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라” (요한21,15-19)

2026. 5. 18. 오전 9:09:09

글자

20260522일 금요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라(요한21,15-19)



1독서<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사도25,13-21)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화답송>시편103,1-2.11-12.1920ㄱㄴㄹ(19)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셨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당신 왕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그분 말씀을 따르는 힘센 용사들아.

 

복음<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25,13ㄴ-21)

 

"그 무렵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13~14)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19)

 

사도 바오로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자 총독 페스투스는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덜게 되어 상당히 홀가분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상급 법정에 제출할 '고소의 형식' 사건의 개요를 담은 보고서 (사도23,26~30)를 작성해야만 했다(사도25,26~27).  

그런데 페스투스는 유다인들과 사도 바오로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통해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재료(사도25,26)를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무능한 관리로 로마 황제에게 낙인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 사건을 제대로 심리할 서류나 사람을 필요로 했는데, 그때 마침 등장한 이가 바로 유다 종교 문제에 정통한 아그리파스 임금 (Herod AgrippaⅡ)과 그의 누이 베르니케였다.

 

페스투스는 유다인들이 고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는데, 첫째는 자기들의 종교 문제요, 둘째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는 '예수의 부활'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문제의 고소 사건은 이미 사도행전 18장 12~17절에서 언급된 갈리오 총독의 재판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로마 법정의 심리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한편 '종교'라고 번역된 '데이시다이모니아스'(deisidaimonias)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 긍정적 의미로 '신에 대한 경외심', 둘째 부정적 의미로 '미신'  (superstition), 그리고 셋째 객관적 의미로서의 '종교' 이다.

대체적으로 당대의 로마의 관리들은 종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특히 식민지의 종교에 대해서는 멸시하였다.

 

아마도 총독 페스투스도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극히 세속적 성취욕만을 가진 로마 관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그리파스 임금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 '성전 후견인' 권세를 부여받은 자로서 유다 종교에 정통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페스투스는 아그리파스 임금이 신봉하는 유다교를 미신으로 단정짓고  '미신'이라는  비하조의 의미로 종교를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그리파스 임금을 의식하여 중립적인 의미에서 혹은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뉘앙스로 '유다인의 종교'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는 이전까지 주요한 고소거리 가운데 하나였던 성전 모독죄(사도25,8; 24,6)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이란 주제가 거론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유다인들에게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으므로  교리상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경우였는데, 이것은 사도 바오로를 고소한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포함한 유다교 지도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신들이 오히려 난감한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부활했든지간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는 그 사실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비록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과 동일한 수법(루카23,4.14)으로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하시켜 사도 바오로를 죽이고자 했지만, 총독 페스투스는 이 문제가 단순히 유다 내의 종교적 사안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 있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이 같은 대화는 세 차례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는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사랑하다) 동사가 쓰이는데, 베드로의 응답에서는 우애 또는 인간적 친밀함과 더 연결되는 ‘필레오’(사랑하다, 좋아하다, 친구가 되다) 동사가 쓰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는 예수님께서도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같은 단어로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높이를 맞추신 듯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과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다른가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연결되고, 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수님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는 것’에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을 보살피고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에서 완성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나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순교자들도 그것을 몸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신 구원자이시며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엘루페테-고통스러워)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지금 이 모습은 앞 9절에 예수님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아침, 곧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의 현장이다. 숯불이 있었던 그곳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모욕 받으시며 뺨을 맞으시며 수난 받으실 때, 그 예수님을 배반했던 현장을 연상케 한다.

 

(요한18,18.25) 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오.” 하며 부인하였다.

 

(마태26,74) 74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 그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믿지 못해 그분의 말씀, 길을 버리고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옛 모습, 옛 생활로 돌아섰던 베드로다. 그랬던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 무슨 배짱일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베드로의 고백을 받아 주신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 힘 있는, 강한 “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닌 (15절)"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16절)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17절)슬퍼하며 대답 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로 자신의 사랑을 주님께 슬쩍 떠넘기고 있다. 곧 자신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신의 사랑으로 배반자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무조건의 사랑으로, “베드로야! 너의 양들이 아닌 예수님의 당신의 양, 내 어린양들을 돌보라” 하신 것이다.

곧 ‘베드로야 너의 무력하고 차별적이며 변하는 사랑이 아닌, 차별적이지 않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어, 너(시몬)와 같은 죄인들이 용서로 하늘의 생명에 이르게 돌보라 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숯불 앞에서의 배반을 숯불 앞에서 회복시켜 주시는 용서, 사랑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아니 성경 전체 핵심 내용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주신 후 한 번도 시몬으로 부르신 적이 없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신다. 그것은 시몬이 어떻게 베드로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신 것이다.

