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21.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는다고 한다. (지혜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고 한다. (로마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제1독서(지혜3,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는 떠니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1~4)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 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하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다교 사상가 필론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다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윤리,신학,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다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다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 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다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 유다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자연,우상,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가?
전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왜 악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주고,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유아독존(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神의 공의,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께서 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3장의 말씀은 여기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영원(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고, 의로운 영혼은 반드시 불사불멸이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 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 천하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내세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나오는 초대 교회 첫 순교자이신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장면처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당신을 위한 고난의 순간에까지 항상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그자가 내쫓겼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그자를 이겨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묵시록12,10~11참조)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묵시록21,3ㄹ~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2독서(로마8,31ㄴ-39)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겟습니까?"(8,31ㄴ.33.34ㄱ.35ㄱ)
성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을 이어주시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에서 드러난 그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는 게 무엇인가?
성부 하느님 대전에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을 공격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느님과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공격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랑을 끊어 버리도록 우리를 공격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탄이 공격하는 가능성에 대해 일곱 가지 도구를 지적한다.
1) 환난-외부로부터 오는 압력, 재난과 시련, 영적 고통을 말한다. 이 환난과 시련은 내 잘못으로 올 수도 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환난이 오면, 왜 나에게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는지 원망과 의심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극복하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고, 미래의 영광과 축복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
2) 역경-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곤고(困苦;'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뜻 - 보통 '좁은 장소' 혹은 '여유가 없다'라는 의미로 쓰임)라고 번역했다.
역경이 닥칠 때, 곤고할 때, 내가 마치 새장같은 아주 좁은 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불안하고 외롭고,고독할 수 있으며, 믿음과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3) 박해-이것은 환난과 시련과는 조금 다르다. 노골적으로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거부하고 방해하며 공격하는 핍박을 말한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했다.
4) 굶주림-이렇게 신앙때문에 믿음의 진리를 추종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때,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집에서 쫓겨나고, 어디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굶주림,기근이라 한다.
사도 바오로도 복음을 전하다 이것을 겪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느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도 그곳에서 기근을 겪게 되어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고, 아내 사라이를 빼앗길 뻔하고,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굶주림은 육체적 고통을 주기에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5) 헐벗음-우리가 복음을 갖고 복음에 따라 살며 복음을 전하다 보면, 가끔 사도 바오로처럼 헐벗음(赤身)을 경험하게 된다. 헐벗음은 입지 못하고 자지 못함을 말한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11,27)
인간은 벌거벗은 몸으로 와서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존재이지만, 사는 동안 만이라도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하고 수행하다 보면, 이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위험-이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을 격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질병과 생존의 위기, 죽음의 협박 즉 원수로부터의 살해의 위협을 받고 모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히브11,36-37참조).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지 않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함을 깨우쳐 준다.
7) 칼-칼은 죽음과 전쟁을 상징한다.
사람은 누가 죽이겠다고 하면, 사람은 죽음앞에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국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한다. 칼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고, 흔들리기 쉽다.
칼이란 우리 믿음의 선조들 중에서 동정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순결(정결)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등반을 통해 완덕의 산을 오르면서, 힘은 드나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보화를 캐면서, 완덕의 산 정상에 올라,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선언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8,37)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흔들려고 하는 7가지 장애물들이 있었듯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흔들려고 하는 10가지 장애물들을 열거한다.
1) 죽음-육체적 죽음과 죽음에 따르는 고통을 말한다(1코린15,55).
AD 2세기의 순교자인 성 뽈리카르포는 화형대의 기둥에 묶여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말을 들었을때, "예수님은 87년동안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찌 그 이름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불태워 죽인다 해도, 나는 그 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이 죽음은 나의 기쁨입니다." 라고 말했다.
2) 삶-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의 삶을 말하며, 죽음과 반대 개념이다.
세상에서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특권,쾌락, 즐거움이 이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광야의 유혹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나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던 그것이다."
3) 천사-여기서 말하는 천사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악한 천사,악한 영들을 말한다. 이 악령은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들고,질병을 가져다 주고,우리를 파괴한다. 하지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악령들이 집요하게 방해하고 못 살게 굴더라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 신앙이다.
죽음을 통해, 마치 단련을 통해 풀무불에서 정금이 나오듯, 고난없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4) 권세-통치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높은 자, 지존자를 의미한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인들을 굶기고 고문하고 학살했던 악한 통치자들과 독재자들이 많다. 그들 뒤에서 역사하는 세력들이 바로 악한 영들이다(에페6,12참조).
5) 현재의 것-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한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고통등, 현재 손해를 보는 고통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일도 피하고 싶은 유혹이 오는 것이다.
6) 미래의 것-현재와 상반되는 '장래일'을 말한다. 미래에 오게 될 환난과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을 지금 당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구에 오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면으로 고통을 대결하게 한다.
7) 권능-악한 천사나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어떤 힘을 말한다.
마귀도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제한적으로 사용한다(점, 점성술, 타로 etc.)
