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18일 토요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호수 위를 걸으시다. (요한6,16-21)
제1독서<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사도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화답송>시편33,1-2.4-5.18-19(◎22)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복음<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요한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는 '투덜댐' 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특히 생계유지가 힘든 과부들 (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로 번역된 '엔 테 디아코니아 테 카테메리네' (en te diakonia te kathemerine)는 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 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제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의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는 '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 (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 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 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라고 따로 있다(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말씀 봉사와 구제 봉사는 직무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때는 저녁입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과 동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저녁은 빛이 적은 시간으로 사탄이 활동하는 때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호수 가운데에 배를 띄웠는데 바람까지 불어 배 안으로 물이 들이칠지 모르는 매우 위급한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과 동행하자 어느새 목적지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듯한 순간, 그분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 듯한 순간을 맞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현존, 곧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체험하는 순간 어두움 속 두려움은 사라지고 어느새 목적지에 이르러 있음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신앙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랑이 없는 고요한 길, 평안한 길, 꽃길만 걸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풍랑을 만나더라도 목적지까지 닿을 수 있는 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그로써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존재기 되는 것
(요한6,15-21)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공관복음- 마태오와 마르코는 기도하러 가셨다고 전한다. 혼자(모노스), ‘하나’라는 뜻과 ‘따로 구별하여’ 라는 뜻도함께 가지고 있다. 산으로 가심-세상과 떨어진 장소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마음가짐의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1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보내신다. 예수님을 세상의 빵을 위한 임금으로 억지로 삼으려 했던 그 세상 사람들과 분리를 위하여, 또한 무엇인가를 가르치실, 교훈하시기 위해서이다.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 큰 바람(아네모 메갈로)- 태풍, 강풍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그 큰 바람 속으로 들려 보내신 것이다. 하늘의 비밀스런 구원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공관복음 모두 제자들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몰랐기 때문이다. 풍랑, 그 저주의 바다를 밟으시는, 곧 저주의 바다 같은 우리 인생의 고난(苦難)을 밟으시는 구원자 예수님을 알았다면(믿었다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나다(에고 에이미- 나는 있는 나) 하느님의 이름이시다.(탈출3,14)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 곧 ‘너희(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시는 것이다.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 어느새(유테오스- 즉시)- 동시(同時)의 개념이다. 가려던 곳- 하느님의 뜻인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곧 구원의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 나라에 즉시(卽時)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다는 의미(意味)다.
*성경은 오늘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새로운 탈출(파스카)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행복과 만족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평화의 당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폭풍(暴風)이라는 것이 사용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인생에 폭풍이 일어날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러한 폭풍을 허락하시는 것일 거야’ 하고 기대와 희망 속에서 받아 들려야지, ‘왜 나에게 이런 폭풍이 이러나는 거야’ 하고 원망의 화살을 날리면 인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祈禱)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힘 달라고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하셨습니다.(루가22,39)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들려주신 말씀이 나의 것(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와 내 안에서 활동하시려면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풍랑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나서, 그 저주의 물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 그 길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 할 줄 모르는 저희를 위해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시는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멘.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요한6,16-21)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19-20)
요한복음 6장 19절의 주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에 해당하는 '톤 이에순~ 기노메논' <ton Iesoun~ginomenon ; Jesus ~drawing(approaching)>은 '보고'에 해당하는 '테오루신'(theorousin; they saw) 동사의 목적절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보고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부분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든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둘 다 현재 분사로서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걸어'로 번역된 '페리파툰타'(peropatounta; walking)이고, 또 하나는 '오시는 것을'로 번역된 '기노메논'(ginomenon; drawing)이다.
'페리파툰타'(peripatounta)는 '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분사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walk around)이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돌아다니셨다면, 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 다니시는 곳이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바다, 즉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물 위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소리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노메논'(ginomenon)은 '기노마이'(ginomai)의 현재 분사인데, '가까운'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 '엥귀스'(enggys; nigh)와 함께 쓰일 때에 '~에 접근하다'는 의미가 된다.
파도가 높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마치 육지처럼 걸어서 배에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진행중인 모습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사가 가운데 사도요한만이 당시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육지에서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떨어진 곳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십이리쯤'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면 4.6~5.6km 정도이다.
당시 제자들이 건너려 했던 코스의 갈릴래아 호수의 폭이 8km쯤이었다고 본다면,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된다. 바로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한편, 요한복음 6장 20절의 '나다'로 번역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실 때에 사용하신 독특한 문구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이 진술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직접 나타내는 가장 순수하고도 완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요한9,26; 6,35.48.51; 8,12.28.58; 13,19; 14,6; 15,1.5; 18,37).
예수님께서는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대리자로 계시하신다.
또한, 이것은 구약의 '나는 ~이다'(탈출3,14)에서 온 것인데,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주님이시다.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 그 장본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불안감은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곤경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주었고, 제자들이 곤경과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2026년 04월 18일 토요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은 큰 바람을 만납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병행 구절을 보면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썼다.”(마르 6,48)라고 나옵니다.
역풍을 만난 배는 뜻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돕니다. 지친 몸, 어둠, 멈추지 않는 역풍, 보이지 않는 예수님 …….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과 공포에 점점 짓눌립니다.