 

(마태26,31-32) 3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예수님 수남)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 지금 갈릴래아 호수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로 목자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진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 흩어진 이들의 대장인 베드로에게 시몬이라 부르신 것이다.

 

그 시몬의 의미~

(창세49,5-7) 5 시메온(시몬)과 레위는 형제 그들의 칼은 폭행의 도구. 6 나는 그들의 모의에 끼지 않고 그들의 모임에 들지 않으리라. 그들은 격분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멋대로 소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 7 포악한 그들의 격분, 잔악한 그들의 분노는 저주를 받으라. 나 그들을 야곱에 갈라 놓으리라. 그들을 이스라엘에 *흩어 버리리라.

= 시메온과 레위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복수를 위해 하느님의 법(할례)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른 자기중심의 인본주의적 사고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아무 때나 다른 이에게 칼을 들 수 있는, 힘을 쓸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의 모형으로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것이 시메온 지파가 받은 하느님과 갈라진 소멸의 저주, 흩어짐이다.

 

(여호19,1) 1 두 번째로 시메온, 곧 씨족별로 나뉜 시메온 자손 지파를 위한 제비가 나왔다. 그들의 상속 재산은 *유다 자손들의 상속 재산 가운데에 있었다.

= 저주받은 시메온 지파가 유다 자손들의 상속 재산으로, 곧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들의 소멸, 흩어짐에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대속으로 갈라짐, 흩어짐에서 영서, 구원 받음을 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유다 지파의 후손과 시메온 지파의 시몬이 그 대책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몬, 곧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알겠니? 그 하느님의 뜻인 나의 구원의 일에 네가 무엇을 보탤 수고, 도와줄 수도 없지? 그러면 어떻게 해? 내 은총을 받아야지? 그리고 그 은혜의 사랑을 전해야지?’ 하시는 것이다.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 신앙생활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라5,16-17)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 육을 위한 신앙은 멸망, 곧 하늘의 생명에서 흩어짐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 베드로 자신이 원했던 길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진리로 따르라는 말씀이다.

 

(1요한2,17)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은총의 성령님! 당신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요한21,15~19)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15,16.17)

 

요한 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세 번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스'(agapas),'아가파스'(agapas),'필레이스'(phileis)라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philo),'필로'(philo),'필로'(philo)라고 대답한다.

 

이들 동사에서 첫번째와 두번째의 경우에 원형은 '아가파오'(agapao)이고,  세번째는 '필레오'(phileo)이다.

 

먼저 '필레오'(phileo)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자신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내지만,  '아가파오'(agapao)는 그러한 관계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이고 신적(神的)인 사랑이므로,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아가파오'(agapao)동사를 통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자신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드러내고 싶어 '필레오'(phileo)라는 동사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아가파오'(agapao)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서 이루어진 사랑처럼 가장 고귀한 사랑을 가리키는 반면에, '필레오'(phileo)는 인간적인 열정이나 애착 같은 일시적 사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가파오'(agapao)를 통해 고귀한 신적(神的) 사랑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필레오'(phileo)를 통해 계속 인간적인 사랑만을 고백하자, 결국 예수님께서도 17절에서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에 국한하여 '필레오'(phileo)로 물으셔서 베드로가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가지 차원의 접근에서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첫번째의 경우, 요한 복음 21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처럼  '필레오'(phileo)로 물으시고 베드로도 '필레오'(phileo)로 대답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뜨거운 사랑을 인정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베드로가  슬퍼했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이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의 경우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에 맞추어 주셔서 베드로가 슬퍼했다는 것도, 요한 복음 21장 15절과 16절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긍정하는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볼 때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엄밀히 따져 보면, 베드로가 슬퍼한 이유는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과거에 세 번 배반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은 신약 성경에서 대부분 '아가파오'(agapao)와 '필레오'(phileo)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친밀성을 드러내기 위해 혼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 3장 35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에서는 '아가파오'(agapao)가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 5장 20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에서는 '필레오'(phileo)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 번을 물으신 질문에서 어떤 용어가 사용되었는가보다는, 은 질문이 반복되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베드로를 당신이 도래시킨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수위권을 가진 사도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질 반석과 같은 교회의 수위권을 가진 사도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이다.

