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14일 목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9-17)
제1독서<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1,15-17.20-26)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화답송>시편113,1ㄴㄷ-2.3-4.5-6.7-8(◎8) ◎ 주님은 그를 당신 백성의 귀족들과 한자리에 앉히셨네.
○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
○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양받으소서. 주님은 모든 민족들 위에 높으시고,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
○ 누가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 같으랴? 드높은 곳에 좌정하신 분,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 ◎
○ 억눌린 이를 흙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귀족들과, 당신 백성의 귀족들과, 그를 한자리에 앉히시네. ◎
복음<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9-17)
예수님께서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제1독서 (사도1,15-17.20-26)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21~26)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승천으로 마감된다.
가리웃 사람 유다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사도의 후보로 오른 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 천거된 요셉과 마티아의 이름이 복음서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은 놀랍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마치 일지를 적는 것과 같이 있는 그대로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자신의 공동체에 꼭 필요한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이나 마티아는 그 동안에는 특별하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을 이야기 한다. 두 가지 조건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21~22).
바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교 역사상 단 일회적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가리옷 사람 유다를 대신할 사도에 선출되기 위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기존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사람을 사도로 선출하기 위하여 최대한 기존 사도들과 경험을 공유하며 예수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자를 사도로 뽑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 이라기보다는 충분조건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조건 밖에 충족시키기 못했음에도(1코린15,8)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에페1,1).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기적이나 치유를 포함한 여러가지 활동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을 고치고 가르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함께 하는 제자들로 하여금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제자들을 직접 현장 학습시키신 것이다. 본절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 사람들끼리 일상생활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히브리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신명28,6; 1사무29,6).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을 아는 정도가 아니고,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여 그분과 인격적 고통을 나누었던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거나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했다던가 아니면 교회안에 어떤 직책이나 감투를 쓰고 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과 개인적 묵상(기도)을 통해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일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가리웃 사람 유다를 대신하여 새롭게 사도의 일원이 된 사람의 사명이 명시되고 있다. 즉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 속에는 이미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난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신실한 선포자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바르사빠스'를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Bar)와 '안식일'이라는 뜻의 '사빠스'(Sabbath)의 합성어로 보면, 이것은 '안식일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가 태어난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유스투스'는 '의로운 자'란 뜻을 지닌 라틴식 이름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필요에 따라 히브리식 이름에 그리스식이나 라틴식 이름을 더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마티아'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니세포루스에 의하면, 그는 이디오피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마티아나 요셉은 모두 루카 복음 10장 1절에 나오는 70인의 예수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행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었다.
'기도하였다'로 번역된 '프로슉사메노이'(prosuksamenoi)동사의 주어가 3인칭 복수란 사실은 그들이 이 한가지 문제를 놓고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도를 충원하는 제비뽑기에 있어 단순히 사람의 뜻을 배제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서 기도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쉬 키리에 카르디오그노스타 판톤; sy kyrie, kardiognosta panton) 직역하면 '당신은, 주여,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이다.
여기서 2인칭 단수 대명사 '쉬'(sy)와 호격 '퀴리에'(kyrie; 주여), 그리고 '마음을 아시는'에 해당하는 남성 단수 호격 '카르디오그노스타'(kardiognosta)는 모두 하느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중복적 호칭을 사용한 사실을 통하여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에 있어서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물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본문은 하느님께서 요셉과 마티아의 마음속을 아시므로, 두 사람 중에 어떤 이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도로 더 적합한 사람인가를 아신다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서 시편 139장 13,14절에 나오는 대로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가 어떤 자인 줄을 아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주님께서 뽑으신'에 해당하는 '엑셀렉소'(ekselekso)의 원형은 예수님께서 처음에 12제자들을 택하신 경우를 묘사한 2절의 '그의 택하신'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 (ekseleksato)의 원형과 동일한 '에클레고마이'(eklegomai)이다.
이 단어의 변형들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마르코 복음13장 20절에서는 세말에 구원받을 '택하신' 백성에 대해, 루카복음 6장 13절에서는 산에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을 때에, 루카복음 9장 35절에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간택을 받은'자인 예수님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즉 '에클레고마이'는 구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단어이다.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일할 사도가 될 사람을 뽑으면서도 자신들의 판단에 의지하기보다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존하였음이 이 단어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리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사도행전 저자는 죄를 짓고 죽음을 택한 유다의 운명(제 갈 '곳')과 이제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도로 선출된 자의 '직무'를 동일한 단어인 '톤 토폰'(ton topon)을 사용해 공간적 이미지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비교의 효과를 높였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직무'라는 단어 대신에 '자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한편 후일에는 봉사와 사도의 직무 중에 봉사의 직무는 새로 만들어진 부제들에게 위임되었다(사도6,3.4). 그래서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사도직을, '직무'로 번역된 '디아코니아스'(diakonias)라는 용어 자체가 부제직을 가리키게 되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예수님을 은 삽심에 팔아넘기고 자살했던 유다의 최후에 대한 본문의 묘사는 매우 문학적이다.