제자들에게 닥친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역풍이 불고는 합니다.
언제나 상승할 것만 같다가도 롤러코스터를 타듯 한순간에 갑자기 뚝 떨어지는 때가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에도 깊고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오늘 복음을 떠올려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역풍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그들 가까이 오시고, 그분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을 건너가며 갖은 역풍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험난한 파도와 어둠이 우리를 끊임없이 뒤흔드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마음이 굳어지며, 받은 은총을 잊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풍랑과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걸어오십니다.
우리가 외면하거나 침묵한다 해도, 그분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는 그분께서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삶에서 뜻하지 않은 역풍을 겪을 때마다, 고통으로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인생의 배 안으로 언제든지 다가오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그리스도 예수님! 저의 주님이십니다.
독서(사도6,1-4)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하느님 말씀의 힘을 받지 못하는 신앙(信仰)은 인간의 힘이 들어가 차별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마태4,4)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복음(요한6,15-21)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땅의 양식을 하늘의 양식으로, 곧 당신의 생명으로 바꾸어주신 하느님의 뜻, 말씀을 깨닫지(먹지) 못하고 자신들의 배를 부르게 한 빵, 그 육(세상)의 빵으로 먹고 만족 했기에 예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왕으로 모시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가신 것이다. 그 예수님과 분리되었을 때의 상황, 모습을 본문의 제자들을 통해 보여주신다.
1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 왜?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 모든 인간은 고난이 없으면 예수님(뜻, 말씀)을 떠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신명8,2-3 히브12,5-6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 큰 바람이 일 때까지 가지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 들였고,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닿았다.
‘어느새’ - ‘유떼오스“- 즉시. 예수님을 배로 *받아들임이, 배와 제자들임이 배와 제자들이 가려던 목적지(目的地)에 도착하는 일과 동시의 개념(槪念)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제, 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야 한다. 곧 우리 인생의 방향키를 그분께 내 드려야(끌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진정한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마태오, 마르코 복음에 공히 기록되었다. 그러나 관점(觀點)이 조금 다르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육지(陸地)에 계시다가 풍랑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다가 오셔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것으로 기록 되었지만,
요한복음은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는 말은 있지만 제자들이 풍랑으로 두려워했다는 말도 없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셨다는 말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모셔 들이려고 하자 즉시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이 기적의 이야기를 맺고 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의 이야기를 통하여 단순히 풍랑에 밀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풍랑을 꾸짖고 그들을 구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이라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14,33-34)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마르6,51.53)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3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 보다시피,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 어느새’ ‘즉시’ 라는 말이 없다. 이 두 복음에는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고 잠잠케 하신 후에도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곧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즉시) 그들이 가려던 곳에 닿았다.’로 상징적인 표현과 단어들을 동원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生涯)를 가지고 각기 다른 대 주제하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차이를 보여준다.
만일 4복음서가 똑같은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같은 주제로 메시지를 전한다면 굳이 복음서가 4권(券)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4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각기 다른 주제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들이기에 네 권으로 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이러한 차이점을 볼 때, 마태오복음은 바다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그림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공포”에 초점을 두고 기록한 것이고,
마르코복음은 그 이야기에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그러한 믿음 없음에 대한 책망을 내리시는 예수님”을 그리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배가 가려 던 곳에 즉시 도착하는 그림을 통해 “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게 된다는 구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병이어(五餠二漁) 표징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 증거가~
(마르6,52)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 분명 제자들이 주님의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해진 이유가 그들이 주님께서 빵을 떼셨던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사건조차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은 두 사건이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도 역시 오병이어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만 말미암는 것“ 이라는 복음 말씀, 그 주제(主題)를 담고 있는 사건이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삶에 풍랑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구원 받은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풍랑은 있다. 이 세상은 풍랑이 이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묵시21,1) 1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풍랑)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풍랑(風浪)이 이는 이 세상에서 풍랑의 바다가 없는 새 하늘을 희망하며 살아야 한다, 살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 말은 우리의 인생의 ‘키’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이다. 곧 주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무를 때 가능(可能)하다.
사도(使徒) 바오로가 감옥에서 쓴 고백(告白)이다.~
(로마1,16)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늘을 희망하는 그 힘으로 살 수 있도록 늘 말씀 안에 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말씀)가 아버지의 뜻(말씀)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체험한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산으로 가십니다.
제자들도 저녁때가 되자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납니다.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지만 노를 저어 목적지로 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매우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가 역풍 속에 분투하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도 풍랑이 일고 파도가 출렁이는 밤 바다의 상황을 그대로 대면하시며 그 역풍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께서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트시어, 허둥대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이미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오늘 독서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할 때의 혼란을 묘사합니다.
공동체에 불평과 분열의 조짐이 발생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배에 예수님을 모시듯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사도들이 하여야 할 첫 번째 임무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늦은 밤, 낯선 길을 불안한 마음으로 걸어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멀리서 다가오는 정체 모를 형체가 주는 섬뜩한 공포가 무엇인지, 그러다 상대가 익숙한 목소리로 “나야.” 하고 말하여 올 때 드는 안심이 무엇인지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하심은 모든 상황을 돌려놓는, 그 자체로 평화이고 사랑인 완전한 구원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