 

과거를 추궁하는데 중점이 이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네가 나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묻는 미래에 중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충성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베드로의 과거를 책망하실 수도 있고, 앞으로의 새로운 출발에 대한 당부도 하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모시고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20260522일 금요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신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경상도 남편을 둔 아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내가 평소에 사랑 표현에 인색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사랑해안 사랑해가 살았대. 그런데 안 사랑해가 죽고 말았대. 그럼 누가 남았게?” 

아내는 사랑해.”라는 말을 기대하였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니 뭐 잘못 무긋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사랑의 말은 상처를 낫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며 베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덮어 주시며 사랑의 실패를 치유하시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확장시키는 데로 나아가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뒤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이 따라옵니다(21,16-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이 그 안에만 갇히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를 넘고, 나의 공동체를 넘어서 심지어 나의 원수에게도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양들임을 발견하고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라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만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합시다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주님! 죄인( 罪人) 오라 하실 때 날 부르소서.

 

복음(요한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예수님께서 손수 지어주신 이름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신다. (시몬- 히브리어로 시메온이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할례를 자신들의 뜻, 원수를 갚는데 이용해(창세34,1-25) 하느님의 진노로 흩어짐의 저주를 받은 시메온 지파가(창세49,5-9)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속(代贖)으로 얻는 용서, 구원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첫 번째 인구 조사 때~

(민수1,23) 3 이렇게 시메온 지파에서 사열을 받은 이는 오만 구천삼백(59,300) 명이었다.

 

두 번 째 인구조사 때~

(민수26,14) 14 이것이 시메온의 씨족들로서, 이만 이천이백(22,200) 명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호19,1-9) 1 시메온, 곧 씨족별로 나뉜 시메온 자손 지파를 위한 제비가 나왔다. 그들의 상속 재산은 유다 자손들의 상속 재산 가운데에 있었다. 2 이렇게 하여 그들이 얻은 상속 재산은 브에르 세바, 세바, 몰라다, 3 하차르 수알, 발라, 에쳄, 4 엘톨랏, 프토르, 호르마, 5 치클락, 벳 마르카봇, 하차르 수사, 6 벳 르바옷, 사루헨, 이렇게 열세 성읍과 거기에 딸린 촌락들이다. 7 그리고 아인, 림몬, 에테르, 아산, 이렇게 네 성읍과 거기에 딸린 촌락들, 8 또 바알랏 브에르와 라맛 네겝까지 그 성읍들 주변에 있는 모든 촌락이다. 이것이 시메온 지파가 씨족별로 받은 상속 재산이다. 9 시메온 자손들의 상속 재산은 유다 자손들의 몫에서 떼어 낸 것이다. 유다 자손들의 몫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메온의 자손들이 *유다 자손들의 상속 재산 가운데에서 저희 *몫을 나누어 받았다.

= 하느님의 외 아드님이 육(肉)을 입으시고, 유다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인들의 죗값으로 당신 목숨을 십자가(十字架)에서 바치신, 너무나 큰 사랑으로 받은 상속(相續)재산, 곧 하늘의 영원한 용서, 거룩, 생명이다.

시메온, 시몬 베드로, 아니 모든 죄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만 존재 할 수 있다.(1코린8,6 참조)

 

15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예전처럼 큰 솔 치지 못하고 은근 슬쩍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며 예수님께 떠넘긴다. 왜? 자신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동안 자신만을 사랑한 ‘이기적 사랑’을 했었다는 것을, 자신에게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죽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사랑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장담했던 베드로다.(요한13,37) 그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코스’의 귀를 잘랐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여 기도하실 때, “옆에 앉아 있어다오, 깨어 있어다오” 하셨지만 그는 자고 있었다.

 

(마르14,41) 41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 그리고 우리가 알듯, 베드로는 시련이 닥치자, 곧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며 모욕적인 심판을 받으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철저히 배반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뵙고도 믿지 못해, 옛 생활로 돌아갔던 베드로다. (베드로는 믿는 모든 이들의 대표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 마음과는 달리 육신이 따라주지 않은 자신의 한계, 무능력을 체험한 베드로였기에,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 하신 그 말씀을 다 이루신, 그리고 “사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그 사랑의 주님께 떠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곧 말씀을 알았기에 할 수 있는 의탁의 맡김이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 하늘 가는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을 잃고 헤매는 주님의 양들에게 자신들의 죄로 목숨을 바치신 그 주님의 사랑을 주어 돌아오게, 곧  주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셨듯이 주님 안에 하나가 되도록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제의 가르침> 

완전한 하나 됨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아버지와 일치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끼리 일치는 불완전 하지만 완전하신 분 안에서의 일치(一致)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 인간에게는 없는 참 사랑을 주는 것이다. 차별적이고, 변하며, 무력한 그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영원한 생명, 구원의 진리로 주는 것이다. 사라질 목숨을 위해 사는 이들에게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 사랑의 돌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요한1,1.14)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사도20,32)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 신앙(信仰)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 곧 그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올바른 신앙의 길을 우리 스스로는 갈 수 없다. 육(肉)이 원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 받은 이들을 주님께서 손수 끌고 가신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하신 이유다.