'제 갈 곳'은 유다의 최후의 운명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대상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지옥이다. 둘째, 그가 죽은 장소이다. 셋째, 그가 예수를 버리고 배반한 행위 자체이다.
위의 견해들이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첫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왜냐하면 위의 세 가지 중에 어떤 경우를 택한다고 할지라도, 사탄의 사주를 받아 (요한13,27~30) 예수님을 판 자의 최종 도착지는 지옥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비를 뽑게 하니'
(에도칸 클레루스 아우토이스; edokan klerus autois; they gave forth their lots; they cast lots)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였다. 제비뽑기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방법이다(레위16,7~10; 1사무10,20).
23절을 보면, 당시 모인 120명의 사람이 요셉과 마티아를 추천했지만, 이렇게 추천하는 일은 그들의 주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21절과 22절의 조건에 부합된 사람을 고르는 객관적인 작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천한 두 사람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에 제비뽑기를 통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았으므로, 이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해진 것이다.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을 증거하는 일을 할 사람을 성자 하느님께서 친히 뽑으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뽑다'로 번역된 '에도칸'(edokan)의 원래 의미는 '주었다'(gave)이고, 좀더 문맥에 맞게 번역하자면 '던졌다'(drew)이다.
'그들에게'라는 뜻의 '아우토이스'는 번역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의미들을 살려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제비를 던졌다'이다.
본문의 의미가 120명 가량되는 무리가 두 사람을 위하여 제비를 던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스스로 제비를 던지게 하였다는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제비뽑기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표식을 그릇에 집어넣고 세게 흔들어서 튀어나온 것에 적힌 이름을 가진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다.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무조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교회가 천거하는 사람들이라면, 제비를 뽑아 어떤 사람이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는 제비뽑기가 행해지지 않았고,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도 이 방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앞뒤의 정황을 살펴보면, 신약시대의 제비뽑기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 사이의 공백기에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임시적으로 사용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의 제비뽑기의 방법을 오늘날의 모든 의사 결정에 항상 사용하여야 하는 절대적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은 유다의 자리를 마티아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마티아의 선출 이야기 외에 성경 어디에서도 마티아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복음서 밖에서도 그에 관한 전승은 매우 빈약하여 그가 어떻게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는지조차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배반자였던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뽑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생애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마티아 사도가 거론될 때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연스럽게 함께 떠올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연치 않게 다른 사람의 자리를 떠맡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임자가 훌륭할 경우 그의 위업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마티아 사도처럼 전임자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그의 흔적과 어두움을 지워 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간다면 어느새 과거는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현재의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지 않을까요?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봅시다.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설령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이며 턱없이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 자리에서 늘 충실하려고 노력할 때 그 자리는 어느새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 있고 또 앞으로 서게 될 모든 자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합시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 나아가 세상의 빛이요 희망으로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늘 아버지!
(사도1,15-17.20-26)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사람의 의견을 모아 뽑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맡겼다는 것이다. 12사도는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 12는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백성을 뜻한다. 하늘의 숫자 3과 땅의 숫자 4가 곱해져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그래서 시편의 예언대로 배반자(악마, 사탄) 유다 대신 다른 사람, 사도 마티아가 채워진 것이다.
(요한6,70) 7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
= 그런데 성경은 마티아가 무엇을 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마티아의 자리에 그 일을 한 이방인 사도 바오로가 들어가는 것이며(로마1,1참조) 이방인인 우리가 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묵시5,9-10참조) 그런데 12지파 가운데 마귀가 있었다. ‘단’지파다.
(창세49,17) 17 *단은 길가의 뱀 오솔길의 독사. 말 뒤꿈치를 물어 그 위에 탄 사람이 뒤로 떨어진다.
= 뱀, 독사, 그 마귀였던 단 지파 역시 묵시에서 빠지고 다른 지파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구약 민수기(1,1-)의 12지파와 묵시(7,5-8)의 12지파가 다르다. 묵시의 12지파에는 단 지파뿐만 아니라 벤야민 지파도 빠져있고, 민수기에 없던 레위지파와 요셉지파가 들어가 혼용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구약의 민족적 이스라엘이 아닌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로 이룬다는 것이다.