8) 저 높은 곳-위에 있는 어떤 힘(power above)을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모든 것들-권세,부, 명예, 높은 지위 등을 말한다.
9) 저 깊은 곳- 아래에 있는 세상(power below)을 말한다.
가장 침체되고 낮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 가난, 멸시,천대, 낮은 지위 등등. 8)과 9)는 아주 좋거나 아주 낮고 비천한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10) 그밖의 어떤 피조물-이것은 위에 열거한 9가지 외의 모든 것을 말한다.
영적 세계의 어떤 악령들도, 우주의 어떤 세력도, 어떤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3,8ㄴ)
오늘 103위 순교 성인 대축일을 보내면서,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와 의를 위해서 자신의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을 바친 훌륭한 순교자들 조상을 둔 후손으로서, 믿음의 후손으로서, 이 시대에 어떻게 그들의 순교 영성을 살 수 있고 계승할 수 있겠는지 구체적인 나의 삶과 삶의 현장에서 깊이 묵상해 보자~~
로마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노래를 부르면 좋겠다.
2024년 09월 22일 일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지혜서에서는 의인들의 영혼이 불멸하며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리리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늦게 작성된 지혜서는 내세에 대한 희망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혜서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 이스라엘에서 유다교가 외세의 박해를 받던 시대에 다니엘서와 마카베오기 같은 책들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나타납니다.
여러 해 전 어느 날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내세와 부활에 대한 믿음이 뚜렷해지면서 순교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누군가 “순교자들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더라도 순교를 하였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다니엘서 3장 17-18절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불가마에서 구하여 내시지 않더라도 다른 신들을 섬기지는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것은 장차 받을 영광과 상급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그 사랑마저도 시작은 하느님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로마 8,32)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셨기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었기에]”(8,37) 박해와 칼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주신 분, 그 사랑에 우리도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오늘, 순교자들이 지녔던 큰 사랑과 용기를 본받으려 한다면 먼저 순교자들이 만났던 하느님을 우리도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사랑이 없다면, 다만 상급을 바랄 뿐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도 무의미할 것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선택(選擇)에는 책임(責任)이 따른다.
복음(루카9,22-26)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 우리의 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의 단물, 곧 의롭게 하시기 위해 되살아나심이다. (로마4,24)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지금까지의 욕망의 자신을 버리고 따르라는 말씀이다. 곧 자신의 뜻을 위한 신앙을 살면 분명히 영원한 멸망, 지옥 속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잃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우리의 뜻을 선택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내놓으신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 중 죽음과 불행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갈라5,17)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아셨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선택하라 하신 것일까. 우리가 한,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통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죄의 힘의 결과가 얼마나 고통인지 배우고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러한 잘못된 선택들을 통해서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예쁜 우리 손녀(2살 때)가 내가 마시던 커피잔을 잡으려고 계속 보채 길래 살짝 커피잔을 대 주었다. 그랬더니 뜨겁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만지려 하지 않았다. 그렇듯 하느님은 우리의 올바르지 못한 선택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늘 올바른 선택만 할 수 없다. 대다수 우리의 선택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쪽을 향해간다. 우리가 죄인 이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선택했느냐 하면 우리 안에 있는 ‘통제성향(統制性向)’과 ‘자기(自己)보호(保護)’에 의해 선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집착(執着)과 중독(中毒)이다.
‘통제성향(統制性向)’ 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내 기분에 맞도록 조절하고 싶은 ‘이기적 성향’으로 인간의 타락으로 생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말을 듣지 않으면 화(禍)를 내고, 거짓말로 속이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방어(自己防禦)도 역시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삶에 자기를 보호해주실, 책임져주실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다. 곧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유익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좋은 쪽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깨달았다는, 믿는다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통제성향과 자기방어’의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신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낭패를 당하고 고통을 당할 것을 아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선택하게 놔두신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된 선택으로 시행착오를 통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내가 좋아 선택했는데 이것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아픔을 주는 죽음의 길이구나” 하고 체득(體得)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選擇)하시고 하느님께서 책임지시고 구원을 완성(完成)하셨다는 것이다.~
(이사46,3-4) 3 내 말을 들어라, 야곱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남은 자들아, 모태에서부터 업혀 다니고 태중에서부터 안겨 다닌 자들아. 4 너희가 늙어 가도 나는 한결같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저희를 선택하시고 책임져 주시는 야훼 하느님을 의지하기로 저희 모두는 선택합니다. 끝까지 가도록 힘을 주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복음(루카9,23-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3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이라는 말씀의 대상은 예수님 당신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가리킨다.
