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23일 목요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요한6,44-51)
제1독서<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사도8,26-40)
26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길이다.”
27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28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29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30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물었다.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35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36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37 그러고 나서 수레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38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40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화답송>시편66,8-9.16-17.20(◎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찬양 노래 울려 퍼지게 하여라. 그분이 우리 영혼에 생명을 주시고, 우리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셨네. ◎
○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입으로 그분께 부르짖었으나, 내 혀 밑에는 찬미 노래 있었네. ◎
○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셨으니,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6,44-5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8,26~40)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26)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39)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26)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선교와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기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8장 4~25절에 이어,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부터 40절까지는 필리포스의 에티오피나 내시 선교 및 서부 해안 지역 선교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리포스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는 '주님의 천사' 즉 '앙겔로스 데 퀴리우'(anggellos de kyriu)는 누구인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의 천사' 혹은 '주님의 사자'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천사'를 네 번 언급한다.
즉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5,19), 필리포스에게 지시하는 주님의 천사(사도8,26), 감옥에서 베드로를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12,7~10), 헤로데를 내리친 주님의 천사(사도12,23)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님의 천사'는 다른 곳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과 다르다.
즉 사도행전 8장 29절과 39절에 다시 '성령','주님의 성령'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절의 '주님의 천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위해 도와주는 같은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등장하는 데는 특별한 선교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현재 사마리아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고, 계속해서 더 큰 선교의 역사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 혹은 '외딴길'이라고 일컬어지는 땅으로 보내지며,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리포스는 성령의 완전한 주관하심 가운데 그분에게 이끌려 이제까지의 복음 선교의 터전 사마리아를 떠나 아무 기약도 없어 보이는 광야로 가야 했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일어나 ~ 가거라'
'일어나'로 번역된 '아나스테티'(anastethi)의 원형 '아니스테미'(anistemi)는 신약 성경에서 108회 사용될 정도로 매우 자주 나타나며, 그 의미도 문맥에 따라 좌우된다.
본문에서는 '준비하라'(get ready)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여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는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사람에게 보다 적당한 명령이다(마르1,35). 따라서 필리포스가 이 명령을 듣게 된 상황이 잠자는 동안의 꿈속이나 환상이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본문의 두 단어는 시제가 서로 다르다. '일어나'는 부정(不定) 과거이며, '가거라'는 현재이다. 이것은 '일어나'동작은 일시적인 것이며, '가는 것' 즉 여행하는 것은 지속적인 일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필리포스의 복음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쉼없이 계속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제 주님의 천사는 필리포스의 행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 먼저 '남'(南)으로 번역된 '메셈브리안'(mesembrian)의 기본형 '메셈브리아' (mesembria)는 '중간의', '한가운데의'를 뜻하는 '메소스'(mesos)와 '날'을 뜻하는 '헤메라'(hemer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쪽'이라는 뜻과 함께 '한낮의'(midday), '정오쯤'(사도22,6)이란 의미도 있다.
따라서 '남쪽으로'로 번역된 '카타 메셈브리안'(kata mesembrian)는 '한낮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필리포스가 받은 지시가 매우 특이한 것이 된다. 그는 한낮에, 즉 따가운 햇볕아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벼려진 길을 가야만 했다.
또한 '외딴길'로 번역된 '에레모스'(eremos)도 '광야'나 '사막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길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버려진', '사람이 살지 않는'을 뜻하는 것으로서 '가자'(Gaza)지방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특히 사도행전 8장 36절의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를 참조할 때, '외딴길','황폐한 길'이 더 자연스럽게 보여 대다수 번역본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39)
필리포스의 선교와 세례의 집전은 '주님의 천사'(26절), '성령'(29절), '주님의 성령'(39절)의 지시와 인도하심으로 되어졌다.
즉 필리포스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그 전(全)과정에 있어서 성령 주도적이며, 성령이 세밀하신 간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잡아채듯 데려가셨다'에서 '잡아채듯 데려'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가?
