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22일 일요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오병이어(五餠二魚) (루카9,11ㄴ-17)

제1독서<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다.>(창세14,18-20)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화답송>시편110,1.2.3.4(◎4ㄴㄷ) ◎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주님께서 내 주께 이르셨나이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 주님이 당신 권능의 왕홀을 시온에서 뻗치시리이다. “너의 원수들을 다스려라.” ◎
○ 네 권능의 날에, 주권이 너와 함께하리라. 거룩한 빛, 새벽 품에서, 나는 너를 낳았노라. ◎
○ 주님은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으시리이다.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제2독서<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11,23-26)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속가<21절부터 시작하여 짧게 할 수도 있다.>
21. 천사의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음식 개에게는 주지마라.
22. 이사악과 파스카양 선조들이 먹은만나 이성사의 예표로다.
23. 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24. 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복음<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9,11ㄴ-1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창세14,18-20)
"그 무렵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8)
'살렘 임금'으로 번역된 '멜레크 살렘'(mellek shallem)에서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마련되었네." (시편76,3) '살렘'은 '예루살렘'의 예스런 명칭인데,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당연히 당시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통치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본문의 '살렘'을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보지 않는다. 즉 '살렘'(샬렘)을 '화친하다', '배상하다'(탈출22,6)로 번역된 동사 '샬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서 살렘 임금을 '화친하기 위해 나아온 임금', '항복하고 배상하는 임금' 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문맥상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패자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또한 아브라함도 그에게 전리품의 일부를 바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멜키체덱이 가져온 빵과 포도주는 아브라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아브라함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선물로 볼 수 있다.
'멜키체덱이'로 번역된 '우말르키 체디크'(umallki tsedeq)에서 '멜키체덱'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말르키'를 '멜레크'(mellek; 임금,왕)와 1인칭 어미가 합쳐진 말로 보며, '체데크'를 신(神)의 이름으로 여겨 '나의 임금은 체데크신(神)'으로 보는 견해이다.
둘째는 '마르키'를 신(神)의 이름으로 여기고, '체데크'를 문자적 의미인 '정의'(正義)로 보아서 '마르키신(神)은 정의로우시다'로 번역하는 것이다.
셋째로 두 단어를 모두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나의 임금은 정의로우시며'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견해를 취하면, 멜키체덱은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는 사제가 된다.
그러나 본문에 이어지는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라는 내용을 볼 때 이 두 견해를 도저히 취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세번 째 견해가 합당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그의 정의로운 성격을 잘 대변하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 번역된 '코헨 레엘 엘르욘'(kohen leel ellyon)에서 '지극히 높으신'으로 번역된 '엘르욘'은 '오르다'(창세49,4 ; 신명5,5)란 의미가 있는 '알라'(alla)에서 유래하며 '가장 으뜸됨','가장 존귀함'(2역대7,21; 시편89,28; 에제42,5) 이란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 단어가 본문에서처럼 하느님께 대해 사용될 때는 다른 존재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초월성과 탁월성을 보여준다(시편7,18; 57,3).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과 견줄 존재가 아무도 없음을 알고, 오직 하느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겨야 한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 주님이심을 당신 홀로 온 세상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그들이 깨닫게 하소서." (시편83,19)
한편 성경에서 740회 등장하는 '코헨'(사제)이란 단어가 본절에 처음 나온다. 인간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변자 역할을 하는 예언자와 달리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중보자) 역할을 하는 사제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탈출기 28장에 비로소 나온다.
즉 모세의 형인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의 사제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멜키체덱은 이방인이며 아론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키체덱은 당시 사람들을 대표해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던 자인만큼은 분명하다.
이러한 멜키체덱은 임금이며 동시에 사제로서 장차 오시게 될 만왕의 왕이시며 완전한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시편110,4 ; 히브7,1-17).
