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05일 화요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14,27-31ㄱ)
제1독서<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사도.14,19-28)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화답송>시편145,10-11.12-13ㄱㄴ.21(◎12) ◎ 주님,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 내 입은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리라. 모든 육신은 그 거룩하신 이름 찬미하리라. 영영 세세에. ◎
복음<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14,27-31ㄱ)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14,19-28)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타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1~23)
데르베에서 사도 바오로는 큰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으며 또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사도 바오로가 핍박을 당했다거나 반대에 부딪혔다는 기사가 없고, 오직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가슴 벅찬 기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서 '제자로 삼고'로 번역된 '마테튜산테스'(matheteusantes)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태28,19)이 원활하게 수행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명령형이 사용되었으며, 본문의 '마테튜산테스'는 분사형으로 같은 단어이다.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데르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오게 하였을뿐 아니라 세례를 주고 말씀대로 살게 하였다는 사실까지 포함한다.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22)
'힘을 북돋아 주고'로 번역된 '에피스테리존테스'(episterizontes)의 원형 '에피스테리조'(episterizo)는 더욱 굳게 하고 강화하며 확실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사도행전에서만 4회 쓰였는데(사도15,32.41; 18,23),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의 신앙심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이 복음을 전해 얻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과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제자들의 신앙이 행여나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전 삶의 유혹으로 흔들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그들의 믿는 바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는 몇 마디의 격려보다는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22)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수받고 믿기 시작한 성도들에게도 닥쳤을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점점 증가하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버릴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믿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따르며, 그러한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극복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원수인 사탄과 그 졸개들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에페2,1), 불신자들은 다 그러한 세력의 종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마련이고, 성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환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거나, 그로 말미암아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환난이 두려워 신앙을 버리면, 하느님의 나라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7). 또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는 도무지 비교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8).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23)
사도 바오로 일행은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복음을 받은 지역의 제자들이 신앙 생활을 원활히 하며, 복음이 더욱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운 뒤 교회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교회의 구심점이 될 원로들을 임명한 것이다.
여기서 '임명하고'로 번역된 '케이로토네산테스'(cheirotonesantes)의 원형 '케이로토네오'(cheirotoneo)는 '손을 뻗는'을 뜻하는 '케이로토노스' (cheiroton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본래 '손을 내뻗어 투표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과 코린토 후서 8장 19절에만 쓰였으며, 모두 '택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한글 새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원로들을 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원어의 뜻에 의하면, 그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손을 들어 투표한 다음 사도 바오로나 바르나바가 뽑힌 그들을 원로로 세웠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이 '원로'에 해당하는 '프레스뷔테루스'(presbyterus)들을 세운 목적은 이방 지역의 한복판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적으로 잘 감독하고, 여러가지 환난과 핍박등 어려움 속에서도 신도들이 힘을 잃지 않고 든든히 서 가도록 위로와 격려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영적으로 암흑의 땅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의 밝은 빛이 지속적으로 비치는 교회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들이 믿게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3ㄷ)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새로 세워진 교회와 원로들을 주님께 의탁했다는 것은 그곳을 떠나면서 하느님께 그 교회들과 성도들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떠난 그곳 교회들은 외형적으로는 원로들을 통해 이끌어질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굳게 지켜 주실 것이다.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 곧 전쟁이 없는 상태나 힘의 균형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이 지극하신 아버지에게서 비롯하고,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물며, 그 뜻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이기십니다.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기도문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드리는 “아침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의 이름과 그 뜻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봉헌 기도’를 바치며 비록 저희에게 허물과 부족함이 많지만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살고자 다짐합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권능과 영광, 지혜와 굳셈이 있사오니,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전능하신 하느님, 오늘도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달라 청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길을 걷는 여정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만나고 또한 세상에 그 평화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땅에서 하늘의 평화를 사는 사람들
(요한14,27-31ㄱ)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세상의 것(돈, 건강, 명예)으로 얻는 평화, 곧 육의 만족(편안함)을 위한 신앙을 사는 이들에게는 오늘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산란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겠다는 평화는 뭘까? 물론 주님의 대속, 그 십자가가 주는 죄의 용서, 의로움, 자유, 곧 하늘의 평화다.
(로마5,1) 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 주님의 十字架가주는 平和를 깨닫게 되면 어제 필리피서 에서 묵상했듯, 세상이 약속한 평화의 실체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 세상의 것에 가치를 否認함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주님과 함께할 때 누릴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 힘이 없다.
