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24일 일요일
[연중 제21주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2-30)
제1독서<그들은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데려 오리라.>(이사66,18-21)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화답송>시편117,1.2ㄱㄴ(◎마르16,15)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제2독서<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히브12,5-7.11-13)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13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복음<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13,22-30)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8)
앞의 이사야서 66장 15-18절 상반절에서는 주님의 오심과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불의 심판이 예언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66장 18절 후반절부터 21절에서는 그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서 선민들의 선교에 의해서 이방인들의 대회심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의 시작은 언젠가는 모든 민족들이 주 하느님 대전에 모여들어 그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 예언된다.
새 성경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때가 이르면'에 해당하는 '빠아'(baah; it shall come; about to come)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오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뽀'(bo)의 분사형으로서 문자적으로 '오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현재 오고 있는 중이라는 진행적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실상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간적 절박감이 잘 나타난다.
그때에는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주님 대전으로 모여들 것이다.
본문에서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 해당하는 '콜 학고임 웨할레쇼노트'(kol haggoim wehalleshonoth)는 문자적으로는 '모든 민족들과 모든 혀들'(all the nations and tongues)이라는 의미이다.
새 성경이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로 번역한 '할레쇼노트'(halleshonoth)의 원형 '라숀'(lashon)은 언어와 미각의 기능을 담당하는 혀(tongue)를 의미하는 단어이다(탈출4,10).
이사야서 45장 23절에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본문의 문맥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모든 혀들이 주님 대전에 모일 것이라는 사실은 단 하나의 소수 부족도 빠짐없이 다 모일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의 선교에 의해 이방인 가운데 하느님의 간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나타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모든 언어 단위의 부족에게 다 전파될 것임을 암시한다(미태24,14).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주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다 당신 대전에 모으시는 진정한 목적은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분 영광의 현시는 구약 시대까지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에 한정되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탈출16,7; 24,16; 29,43), 이방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광이 반드시 축복의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그 영광이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무서운 심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대회심을 예언하는 문맥을 볼 때, 본문은 심판보다는 축복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연중 제21주일 제2독서 (히브12,5-7.11-13)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6)
주님의 훈육은 영적 자녀가 된 성도에 대한 진정한 부성애의 표시이다.
그분의 훈육은 사랑하시는 이에게만 내리기 때문에 누가 주님의 훈육을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증거이다.
여기서 '훈육하시고'로 번역된 '파이듀에이'(paideuei)의 원형 '파이듀오'(paideuo)는 본래 '어린이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에서 '양육하다', '가르치다', '습관을 들이다' 등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구약 그리스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는 주로 '응징하다', '교정하다', '훈계하다' 등을 뜻하는 히브리서 '야싸르'(yasar)의 역어로 나온다.
따라서 70인역에서는 '파이듀오'(paideuo)가 '가르치다'라는 의미보다는 '훈육하다'라는 의미에 보다 가깝다.
이 단어가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훈육을 통한 교육이라는 개념을 나타내어 쓰였다.
유대 사상에서는 훈육을 '최후의 심판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행동'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히브리서의 저자도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의 훈육이 성도들로 하여금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있는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실망하지 말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녀가 된 당신 성도들을 멸망하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고 교정하시는 일시적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으로 침체에 빠졌을, 당시 히브리서 일차 독자인 히브리 출신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릇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부모는 실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나 불의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내버려 두셨다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면 계속해서 훈육하심으로써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신다.
가르침이나 교정에는 꾸짖음이나 훈련이 불가피하다.
언제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면서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교육하며 훈련시키신다.
'채찍질하신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영적 자녀들에게서 허물이 발견될 때에 나타내시는 반응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채찍질하신다'로 번역된 '마스티고이'(mastigoi)는 현재 시제로서 '계속해서 매질하다' 혹은 '계속하여 응징하다'라는 지속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마스티고이'의 원형 '마스티고오'(mastigoo)는 끝에 납덩어리가 달려있는 '채찍'을 의미하는 명사 '마스틱스'(mastik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살점이 떨어지도록 심하게 '채찍질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육체적 폭력 행위를 뜻하는 여러 그리스어 단어들 중에 더욱 가혹한 형태의 처벌을 나타내는데, 후기에는 중대한 범죄에 뒤따르는 로마의 징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명령으로 이 형벌을 받으셨고(요한19,1),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사도5,40) 역시 채찍질의 형벌을 받았다.