즉 '정의의 임금'(멜키체덱의 뜻)이며 '평화의 임금'(살렘 임금의 뜻)으로서 멜키체덱은 이상적인 신정정치(神政政治)의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아론의 계통이 아니고 시작도 끝도 없는 사제로서의 멜키체덱은 영원한 중재자(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사제인 멜키체덱을 등장시킴으로써 이천 년 이후에나 이 땅에 오시게 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성경이 태초부터 계시며 영원히 인간의 중재자(중보자)가 되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며 그들을 위해 밀어 주십니다." (히브7,24.25)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창세14,20ㄷ)
성경에 처음 나오는 십일조(十一租)에 대한 기록이다. 십일조 규정은 모세에 의해 명문화되었지만(레위27,30-33), 본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이전에도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이브라함이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마아세르'; maaser ; a tenth; tithe)을 멜키체덱에게 준 것은 멜키체덱을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로 인정한 것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드린 십일조는 아브라함 자신의 모든 소유는 물론, 자기 자신도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성숙한 고백인 것이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시편24,1)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제1독서의 멜키체덱은 성경에서 언급된 최초의 제사장입니다.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던 그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멜키체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 110[109],4)라는 메시아적 신탁은 마침내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실현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의 몸과 피를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대사제이시며, 새 계약의 중개자가 되십니다.
제2독서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성찬 제정문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몸소 성체성사를 세우신 내용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기억’(ἀνάμνησιζς, 아남네시스)이라는 말은 이천 년 전의 사건을 그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제를 통하여 봉헌되는 미사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거행된 완전하고도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성체 거양 다음에 “신앙의 신비여!”라는 사제의 선창과 함께 바치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현재, 예수님의 죽음을 전하는 과거,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미래, 곧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 공존하며 천상 잔치의 영원한 기쁨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앞서 헤로데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하며 예수님에 관해서 질문하였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을 읽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참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의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동작들, 다시 말해서 빵을 ‘들고’, ‘축복하시며’, ‘떼어’, ‘나누어 주셨다’라는 네 동사가 예수님의 성찬 제정문과 엠마오 발현 이야기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작의 연속성’을 통해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성찬례를 제정하시고,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식탁에 앉아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분께서 바로 같은 예수님이심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사제를 통해서 거행되는 미사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요한 6,51 참조)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이 놀라운 신비로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또한 주님과 더욱 깊이 일치하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생명의 주님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빵’이 되도록 합시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연대와 나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사랑으로 병든 이들을 고쳐주십니다(9,11). 말씀도 행동도 모두 하느님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모두 내어주시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열두 제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들도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제자들은 군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예수님께 그 책임을 떠넘깁니다. 날이 저물고, 황량한 곳이라는 이유로(9,12) 그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빵이요 영원한 거처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안한 방법들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그분의 신원에 대한 이해도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도 이처럼 날이 저물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처럼 여겨지는 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생명이신 주님을 두고 어디로 달려갔으며 내가 믿는 신앙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손을 내밀긴 했으나 오히려 고통스런 현실을 회피하고 그분께 짐을 떠넘겨버리지 않았는지 성찰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결책을 청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9,13) 하십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빵으로 오신 자신을 건네주셨듯이 제자들도 스스로를 남김없이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곧 사랑의 동기로 각자에게 정의로운 분배를 실천하라는 말씀이지요. 얼마나 많은 것을 나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부를 나누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자신을, 지금까지 당신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생명을,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님을 ‘지금 여기서’ 내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여기에 예수님과 군중과 자신들이 함께 있고,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외적인 수단과 물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연대와 일치의 정신이었습니다. 어떻게 연대하여 이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바꿔나갈지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군중을 분리시킨 채 자신들 밖의 힘에 의존한 것이지요.