즉 하느님의 영(靈), 그리스도의 영(靈)이신 성령께서 보호하시며 이끌고 가신다. 거기에 쓰이는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다. 우리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 기쁨과 슬픔, 시련을 통해 우리의 원의(願意), 길을 부인(否認)시키며 끌고 가신다.

 

(로마8,28-29)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 성모님께 기도하면 질병도 낮고,(묵주기도 9일기도 책에도) 재물 등, 집안일도 잘 풀린다고 전(傳)해 받았다. 성경(聖經) 말씀을 보니, 잘못된 예수님, 성모님을 전해 받았음을 알았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예전에 경기도 모처(某處)에서 묵주기도로 청하는 기도 모임이 있었다. 은사 받았다는 이의 지도(指導)로,~ 주님의 양들을 그렇게 돌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 모든 것은 사탄(마귀)이 약속한 것들이다.(루가4,6)

 

<하느님,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게 하시니 복된  순교자들의 피로 하느님의 교회를 비옥한 땅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게 하셨는데, 먼저 그리스도의 피(대속)만이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씨앗이 될 수 있고, 교회를 비옥하게, 곧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전에 나처럼 순교자의 피로 이 땅의 것이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는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하신 ‘빈말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마태6,7-8. 1-3) 모두 빛의 길이 아닌 어둠의 길로 떨어지게 하는 끔찍한 일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이 모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시편103,1-4)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눈 이 아름다운 대화는 교회에서 하느님 백성을 돌볼 직무와 권한을 받는 사람이 새겨들어야 하는 본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편 교회의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에서 되풀이되는 표현들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대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과 사랑합니다.’라는 답변,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당부가 세 번씩 되풀이됩니다(요한 21,15-17).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한 잘못을 기워 갚고 사랑을 회복하도록 세 번 당신께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 말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뜻하는 낱말을 쓰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좋아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답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아직 당신과 같은 사랑에 미치지 못함을 아시고 세 번째는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 좋아하는 마음을 뜻하는 낱말로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이렇게 불완전함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어 주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참된 사랑은 공동체를 돌보는 실천으로 드러나고, 베드로는 주님의 자비와 신뢰에 의지하여 양들을 돌보며응답할 것입니다.

교회 안의 직무를 맡는 데에는 관리 능력이나 재능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명을 주시고 나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21,19).

이제 그는 착한 목자의 삶과 죽음을 본받는 길로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도 삶에서 여러 차례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응답이 점점 더 진실해지기를 바라면서 충실히 주님을 따릅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마리아 기념일]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19,25-34)26.05.20조회 14[부활 제7주간 토요일]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21,20-25)26.05.18조회 15[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라” (요한21,15-19)26.05.18조회 10[부활 제7주간 목요일] 하나가 되게 (요한17,20-26)26.05.17조회 14[부활 제7주간 수요일] 하나가 되게 (요한17,11ㄷ-19)26.05.15조회 9[부활 제7주간 화요일] 영원한 생명이란 (요한17,1-11ㄴ)26.05.14조회 9[부활 제7주간 월요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16,29-33)26.05.13조회 10[부활 제6주간 토요일]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요한16,23ㄴ-28)26.05.10조회 27[부활 제6주간 금요일]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다 (요한16,20-23ㄱ)26.05.09조회 21[성 마티아 사도 축일]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9-17)26.05.09조회 26[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 (요한16,12-15)26.05.09조회 16[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를 보내겠다 (요한16,5-11)26.05.09조회 12[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이 증언 (요한15,26-16,4ㄱ)26.05.08조회 12[부활 제5주간 토요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요한15,18-21)26.05.05조회 13[부활 제5주간 금요일]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17)26.05.04조회 13[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15,9-11)26.05.04조회 14[부활 제5주간 수요일] 참 포도나무 (요한15,1-8)26.05.01조회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