원문상으로 볼 때 '헤르파센'(herpasen)는 '데려가다', '잡아채 가다'를 뜻하는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不定) 과거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4회 쓰이는데, '빼앗아 감'(요한10,28), '파괴의 위험에서 구함'(유다23절), '신속히 잡아 데려가는 것'(요한6,15; 사도23,10), '한 사람을 신비롭게 혹은 매우 빨리 다른 장소로 옮김' (묵시12,5; 2코린12,2.4; 1테살4,17)등을 의미한다.
특히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7절의 경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동사를 쓰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필리포스는 단순히 길을 인도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붙들림에 의해 다른 장소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사가가 사도행전 8장 39절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선교에 있어서는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적극적인 간섭,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에티오피아 내시는 자신에게 성경을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세례까지 준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자기 길을 갔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영적 기쁨이 그의 상황을 압도할 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내시는 자신의 바로 곁에서 복음을 제시하고 세례까지 베풀어 주던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 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영적 기쁨에 흠뻑 젖어 기쁨으로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또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신학교에 들어온 신학생들 또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로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형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사제가 되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라며 불평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일선 본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평과 험담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 나오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떻게 성체를 모실 수 있지?”
오늘 제1독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전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을 여기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이방인에게, 그것도 이방인 여왕을 섬기는 내시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 본문은 그 내시가 하느님을 경배하던 사람이었으며, 그에게 베풀어진 세례가 바로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교회 공동체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은 이들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결코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래서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몸소 선택하신 이들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주님은 나의 힘
(요한6,44-5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 죄의 대속 속죄 제물로 보내셨다.(요한3,16 마르10,45참조) *이끌어(휄퀴오)-어부가 그물에 잡힌 고기를 끌어올릴 때 사용되는 단어다. 물고기가 스스로 배 갑판에 올라올 수 없듯이 구원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이끄심에 의해서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처한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도 못하며 왜 구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한 전적인 타락 속에 처한 인간들에게 하느님이 찾아 오셔서 택한 백성들을 그물로 강제로 끌어 올리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
(로마3,10-12)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요한15,16)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 하느님의 말씀, 계명, 율법, 그 모두는 죄인들의 대속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이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끝(헬라어-텔로스, 멀리 있는 목표 히브리어- 토라,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키다) 예수님은 심판을 받아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속 하시고 그들을 건져 내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발동하여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왜 주님이 죽으셔야 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계속 교육하시고 설득 하셔야 했다. 인간은 절대 설득이나 교육으로 하느님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해 버렸기에 예수님께서 죽음(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성경 전체의 말씀이다(루가24,27.44 요한5,39 사도28,23 등)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 福音인 것이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 어제 ‘생명의 빵’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임을 묵상했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이집트를 탈출할 때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잠시 배는 불렀을지 몰라도 결국은 모두 죽었다. 주님은 먹고 죽을 만나 정도가 아니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빵’을 주시러 오신 분임을 또다시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나는 전에도 설명 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복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만나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느님의 은총, 은혜로 그들의 결핍과 굶주림이 해결되는 모양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은 이들이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하늘의 빵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인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죄인들은 절대 이 세상의 배부름에 의해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신명8,2-3)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만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몰라 다 죽었다는 것이다.
(묵시2,17) 17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 보호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성령의 귀로 들어 인간들의 말(뜻)에 넘어가지 않는 승리하는 이는 만나 안에 숨겨진 뜻, 곧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말씀)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신 흠도 티도 없는 돌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새 이름-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되는 것이다.
(요한1,12)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테크노)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갈라3,26)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휘오스)가 되었습니다.
= 테크노(혈연적 자녀), 휘스오(법적 자녀) 곧 혈연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만나, 성체를 하느님의 뜻, 말씀으로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받아들이면(먹으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 천주의 성령님! 오늘 미사 본기도처럼 저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깊이 깨달았으니 온갖 오류에서 벗어나 진리의 말씀을 더욱 충실히 따라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주실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당신 몸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실 것을 내비치셨다(마르10,45).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영적 지각력이 결핍된 유다인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다.