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당신의 몸과 피를 건네시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25)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그분의 죽음을 넘어선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나의 존재 전부를 지금 여기서 나눔으로써 분배 정의를 실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연대함으로써 모두가 배부르게 되는, 곧 생명을 호흡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기꺼이 서로를 나누고 어떤 역경과 시련 중에도 사랑의 연대를 이룰 수 있도록 힘쓰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대한 공경을 표하는 우리다운 태도일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로 지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전례 안에서 기념해 왔던 육화의 신비 전체와 삼위일체의 신비까지도 바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 안에 함축되어 있고, 오늘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구원 의지의 가장 탁월한 표현이요 그 구체적인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제시하시면서, 당신의 살을 우리의 양식으로, 당신의 피를 우리의 음료로 내어 주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분이 스스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신 겸손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신 수난과 고통, 부활을 통하여 이룩하신 승리까지도 모조리 우리에게 내어 놓으실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당신 안에 갖고 계신 삼위일체의 신비까지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온전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정말 기쁘고 감사한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온전히 채워지는 신비를 경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의 가장 소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임을 되새기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진 우리는 이제 그 사랑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우리의 이웃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25년 06월 22일 일요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먹는 일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행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시자마자 가축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이셨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계셨기에 인간의 그 원천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명은 인간에게 영원히 양식을 제공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린 군중 오천 명, 또는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야기가(루카 9,11ㄴ-17 참조) 나머지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마르 6,30-44; 8,1-10; 마태 14,13-21; 15,32-39; 요한 6,1-14 참조), 이 본문들 가운데 대부분이 음식을 ‘사는’ 행위를 언급합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시장 경제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기에 굳이 감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마을로 보내 음식을 사게 하자고 하며 시장 경제의 논리를 끌어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눔과 선물의 논리를 이야기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그때까지 제자들은 군중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기들에게 나눌 것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시장 경제의 논리가 나눔의 신비로 대체됩니다.
나눈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써 당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선물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내주십니다.
지난해 세계 인구의 9.1%인 7억 3,340만 명가량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갑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시험에서 낙방한 자들아 오너라.
복음(루카9,11ㄴ-1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 하느님의 말씀으로 병(病)을 고쳐주심이다. 무슨 병일까? 그리고 고침 받음이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다음절(節)부터 가르친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에레모스-광야)입니다.”
=황량한 곳(에레모스-광야), 광야는 물이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물은 하늘에서 흘러내린다. 또한 광야는 우리의 인생 여정을 뜻한다. 곧 모든 피조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지속적으로 먹고, 마시며 갈증과 더러움(죄)을 해결 할 수 있음 이다.
다른 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잠자리 그 죽음의 자리, 곧 자기 부인(否認)의 자리로 내려가 하늘의 생명을 얻어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55,10-11) 물론 제자들은 그 의미(意味)를 모르고 한 소리다. 우리 독자(讀者) 들에게 알아들으라는 말씀이다.
(신명8,2-3) 2 너희는 이 사십 년(일생)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만나’는 ‘이게 뭐야?’ 라는 뜻이다. 만나는 사람의 눈과 입에 맛(味)없기에, 곧 사람의 뜻에 맞지 않기에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인 티끌임을 자각(自覺)한, 그래서 하느님만을 의지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그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것(만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을 수 있기에 하신 시험(試驗)이다.
그가 영(靈)의 질병(疾病)을 고침 받는데 필요한 사람이다. 곧 자신(自身)이 죄인(罪人)임을 아는 사람이 용서(容恕), 새 생명을 받는데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성체(聖體)를 내 뜻, 욕망(慾望)에 맞춰 먹는 것이 영(靈)의 죽음, 병(病)이다. (1코린11,29-30참조)
광야(廣野)의 모든 사람이 그 하느님의 시험(試驗)을 통과하지 못해 영(靈)의 절름발이, 병자(病者)로 오늘에 이르렀다.
13ㄱ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 ‘너희가 마음에 간직한 말씀을 주어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弟子)들도 못 알아듣는다.
13ㄴ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육(肉)의 빵(떡)으로 듣고 걱정되어 육의 빵으로 답(答)한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빵으로 하늘의 양식(糧食)인 말씀을 깨닫게 하시려 하신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 빵 다섯 개와 물곡 두말, 곧 땅의(부정한5. 2)걱정, 고난의 양식을 ‘들어올려’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의 제물) 하늘의 양식(5+2=7)으로 주신 것이다.
