중 제5주일 복음 (루카5,1-11)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스승님'에 해당하는 '에피스타타'(epistata; master)는 신약 성경에서 루카 복음사가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이다(루카8,24.45; 9,33.49; 17,13).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적으로 '선생'(teacher)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나 율법 교사에 대한 존칭어인 '랍비'(rabbi)라는 단어보다는 '에피스타타'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에피스타타'는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17장 13절의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제자들의 입으로 고백된 경우처럼, 이 용어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권위를 느껴서 예수님을 '에피스타타'로 불렀다.

그러나 이 호칭은 기적의 체험 후에는 신앙 고백적 호칭인 '퀴리에'(kyrie) 즉 '주님'(Lord)으로 바뀐다(루카5,8).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데'(de)는 여기서 'but' 혹은 'nevertheless'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전문 어부로서 고기잡이와 관련된 갈릴래아 호수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전날 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또 날이 밝은 아침(오전)에 고기가 없는 깊은 데로 저어 가서 그물을 내린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베드로에게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폭적인 순종의 의지는 '제가 ~내리겠습니다'로 번역된 '칼라소'(chalaso;

I will let down)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단어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자신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데, 마지 못해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에피~토 레마티 수'(epi ~ to remati su; at your word; because you say so)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스승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5장 4절의 명령 뿐만 아니라 루카 복음 5장 3절에 기록된 '가르침의 말씀'까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진실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데로 저어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그 명령이 비상식적으로 들렸으나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in spite of)의 믿음과 그 믿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기에 능동적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믿음은 평소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의 성품과 덕성을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20250209일 일요일

[연중 제5주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은 부르심과 파견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이가 사명을 받아 파견되기까지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거룩함 앞에 선 인간은 죄 많은 제 모습을 깨치기 마련입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사야는 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직접 뵙고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더러움을 깨닫습니다.

예언자의 소명에서 핵심 도구인 입이 더럽다는 것은 근본적인 장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타는 숯으로 정화된 다음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전에 먼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하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노련한 어부 시몬은 밤샘 고기잡이에서 허탕을 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그물이 터져 나갈 정도로 잡은 물고기 앞에서, 아니 예수님의 신적 권위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죄인인 자기에게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0)라는 말씀으로 그를 정화하시어 새로운 임무로 부르시고, 시몬과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5,11) 예수님을 따릅니다.

교회를 박해하였기에 칠삭둥이”(1코린 15,8)로 자처하는 바오로는 열두 사도와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은총으로 정화되어 지금의 내가”(15,10)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도 부르심부터 파견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렇게 우리의 합당함이 아니라 부당함을 정화하여 응답을 준비시켜 주는 은총에 자신을 내맡깁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2년 2월 6일 [연중 제5주일]

 

흙의 존재를 인격으로 대해 주신 하느님!

 

복음(루카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베드로와 모든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뵙고도 자신과 자신의 것을 버리지 못했다. 사람을 낚는 일도 하지 못했다. 성령이 오신 후에야 자신을 버리게 된다. 성령께서 죄에 대한 자각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새 계약을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자신이 낚인 사람이 되었고 그때서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사람을 낚으시는 걸까? 그리스도와 하나, 한 몸이 되게, 곧 그분의 모습, 형상(形狀)으로 회복시켜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

 

(에페1,10)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갈라4,19) 19 나의 자녀 여러분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

= 그러면, 낚인 사람,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인간이 하느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모습, 그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해 내십니다.(이사46,4 에페1,4 히브4,3 등)

그러나 이것만은 꼭 알아두고 갑시다. 인간은 피조물 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격체입니다.(창세1,27. 2,7) 하느님은 우리를 흙(피조물)으로 만드셨지만 인격체로 대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주시고, 말씀을 하셔서, 우리를 인도해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격체라 함은, 일종의 독립성을 지닌 존재(存在)라는 말입니다. 인격체라는 것은 결단력을 지니며, 목적을 세우며, 그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격체는 적어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유를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가르켜 “선택권을 소유한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 곧 피조된 인격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이며 신비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종속되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격체인 인간 다운 존재입니다.