보통 '부끄럽게 여기다'고 할 때 한글이 주는 뉘앙스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암암리에 자신만의 신앙을 간직하며, 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반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원문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면'으로 번역된 '에파이스퀸테'(epaischynthe; is ashamed)의 원형 '에파이스퀴노마이'(epaischynomai)는 '수치스러움' 또는 '오욕'(汚辱)을 뜻하는 '아이스퀴네'(aischyne)에 '~에 기초하여'를 뜻하는 '에피'(epi)라는 접두어가 붙은 합성어로서, 수치스러움과 오욕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가리키는 매우 강조적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움과 오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단지 감정적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매우 강도높게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루카 복음 9장 26절은 예수님 역시 이러한 사람을 마지막 때에 수치스럽게 여겨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다.
원문에는 '그를'에 해당하는 '투톤'(tuton; of him)이라는 말을 문장의 맨 앞 부분에 두어서 ''바로 그 사람'을 사람의 아들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원문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러한 어투는 당신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매우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거부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의 주재자로 다시 오실 때(마태24,30.31), 그들이 아끼고 보전하려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으로 단죄하겠다는 예수님의 단호한 결의가 들어 있는 것이다.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천사들의 영광을 취하여 오신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족한 영광을 채우기 위해 천사들의 영광을 힘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재자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동행함을 나타냄으로써(마태13,41.49) 사람이 아들(인자; 人子)의 절대적 영광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루카 복음 9장 26절에서 삼중으로 강조되는 '영광'에 해당하는 '독세'(dokse)의 원형 '독사'(doksa)는 본래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도케오'(doke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의견' 또는 '평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영광'(glory)의 뜻으로 일반적인 희랍 문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영광'이라는 뜻으로는 신약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희랍어 구약 성경인 칠십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카보드'(kabod)에 대한 역어로서 사용된 것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인 희랍어 '독사'(doksa)는 영광의 대상이 아닌, 다른 이들의 '의견'이나 '평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인 반면에, '카보드'(kabod)의 대용어로서의 '독사'(doksa)는 그 자체에서 발하는 '광채'에 의해 주어지는 영광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취하지 않고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에, 루카 복음사가는 후자의 관점에서 '독사'(doksa)를 재림하시는 인자(人子)에게 적용했다.
[연중 제25주일]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김태훈 리푸죠 신부)
‘순교자’가 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대단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한국 순교자들의 상황을 보면, 그들은 오늘 제1독서가 말하는 것처럼 고난을 겪고 파멸에 빠진 이들, 벌 받고 시험 받으며(지혜 3,2-5 참조)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이 없는 시선, 외적인 모습만 보는 시선, 현재가 전부인 시선으로 볼 때입니다.
순교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랐기에, 곧 믿음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았기에 모든 것을 다르게 볼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비록 온종일 주님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질지라도(로마 8,36 참조) 그분 사랑을 확신하였습니다.
스승께서 이 길을 가셨기에 그들도 이 길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때와 같은 박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스르는 풍조와 죽음의 문화가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가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십자가는 많습니다. 날마다 그 십자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삶에서 겪는 크고 작은 개인의 고통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박해 시절의 순교가 눈물과 수고로 얼룩져 있듯이, 오늘날 우리 삶에서도 하느님 사랑을 확신하면서 그분만을 선택하는 단호함으로 어려움을 기꺼이 끌어안을 때, 진정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예이자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게 되면
독서(로마8,31ㄴ-39)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 당신 외 아드님을 죄(罪)의 속죄(贖罪)제물로 내어 주시어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그 사랑으로 죄인(罪人)인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인간의 지각(知覺)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랑이다. 곧 전능(全能)하신 사랑이시다.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의(義)의 십자가(十字架)’가 되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의롭게 하시려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진리)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 그리스도인은 온갖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로 살해되는, 도살(屠殺)될 양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왜? 세상의 것을 버리게, 비워내시고 하늘의 복(福), 의(義), 생명, 평화를 주시려고....
(지혜3,4-6)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루카9,23-26)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否認)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내 속에 온갖 죄, 미움, 시기, 좌절, 절망을 지고 따라오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저주)의 십자를 짊어지고 나를 살리시려 그 죄를 대속(代贖)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 십자가로 지고, 메고 따가는 것이 주님의 제자다
(마태11,28-29)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멍에, 곧 그분의 십자가(十字架)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영광이다. 그 십자가 안에서 죄인인 내가 하느님의 영광이 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나(우리)의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온갖 죄(罪)를 인정하는 것, 나의 죽음이다. 그 죄(죽음)를 인정했을 때,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그리스도로 새 생명을 얻게 된다.
(로마8,38-39)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세상에서 얻는 평화, 명예, 재물, 생명까지 그 모든 것은 죽어간다. 안개처럼 사라진다.
(야고4,13-14)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용서(容恕), 의로움, 생명, 안식을 믿지 않는 것, 그래서 이웃에게 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 고난, 고통을 통해 저를 번제물로 받으시렵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저는 너무 힘이 들어요. 눈물의 밥을 먹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질까 봐 무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한 사도가 전한 그 말씀을 믿습니다.
☨ 보호자 성령님!
하느님의 은총, 은혜로 충만케 하시어 흔들리지 않는 귿건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주셔서 기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찬미영광 영원무궁토록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