5☞ 모세 오경(율법) 2☞ 선악(善惡)의 두 마음, 7☞안식(安息)
예수님께서 부정을 받아 가지시고(죽으시고) 당신의 승리, 안식, 생명으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이사53,4 1코린15,57 참조)
오늘독서(1코린11,23-25)
23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행(行)하여라’ (킵 - 마음에 지키다. 간직하다) 곧 기억(記憶)하여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빵(성체)을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의 말씀’으로 먹고 마셔서 ‘마음에 간직, 지키라’는 것이다. 인간의 뜻, 소원을 위해 당신의 육의 살과 피로 먹고 마시는 그 ‘행위 신앙’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분별(分別)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다.
(1코린11,29-30) 29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30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 성체(聖體)를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의 말씀으로 먹지 못해, 영(靈)이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곧 많은 사람이 그 ‘분별없는, 죽은, 병든, 신앙을 산다’는 말이다.
(요한6,48-49.51)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주는 살이다. 곧 세상의 생존을 위한 살이 아닌 것이다.
(요한6,63)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예수님의 살은 ‘영(靈)을 살리는 승리(勝利), 생명의 말씀’이다. 곧 예수님의 살로 먹는 것으로 만족 해 한다면, 하늘의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페리쉬어- 차원이 다른)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 *숫자12는 하느님의 아들, 사도를 뜻한다. 곧 사람들이 먹은 빵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피의 새 계약인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다.
(요한1,1.12.14)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12 그분(말씀)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말씀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면 성체(聖體), 그리스도의 몸을 ‘하느님의 말씀, 진리, 영광’으로 먹는 것은 당연하다. 곧 내 뜻, 소원을 위해 먹었을 때 하느님의 아들(12)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체(聖體)가 ‘피기 뚝뚝 떨어지는 주님의 살로 변했다’는 그 기적(奇蹟)의 살이 ‘라티아노 성당’에 보관 되어 있다며 ‘믿음으로 성체를 열심히 모셔야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 뜻, 소원을 위해 열심히 모셨었다. 그러나 안식(安息)은 없었다. 하느님의 아들(12)이라는 믿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 기적은 아담을 유혹(誘惑)했던 뱀(사탄)의 계략(計略)이었다. 곧 하느님의 시험에 낙방(落榜)시키려는,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靈)을 병들고, 죽게 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뱀의 간교한 계략이다. 교회(敎會)가 그 뱀의 간교한 계략을 분별하지 못해 신자(信者)들이 그 뱀의 기적을 섬기는 꼴이 되었다.
성체(聖體)나 말씀을 내 뜻, 소원을 위해 먹으며 섬긴다면 ‘뱀의 자식’이 된다.(루가4,6) 영원히 땅에 갇히는 ‘지옥의 자식’이 된다는 말이다.
(마태23,27-28)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 주님을 만나기 전, 바리사이 사울처럼 자기 의로움으로 자신을 아름답게, 흠 없이, 깨끗하게 하는 것이 위선(僞善), 불법(不法)이라 하신다.
(마태23,33) 33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 왜? 땅의 의로움은 완전(完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에 들어갈 수도 없고, 우리의 승리, 생명이 되시기 위해 우리의 죄(罪)로 죽으신 그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수고(愁苦), 열심, 자기 의로움으로 하늘에 들어갈 수 있다는 높은 교만(驕慢) 때문이다. 그 교만이 우리의 구원,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가리기(죽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셨던 표징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뜻, 승리를 깨닫지 못하고 내 뜻, 소원, 의로움을 위해, 내 밖에 ‘능력의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는 신앙’을 산다면 ‘헛된 신앙’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능력의 예수님은 없기 때문이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리스도의 영(靈), 말씀’으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인 ‘구원(救援)의 상태(狀態)’인 것이다.
(로마8,9)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 내 밖에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는 이는 ‘육(肉)의 사람’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곧 피의 새 계약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시험에 낙ㅈ방한, 그래서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받는 용서, 고침, 그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사람임을 알 수가 없고, 시험을 대신 승리로 이루신 구원의 믿음이 생기지 않아 병자, 죄인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 보호자 은총의 성령님!
하느님의 사랑(아가페)과 용서의 손길이 저희 모든 이들 안에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