(로마9,6-7) 6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8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 이사악은 예수님을 모형 한다. 오늘날 12사도가 없듯 이스라엘에도 12지파가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이 자신이 어느 지파인지도 모른다. 남 유다도 AD70년에 로마에 의해 패망했다. 그리고 온 세상으로 흩어져 섞여 수백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새 사람이 된, 새 창조가 된 이들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나 그 잘못, 죄를 대속하시고 용서하신 십자가의 주님, 그 구원자께 끝내 돌아오지(회개) 않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지고 죽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또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길을 버린 교만의 죄이다.
그러나 유다와 같이(처럼) 마귀짓을 했던 베드로(마르14,66-72), 그리고 다른 제자들(마르10,37~) 그리고 사울(사도9,1~)은 예수님이 용서, 진리이심을 믿고 돌아왔다.(회개) 그것이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있는 것이며, 그 포도나무이신 예수께서 거저주시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먹고 이웃과 나누는 삶, 그것이 선이며 계명지킴이다.
(요한15,5.10)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 그런데 주님은 사울이 돌아오도록 그의 명예, 모든 스팩(SPAC, 명세서), 건강까지 뺏어 버리셨다. 아니 그의 그 모든 것이 구원의 헛된, 무용지물임을 깨닫게 하시어 스스로 버리게 하신 것이다.(필립3,3-11참조) 사울의 자기 의, 명예로는 하느님의 善, 義, 救援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우에 따라서 그런 경험을 하게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재산도, 건강도 잃어보게, 실패를 경험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시기, 질투, 미움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한 것이구나, 영원한 평화를 줄 수 없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러나 우리 혼가 겪게 하시지 않는다. 보호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아니 통과하게, 이기게 하신다.
그래서 영적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라와 하늘의 풍요를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이다. 묵시의 하느님 백성의 모습이다.
(묵시7,14-17)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17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천주의 성령님! 영의 신앙을 돌아서는 회개의 삶을 허락하소서 ~아멘!!!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복음 (요한15,9-17)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0~11)
요한복음 15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모델로 내세워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성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내세워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도록 촉구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 15장 10절에서도 앞서 9절에 있는 '~처럼'으로 번역되는 접속사 '카토스'(kathos)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계명 준수를 제자들의 계명 준수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생략해도 내용 전달에 지장이 없는 인칭 대명사 '내가'에 해당하는 '에고'(ego)를 사용하여 당신이 제자들의 삶의 모델이 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0절 후반절(새 성경; 원문은 전반절)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내 계명을 지키면'으로 나오듯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면'에 해당하는 '데레세테'(teresete; obey)의 원형 '테레오' (tereo)는 '준행하다', '유의하다'는 뜻을 전달한다. 이 단어가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샤마르'(shamar)의 역어로 나오는데, 주요한 뜻은 하느님의 명령이나 지혜의 명령들(1사무15,11; 잠언3,1) 에 대한 종교적인 준행을 말한다.
신약에서도 '테레오'(tereo)가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지키는 것(1테살5,23; 1티모5,22), 율법(야고2,10), 규정(마르7,9) 등을 가감없이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5장 10절은 모든 계명들을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수정해서는 안되고, 손상됨 없이 철저히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1절은 예수님께서 앞의 요한복음 15장 1~10절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한 교훈을 주신 목적이 제자들 안에 당신의 신적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임을 밝힌다.
그리스도와 일치한 자들의 삶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기쁨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웃음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대이며, 우울하고 침울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사람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데, 그중의 하나가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다(1테살5,16). 사도 바오로는 옥중에서도 찬미가를 불렀고(사도16,25),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도록 성도들에게 권했다(필리4,4).
기쁨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예수님과 일치한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열매들 중의 하나이다(갈라5,22).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지름길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의 삶을 얻게 된다. 이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기에, 예수님꼐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요한14,27)처럼, 이 기쁨도 예수님의 것, 즉 천상에 속한 것이며, 사람이나 세상의 어떤 것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이기에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이다.
2025년 05월 14일 수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죽음으로 빈 열두 사도의 자리를 채우고자 새로운 사도로 뽑힌 마티아 사도의 축일입니다.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양들을 돌보도록 그리스도께 위임받은 베드로가 사도들의 으뜸으로서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먼저 방향을 제시합니다.
배반자 유다를 대신하여 그의 직책을 넘겨받을 이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에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사도 1,23) 앞에 세웁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앞세우는 대신 모든 사람에게 추천을 받고, 거기에서 뽑히는 이가 형제들에게 존경받도록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하여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1,21-22)을 뽑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를 보고 알고 믿게 된 이 가운데 하나라야 자신들과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1,22)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뒤 모두 함께 기도하고 나서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힙니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이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하였습니다.