 

(로마9,21) 21 또는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 성경은 이렇게 종속적인 인간의 처지를 묘사하지만 ....

 

(여호24,15)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피조성과 인격성은 반드시 균형 속에서 살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피조성만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자칫 숙명론에 빠지게 되고,(하느님께서 다 하실테니 우리는 할 것이 없네) 피조성을 무시하고 인격성만 강조하다 보면 사람 자체가 신성화되게 되는 이단을 낳게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 ‘인격성이 갖고 있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벌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전적인 자비를 의지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이 인격체라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그 인격체가 할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필립2,12-13) 12 사랑하는 여러분여러분은 늘 순종하였습니다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처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 ‘구원을 위해 힘쓰시오’ 라는 말은 헬라어‘카데스가제스테’로 농부가 자신의 토지를 경작(耕作)하는데 쓰이는 말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것을 ‘너희가 자라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이 없이는 일하시지 않으십니다.(노력하게 만들고야 마십니다.)

하느님께서 레일을 깔고 우리는 그 위를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레일이 깔리면 기차는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기차는 레일이 깔리면 당연히 달려야지요.~!

 

(골로3,9-10)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벗어 버리고’의 ‘아페크 두사메노이’와 ‘입은’의 ‘앤 두사메오니’는 모두 부정시제입니다. 부정시제라는 것은 순간적인 한 번에 일어난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회복된다’는 ‘아나카이 누메논’은 현재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옛 사람을 입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로 한 번에 일어난 것인데 새롭게 되는 일은 계속해서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신자들은 이미 새롭게 된 것이지 새롭게 되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형상을 쫒아 새로운 자아가 점차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거룩한자가 되었습니다.(히브10.,14~)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씩 까서 보여주십니다. “아! 나는 그런 복을 받은 자구나. 아! 이것도 받았네? 어! 이것도?” 하며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이 땅의 모든 것은 놓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무시무시한 죄에서 건져 졌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들로서, 이제 우리가 우리 손과 발을 움직여 그 신분에 어울리는 합당한, 맞는 삶을 살아내야겠지요? 진짜와 거짓을 어떻게 구별하지요? 약을 먹었으면 당연히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는 당연히 삶의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페4,1) 1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수인(囚人)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골로1,10-12) 10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11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기쁜 마음으로, 12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1요한3,16-17)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로 살며 사랑하게 하소서그래서 저희 모든 이들을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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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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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카6,27-38)25.02.22조회 11[연중 제6주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카6,17.20-26)25.02.15조회 13[연중 제5주일]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5,1-11)25.02.08조회 16[주님 봉헌 축일] 제 눈이 구원을 봤습니다. (루카2,22-40)25.02.01조회 18[연중 제3주일] 주님의 은혜로운 해 (루카1,1-4; 4,14-21)25.01.25조회 15[연중 제2주일] 카나에서 첫표징을 (요한2,1-11)25.01.17조회 14[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다 (루카3,15-16.21-22)25.01.11조회 16[주님 공현 대축일] 동방박사의 예물 (마태2,1-12)25.01.04조회 18[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제 아버지의 집 (루카2,41-52)24.12.27조회 90[대림 제4주일] 참 행복 (루카1,39-45)24.12.27조회 66[대림 제3주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루카3,10-18)24.12.14조회 40[대림 제2주일]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3,1-6)24.12.06조회 58[대림 제1주일]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21,25-28.34-36)24.11.29조회 26[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진리를 증언하려고 (요한18,33ㄴ-37)24.11.23조회 39[연중 제33주일] 그 날과 그 시간 (마르13,24-32)24.11.16조회 87[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과부의 렙톤 두닢 (마르12,38-44)24.11.08조회 12[연중 제31주일]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마르12,28ㄱㄷ-34)24.11.02조회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