(요한14,16.18)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사도14,26-27)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 우리의 믿음의 신앙은 하느님의 은혜(은총)로 이루어진다.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 사랑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뜻, 생각을 존중하며 믿고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죄인들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러 오신 주님이시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속죄 제물로)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마태20,18-19)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요한6,38-39)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그러니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죄인들은 기뻐하라는 말씀이시다. 위대하신 하느님의 위대한 恩惠의 구원의 약속이신 것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 인간들에 의해서 가 아닌 하느님의 위대하신 은혜(은총), 그 구원의 계획에 의한 죽으심을 밝히신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주님의 명령(계명)을 지켜야 한다.
(요한14,21)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 지키는 것- 행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지키다(킵)- ‘밖으로 흘리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는 것’(1코린15,1-2 야고1,25참조)
*킵(간직)해야 할 주님의 계명~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주님의 십자가의 길이 생명, 구원의 진리임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진리의 말씀(계명)을 되새기며 의탁하는 삶. (하느님의 말씀, 계명은 모두 사랑이다) 그래서 거짓계명, 거짓진리에 참 진리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것, 그래서 이웃과 함께 그 진의의 말씀(계명), 그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지키는(킵)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쓴물)들을 위해 주셨던 계명 또한 나무 하나의 희생, 곧 십자 나무였다. 쓴물에 나무가 빠지는 그 희생으로 단물이 되게 하는 나무 하나, 곧 죄인들을 의인으로 살리는 대속의 십자나무다.
(탈출15,25)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 그런데 왜 나무가 하나일까? 대속의 십자가, 그 진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로마6,6)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갈라5,24)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그러나 육적인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어리석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코린1,23) 그래서 믿는 이들을 박해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지키지(킵) 못한다.
(갈라6,11-12) 11 보십시오, 내가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여러분에게 씁니다. 12 *겉으로만 좋게 보이려고 하는 자들, 그자들이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그리하는 것입니다.
= 할례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나, 율법의 행위 곧 제사와 윤리 지킴의 겉으로 드러나는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이다. 그들의 의, 열성에는 구원이 없기에 사도는 기도한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사랑)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먼저 십자가가 주는 하늘의 의로움을 깨달아(찾아)라 한다(마태6,33) 예수님께서 버리고 따르라 하셨던 그 자기부인(버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루가9,23)
(에페3,19)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천주의 성령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저희가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생명(사랑, 평화)을 믿게 해 주소서 ~아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요한14,27~31ㄱ)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7)
요한복음 14장 27절과 28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이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내는 일이 없어야 할 이유를 밝히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기 때문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평화를 내가 너희에게 가게 한다'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즉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선물이다.
여기서 '남기고 간다'로 번역된 '아피에미'(aphiemi; I leave)는 '남기다', '가게 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누리는 평화를 주시는 주체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나 권력을 가진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이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완전한 평화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상의 평화이며, 영적인 평화이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맛볼 수 없고, 막강한 정치 권력자나 군사력을 동원해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다. '평화를'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 peace)은 '에이레네'(eirene)의 단수 목적격이다.
고전 희랍어에서는 이 단어가 전쟁과 대립적인 개념,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기인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역어로 나오는데, '샬롬'은 전쟁에 반대되는 상태라기보다는, 불안이나 갈등이 없는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이같은 평화는 주님에게서만 나오며,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기드온이 자신이 주님을 위해 쌓은 제단의 이름을 '예호와 샬롬'
말하자면, '예호와 샬롬'은 '주님의 평화'라는 뜻이며, 악(惡)이 득세하는 상황 가운데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소망의 의미가 있으며, 이 문제의 해답과 열쇠가 주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도 어떠한 분쟁이나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절대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믿는 이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동안에(2티모 2,3.4) 분쟁과 문제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도 많은 분쟁에 휩싸이셨고, 심각한 문제들을 만나셨다. 하지만 어떤 분쟁이나 문제들도 주님의 길을 막지 못했으며, 그분께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화이며, 최악의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굳건한 믿음의 모습이다.