요즘 가톨릭 교회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는 ‘시노달리타스’입니다.
‘함께’라는 뜻의 그리스 말 ‘쉰’(syn)과 ‘길’이라는 뜻의 ‘호도스’(hodos)가 합해진 말입니다.
교회의 직무를 맡은 봉사자들과 믿음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 걸어가는 우리 교회의 여정, 아름답지요?
(김동희 모세 신부)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믿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 영원한 생명이다.
복음(요한15,9-17)-공동번역성서 사용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사랑하셔서 죄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십자가에서 죽이셨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부르셔서 당신 나라 완성에 동참시킨다는 것이다. 사랑하시기에..., 각자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히브12,5-6.10) 5 하느님께서 마치 자녀들에게 하시듯이 여러분에게 격려하신 말씀을 잊었읍니까?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에 낙심하지도 말아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10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 판단대로 우리를 견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며 우리를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훈육)하시는 것입니다.(~아멘)
= 믿는 것,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십자나무에서 대속으로 죽으신 것이 계명이다.(탈출15,25-26 참조) 믿는 것,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 그 인간들의 계명이 아니다.(티토1,14)
<노파심> 도덕과 윤리는 인간이면 반드시 지켜야할 땅의 질서, 규칙, 법이다.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을 뿐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충만) 하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계명(새 계약)에 순종하심으로 우리 죄(罪)값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더러웠던 우리가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의로운 자, 거룩한 자’가 되어 하늘의 생명을 얻었으니 우리의 기쁨이다.
(시편119,137-138.142-143) 137 야훼여, 당신은 공정하시며 당신의 결정은 언제나 옳사옵니다. 138 당신의 언약은 공정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사옵니다. 142 당신의 정의는 영원한 정의, 당신의 법은 언제나 진실(피스티스-믿음)됩니다. 143 우민과 억압에 짓눌려도 당신의 계명이 나를 기쁘게 하옵니다.
(집회6,31) 31 네가 지혜(예수)를 영광의 예복처럼 입을 것이요 빛나는 왕관처럼 머리에 쓸 것이다.
(잠언8,12) 12 나 지혜는 예지와 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 지식을 얻어 뜻을 세우려면 나에게 오라.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친구(벗)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그 ‘큰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시다.
(로마5,7-8) 7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증명) 주셨습니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 죄인인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친구로 여기시며 내 죄로 죽으신 그 사랑, 그 예수님을 믿고 이 고난의 삶속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여 살며 이웃과 그 예수님(사랑)을 나누는 것, 실천이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 하느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 하느님 나라에 백성(자녀)으로 인정하심 이다.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니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요한1,1-4)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 열매는 예수님께서 손수 뽑은 이들에게 당신이 맺게 하신다.
(요한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받은 열매를 지키고 간직하라는 말씀이다. 곧 생활 속에서 그 열매를 먹고, 살고, 나누라는 말씀이다. 열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다시 정리해 보자~ 하느님의 지혜, 힘(1코린1,24) 진리(요한14,6) 희망(1티모1,1) 안식(루가6,5) 평화(2테살3,16) 생명의 빛(요한1,4) 생명의 물(요한4,14) 등등....
곧 하늘의 쉼, 안식, 자유를 열매로 맺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예수-요한1,14)이다. 그 ‘예수님의 이름을 누리려면 말씀 안에 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8,31-32) 31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32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말씀하셨다.
=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서로 주고 나누라는 명령이시다. 그랬을 때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받은 진실된 용서와 사랑을 서로 줄 수 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마리아에게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고백을 받아 내셨듯이 저희들도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고백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6년 05월 14일 목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열한 명의 사도들은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제비뽑기로 뽑습니다. 제비뽑기는 오늘날 민주 사회의 선거 방식에 견주면 의아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출 방식은 성서적 전통으로 성경 안 다른 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여호 18,6; 1역대 24,5; 요나 1,7 참조).
이는 인간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결정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장면을 보니 신학생 때 본 드라마 “올 인”이 생각납니다. 한 도박사가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 큰돈을 벌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인을 찾아가며 사랑에 ‘올 인’을 하겠다는 독백을 남깁니다.
“세상을 살면서 인생을 걸 만한 승부는 많지만, 지금 나한테 소중한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올 인’! 지금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에 ‘올 인’을 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어떠한 보증도 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곧바로 고향을 떠납니다.
바오로 사도도 환시 속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보장된 미래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믿음에 ‘올 인’을 한 이들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에 인생을 걸지만, 이 세상이 끝날 때 그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승부에서 이길 것입니다.
몸소 우리 가운데 오시어 십자가 죽음까지 받아들이시는, 사랑에 ‘올 인’을 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