그 채찍질은 참으로 가혹한 형벌로서 본문에서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무엇때문에 인정하시는 아들, 즉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아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채찍질하시는가?
그 이유는 그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그 아들을 상속자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본절의 '아들'에 해당하는 '휘온'(hyon)의 원형 '휘오스'(hyos)는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하는 아들이라는 법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내려지는 주님의 채찍이 아프다고 생각될 때, 이것은 그분이 나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그 채찍은 바로 아들된 우리를 향한 아버지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인 것이다.
[연중 제21주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보통 마태오 복음은 엄격하고, 루카 복음은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카 복음도 엄중하고 강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여간해서는 지나갈 수 없는 좁은 문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 문은 닫힐 것이라고 합니다.
닫힌 문 앞에서 사람들이 집주인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에 숫자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많은 유사 종교와 사이비 종교가 숫자 놀음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원받기 위한 첫째 조건은 ‘싸우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가끔 등장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싸웁니다]”(1코린 9,2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애써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힘겨운 싸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그릇된 논리와 유혹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둘째 조건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낮아지고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춘 사람은 자신이 약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호소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구원을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를 받고 교리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꾸준히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보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자기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는 항변에도
주인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1주일 복음 (루카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4)
본절에서 '힘써라'에 해당하는 '아고니제스테'(agonizesthe; strive; make effort to)의 기본형 '아고니조마이'(agonizomai)는 원래 경기에서 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다', '싸우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최선을 다하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루카 복음 13장 25절이 문이 열려 있을 때와 닫혀버린 이후를 대비한다는 점에서, 이 동사의 의미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어떻게든 들어가도록 노력하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구원의 문을 들어가도록 애쓰라는 것이다.
또한 본절에서 '문'은 '집의 문'을 가리키는 '튀라'(thyra; gate; door)로 표현된 반면에, 마태오 복음 7장 13절에서는 '성문' 또는 '성전의 문'을 가리키는 '퓔레'(pyle)로 표현되었다.
이런 차이는 13장 25절에서 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집주인'의 역할에 따라 이 구절의 배경을 어떤 성이나 성전이 아닌 '어떤 집'으로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문을 특별히 '좁은 문'('테스 스테네스 튀라스'; tes stenes thyras; the strait gate; the narrow door)으로 묘사한 것은, 앞의 '힘써라'는 표현과 함께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안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진정으로 구원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좁은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하겠지만'에 해당하는 '제테수신'(zetesusin; will seek; will try)의 기본형 '제테오'(zeteo)는 '추구하다'는 뜻으로서 개인적인 추구와 노력을 가리킨다.
결국 이 동사는 구원에 있어 아무런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헛된 노력과 시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3장 25절과 관련지어 볼 때, 문이 닫혀진 후에 계속해서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당신께 구원을 겸손히 청하는 사람들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자신의 노력과 인생의 헛된 수고만으로 구원을 얻기를 추구한다면, 그에게는 결코 구원이 없음을 본절에서 사용된 '제테오'(zeteo) 동사의 뜻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적용할 때에는, 그들의 인본주의적인 전통이나 율법에 대한 추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원은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얻어질 수 없다는 방법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못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우크 이스퀴수신'(uk ischysusin; will not be able to)은 '그들이 할 수 없을 것이다'는 뜻으로 불가능의 의미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할 수 있다'는 뜻의 기본형 '이스퀴오'(ischyo)의 미래 직설법 능동태로 사용된 '이스퀴수신'(ischysusin)은 부정어 '우크'(uk)와 더불어 그들의 구원에 대한 노력은 마지막 때에 무익한 것으로 드러날 것임을 표현해 주고 있다.