여기서 '내가 줄'에 해당하는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는 '나는', '내가'라는 뜻을 지닌 인칭 대명사 '에고'(ego)가 생략되어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강조 용법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51절 서두에 나오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에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나는~이다'의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가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복음 6장 51절 전체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유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모세보다 월등히 우월하심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느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신 것이다(히브3,5.6).
모세나 다른 어떤 사람도 하느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가지고 '에고 도소'(ego doso), 즉 '내가 준다'거나 '내가 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주인뿐이다.
여기서 '도소'(doso; will give)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시제로서 예고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진행적인 의미도 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은 예수님만이 지금 현재도 주시고, 앞으로도 주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즉 영혼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화해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사도4,12).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당신 자신의 살을 빵으로 비유하고,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예수님의 언급은 성만찬에서 빵을 나누는 의미와 같다(마태26,26).
요한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성체성사 제정 기사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 51절과 더불어 55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교훈으로 성체 성사 제정 기사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서와 중복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기록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수와 신비를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2026년 04월 23일 목요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작가 칼릴 지브란은 말합니다. “보여 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눈에 보이는 사건 너머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말대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 뒤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필리포스를 먼저 준비시켜 보내십니다.
내시가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주님께서 먼저 나를 선택하시고 이끌어 주셨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시작됩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홍해가 갈라졌지만, 그 일을 이루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실에서 도움을 받거나 바라는 일을 이루기 위한 신앙을 넘어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믿어서 삶이 변화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건이나 사람에게만 의지하고, 그 뒤에서 이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간적 한계와 실망 앞에서 믿음마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필리포스가 떠난 뒤에도 내시는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갑니다.”(사도 8,39). 사람에게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나를 이끄시는 분이 결국 하느님이심을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다시 살리시기 위해 부르시는 하느님!.
복음(요한6,44-5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 오늘 독서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그의 경우다. 성령께서 그에게 성경을 읽게 하셨고, 깨닫고, 믿도록, 또 ‘필리포스’를 보내시어 올바른 가르침을 주게 하셨다. 그래서 여왕의 내시가 세례를 청하고, 받았던 것이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세례로 받는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 예수님 당신이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이세상에 구원자, 곧 ‘대속의 속죄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 쓰시는 저주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사도8,32-33)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히브12,2) 2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진리)쪽에 앉으셨습니다.
= 예수의 십자가, 그 새 계약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진리, 생명이시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 ‘만나’도 하늘에서 내리셨는데....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만나는 예수님의 살, 몸의 모형(模型)이다. 곧 성령께 의탁해서 만나, 그 보이는 양식 안에 숨겨진 하늘의 생명인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시2,17) 17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믿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믿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 *흰 돌- 그리스도의 예수님(미태17,2) *새 이름- 새 생명, 새 계약의 그리스도, 모두 믿음으로 받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세례는 옛 계약인 율법과 육의 욕망인 세상의 힘을 끊어 버리고 새롭고 살아있는 구원의 길, 곧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하게 해 주는 그 피의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찾고, 믿는 것이다.
(1베드3,20-21)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방주, 배에 들어가 받는 구원이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행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분의 피로 더러운 양심이 깨끗이 씻겼음을 믿기 위한 것, 바른 양심을 청(請)하는 일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로 의롭게 된다.(로마4,25)
(히브9,14. 10,22) 9,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10,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페2,11-13) 11 이민족으로 태어난 여러분은 한때, 사람 손으로 몸에다 행하는 이른바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우리를 미리 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게, 영광스럽게 해 주셨음을 잊지않게, 놓치지 않게 늘 말씀 안에 머물게 하소서, 또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새 계약, 의)가 아버지의 뜻(영광)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