감옥 속의 베드로(사도12,6.7)나 바오로(사도16,25)가 보여 준 태도에서 이 평화의 실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2026년 05월 05일 화요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우리나라 무속 신앙에서는 무당이 될 사람에게 ‘신이 내린다.’고 합니다. 이른바 신 내림을 받으면 삶을 제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자신에게 내린 신의 뜻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름 신이 내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는 까닭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충동이 나를 지배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사게 되고, 술과 도박 등을 하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물질, 권력, 폭력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들을 손에 쥐면 평화가 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우두머리가 와도 그는 당신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자가 아닌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신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평화는 성령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였습니까? 세상의 충동들은 평화가 아닌 분열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삶을 이끌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믿는 자들이여! 말씀 안에 머물러라, 자유케 하리라!
복음(요한14,27-31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같지 않았음을 몰랐었다. 주님을 따르면 세상이 주는 평화를 주는 줄 알았다. 세상 것을 위해 세례를 받았고, 미사 시간에도 세상의 평화를 주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누구보다 성사생활, 교회활동, 봉사 등, 열심을 부렸다. 보람도, 의미도 있고 뿌듯했다. 교우들과 즐겁고 재미도 있었다.
문제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시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 희망은 사라지고 실망으로 마음이 무겁고 산란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서 든지 기쁨과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 신앙의 힘이라 하셨는데 말이다.(1테살5,16-18)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그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렸기 때문이란 것을 말씀을 깨닫고서야 알았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부터 먼저 듣고 배워 그분의 뜻을 깨달아야 했다. 그 구원의 뜻은 모르고 내 뜻을 위한 종교 행위에 열심을 부리며 평화가 없는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기 전 사도들 처럼 내 뜻, 소원을 이루려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죄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짓이었다.(마르8,33) *죄(하마트리아- 과녁을 벗어나다) 그래서 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하신다. 세상의 평화를 추구했던, 그래서 좌절과 실망으로 산란했던 마음, 우리의 잘못된 모든 것, 죄를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인 십자가로 가져가시고 당신의 참 평화를 주고 가신다는 말씀이다.
(이사53,5)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아멘)
= 우리의 죄가 해결되어야 얻는 평화다. (어느 종교도 해결할 수 없는 죄(罪)다)
28ㄱ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 ‘피의 새 계약’을 다 이루시고, 곧 우리의 잘못, 죄로 죽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약속(요한14,18)하신 대로 구언, 진리의 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니~
28ㄴ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믿는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 일이 일어날 때,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자 제자들은 모두 실망과 두려움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주신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예전에 내가 그랬다. 말씀을 모르고, 믿지 못하니....
예수님의 뜻을 떠나, ‘가지 말라’고 하신 현상을 열심히 쫓아 다녔다.(성지순례, 각종 기도회 등) 그것이 잘하는, 열심한 ‘신앙인’의 모습인 줄 알았다. 모두가 말씀을 몰랐기에 헛된 시간(생명)을 낭비했던 것이다.
(마르13,21-23) 21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23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
(에페5,16-17)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 예수님은 세상에 맞아 죽으시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 계획하셨던 ‘구원자 그리스도의 일’이기에 일어나는 것임을 말씀하심이다. 그 말씀을 구원에 이르도록 말씀 안에 머무르는 방법, 길보다 레지오마리애 활동, 교회 각종단체 활동 등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신 역대 신부님들을 많이 원망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참으로 큰 어리석음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제를 주셨다기 보다 당신의 ‘말씀’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 <사제의 가르침>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하느님과 일치 안에서 누리는 평화란, 소유함으로서 누리게 되는 평화가 아닌, ‘버림과 포기와 비움’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소유의 삶’은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비움의 삶’은 평화를 동반합니다.
어떤 불안의 방해도 받지 않습니다. 비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소유)에게 의존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맞다, 좋은 말씀이다. 오늘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려 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우리 스스로는 못할 일이다. 그 모든 것, 말씀 안에 머물렀을 때, 말씀이 내 안에 계실 때 가능함이다.
(1테살2,13)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코린12,6 에페3,20 필리2,13 참조)
*말씀 안에 하늘의 평화, 주님의 평화가 들어 있음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은총이신 보호자 성령님!
주님의 평화가 있는 곳에 설 수 있도록 버림과 비움의 삶을 살 수있도록 늘 말씀 안에 머물게 하소서. 저희 모든이들 마음에, 발길에 함께 하소서. 의탁하오니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평화)가 아버지의 뜻(말씀)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