2025년 08월 24일 일요일
[연중 제21주일]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 끝부분입니다.
예루살렘을 통하여 이방 민족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리리라 선포됩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온 이들을 독자로 삼는데, 특히 저자는 ‘훈육’을 강조합니다.
훈육으로 말미암은 시련과 슬픔은 기쁨과 평화와 의로움으로 바뀔 것이라며 희망을 가르칩니다.
저자는 이사야서 35장 3절과 잠언 4장 26절을 인용하며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 12,12-13)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소개됩니다.
지난 주 평일 미사 때 들었던 마태오 복음서의 하늘나라 이야기와는 다른 형태의 문맥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루카 13,26 참조),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처합니다.
그러나 성조들과 예언자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메시아의 잔치’, 곧 하느님 나라에 유다인들은 들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13,28 참조).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이들은 이 잔치에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온] 사람들”(13,29)은 제1독서에서 이야기한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사 66,18), 곧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 질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늘 열려 있고 보편 구원과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희망의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다해 연중 제21주일)
하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하늘의 첫째다.
복음(루카13,22-30)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에 “좁은 문”으로 답하시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신앙(信仰)의 길이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곧 제사와 도덕과 윤리의 신앙은 아니라는 말씀이다.*좁은 문- 사람(아담)이 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 욕망을 위한 선악의 법으로 먹어 그 선악의 법 심판 때문에 하늘가는 길이 좁아진, 좁은 문이다.
그 선악의 법을 완전히 다 지켜서 심판을 통과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창세3,23-24)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 불 칼을 들고 커룹들이 지키는 길은,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거저 의롭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 곧 그분 안에서만 통과할 수 있다.
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신의 뜻,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믿고 따르기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마태7,13)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 인간의 뜻, 소원을 위한 신앙은 주님의 뜻 밖에 삶이기에 주님과 분리된 것으로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하늘가는 길, 곧 구원의 길이 아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길, 곧 인간들의 뜻, 길을 위한 가르침으로 들어 행(行)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의, 불법이다.(요한16,8참조)
너희? 제사와 윤리로 사람의 규정과 교리를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하늘의 문(길)이 열리지 않는다.(로마10,1-4참조)
(필리3,18-19)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베드3,7) 7 지금의 하늘과 땅도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같은 말씀으로 보존됩니다. 불경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날까지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주님 앞에서 자신의 뜻(盃)을 위해 먹고, 마셨고, 자신들의 이름, 의(義), 영광을 위한 가르침으로 들었던 그것이 불의(不義)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 길(道)을 가르치시고 이루시러 오셨다. 씹을 양식(糧食), 곧 깨달은 말씀이 없어 이(齒)만 갈게 된다는 말씀이다.
‘밖으로 쫒겨 날’은 ‘너희는’에서 나와야 한다. 곧 인간의 뜻, 길을 위한 신앙에서 하느님의 뜻, 길을 위한 깨달음의 신앙으로 건너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에페2,8)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갈라1,4) 4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금의 이 악한 세상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 현세에서는 인간의 뜻, 의(義)를 위한 보이는 열심 한 ’행위의 신앙’이 첫째 같아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꼴찌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한 가지를 깨닫는 신앙을 살아야 한다.
(요한7,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모두 놀라워한다.
(루가10,42. 16,15) 10,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16,15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한 가지’- 하느님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죄에서 구해 내시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 안식을 주시려고 주님께서 저주의 십자가에 죽으신 그 ‘한 가지’다.
그 한 가지 일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민족들이 원하는 것을 힘써, 굶어가며 단식과 기도, 미사로 청하고 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인 진리의 길,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마태6,7-8)
꼴찌는? 하늘의 재물, 힘(성령)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받은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어리석음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현세에서는 꼴찌다.
(요한6,27)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주님께 얻으려하지 않고, 깨달으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로 묻는다. 뱀의 유혹, 곧 선악의 가르침을 먹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한3,17)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하늘의 꼴찌가 될 땅의 첫째들로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성령으로 늘 첫째로 살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