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22일 수요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요한6,35-40)
제1독서<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화답송>시편66,1-3ㄱㄴ.4-5.6-7ㄱ(◎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
○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
○ 바다를 바꾸어 마른땅 만드시니, 사람들은 맨발로 건너갔네. 거기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기뻐하네. 그분은 영원히 권능으로 다스리신다. ◎
복음<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6,35-40)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8,1ㄴ-8)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3-4)
원문에 '사울'로 번역된 '사울로스'(Saulos)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회심하기 전 사울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모습을 강조하여 그 이후의 헌신적인 사울의 모습과 대조시키기 위한 기교적 표현이다.
여기서 '없애 버리려고'로 번역된 '엘뤼마이네토'(ellymaineto)는 '황폐하게 하다', '망하게 하다', '학대하다' 등으로 번역되는 '뤼마이노마이'(lymainomai)의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이다.
이 단어는 멧돼지가 밭에 들어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잠언 18장 9절에 '제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파괴자의 형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못쓰게 만들다', '철저히 파괴하다', 비유적으로 '사람을 망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사울은 매우 강렬한 기세로 그리스도교를 계속 핍박하려고 덤볐던 것이다. 사울의 의도는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는 것이었으며, 그 양상은 그리스도교를 짓밟고 못쓰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울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고 박해하여도,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결코 진멸되거나 말살되지 않았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역사 및 교회사를 통해 여실이 증명되고 있다.
한편, 사울이 박해의 대상으로 삼은 자는 '남자든 여자든'으로 표현된 '안드라스 카이 귀나이카스'(andras kai gynaikas)이다.
이것은 사울이 '남녀'를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는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표현인 동시에 당시 교회안에서의 여자의 비중도 매우 컸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 더 늘어났다.' (사도5,14)
당시 사회 관습으로 볼 때 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충만을 받은 여자들은 복음 전파나 교회안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4)
사도행전 8장 4절부터 13절까지는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복음이 두루 널리 퍼져서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사도행전 1장 8절의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대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게 되는 시발점이 기록된 구절이 바로 사도행전 8장 4절이다.
본문의 '흩어진 사람들' 즉 '핍박으로 흩어진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어떤 안전한 곳에 숨어 버린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다녔다고 말한다.
여기서 '흩어진 사람들'을 뜻하는 '디아스파렌테스'(diasparentes)의 원형 '디아스페이로'(diaspeiro)는 '분배'(distribution)를 의미하는 전치사 '디아' (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이로'(speiro)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원어적 뉘앙스로 볼 때, 이 흩어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서 마치 씨앗처럼 널리 퍼져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로 번역된 '디엘톤'(dielthon)은 '~을 통하여 다니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에르코마이'(dierchomai)의 부정(不定) 과거 복수(pl.)이다.
'디엘톤'은 '모든 곳으로 갔다'(went everywhere)와 '가는 곳마다' (wherever they went) 그리고 '주위를 다녔다'(went around)등으로 번역되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복음 선포를 암시하고 있다.
스테파노가 순교를 당하였고, 많은 그리스도교 남녀 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었는데도, 복음의 전파가 더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더욱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음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들이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더욱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필리1,14).
결코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박해와 핍박이 나쁜 것만이 아니며, 교회의 영혼인 성령께서는 박해를 통한 흩어짐을 통해 더 많은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살다가 겪게 되는 고통이나 핍박 때문에 실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그럴수록 더욱 더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부활 제3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초대 교회에 닥친 위기 상황을 전하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독서의 중간과 마지막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큰 위기와 어려움에 직면해 있던 교회 공동체가 그 위기를 또 다른 기회로 삼아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말씀을 듣게 된 고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이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시련과 위기 속에서 또 다른 기회와 희망을 찾아 나가고 있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과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걱정거리와 고민들, 때로는 삶을 흔들어 대는 문제와 어려움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통과 시련들은 어쩌면 그것을 통하여 참된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인지도 모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지혜를 청하고,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주어지고 있음을 굳게 믿으며, 우리 삶의 아픔과 고통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깊이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3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은 질기시다.
(요한6,35-40)
35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어제 하늘에서 내려온 빵(말씀-물)으로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를 묵상했습니다. 그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한 사람이 앞 4장 사마리아의 여인이다.
(요한4,13-14)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 이 물- 세상의 물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하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말씀은 살아 계시며 일하시기 때문이다.(히브4,12 1데살2,13)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시련, 사건들 속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주신다. 그런데 그 주님의 물(말씀)을 마신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자신(세상)의 물(말)을 버리는 부인(否認)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4,28-29)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 받아들임과 버림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는가? (다른 분의 묵상으로~) 그 사이에는 한 시간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세상적 목마름의 해갈만 관심을 갖고 있던 여인에게 갑자기 그녀에게 있었던 다섯 남편이야기를 하므로 여인의 수치스러운 실상을 폭로하신다.(그래야 살릴 수 있으니까)
그때 여인은 예수님의 의도대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비로소 자각했고 그에 대한 증거로 예수님께 “예언자”라 부른다. 그 여인은 그렇게 자신의 수치스럽고 더럽고 추악한 실체를 확인하고 자신의 인생 속에서 정말 해결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나오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생명수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인은 참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할 수 있는, 즉 세상의 물동이를 버린 여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죄에 물든 인간의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은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육신의 편안함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더러운 상태인지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기에 세상의 편안함이 아닌, 새 생명의 주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지경의 자신에게 엄청남 하늘의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 세상 창조 이전에 선택한 이들을 보내시는 것이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 이들은 본문 35절의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배부르고 행복의 근원을 삼는 이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라는 생수, 생명의 빵을 먹고 마신 이들은 이제 예수님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 된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세상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예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고민하고 추구하는 분투 속에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 하느님의 뜻을 실천 하려고 하늘의 왕좌의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그것도 죄인들을 살리시려 그들의 죄로 저주가 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시려(죽으시러) 오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처럼 내 힘으로 만들어 놓은 자리를 부인하며 그분의 길을 진리로 따라 걷는 것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아버지께서 선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이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에 실패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기쁜 복음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배반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실망하여 물고기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주님이 그를 포기 하셨던가? 교회를 박해하며 교인들을 잡아 죽음에 넘겼던 그 사울을 포기하셨던가 말이다. 그들이 돌아오도록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이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잘못 살내고 있다고 해서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끝까지 패서라도(시련, 단련) 구원하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그래서 사울이 바오로가 되어 전하는 말이~
(로마8,35.38-39)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아멘>
*사제 묵상글 중에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아먹은 만나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신명 8,3)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만나를 먹으며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지혜 16,26).
따라서 ‘생명의 빵’은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입니다.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 구원의 완전하심, 말씀을 깨닫고 믿게 하시어 기쁨의 삶을 살도록 힘을 주소서.~아멘!!!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요한6,35~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40)
요한복음 6장 40절은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한번 더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 복음 6장 39절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구원의 확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그 일에 함께 동참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목적이 선택 받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는, 부활을 통한 완전한 구원임을 밝히셨다.
하지만 요한복음 6장 40절은 예수님을 믿게 된 자의 구원의 확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의 선택이 예수님을 믿는 결과로 나타나며, 이것이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귀결됨을 나타내는, 반복을 통한 강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라는 문구는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성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정하셨는지 명확하게 알게 한다. 그것은 바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보고'에 해당하는 '호 테오론'(ho theoron; who see)은 '보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아무 의미 없이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요한12,45).
'테오론'(theoron)의 원형인 '테오레오'(theoreo)는 단순한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호라오'(horao)와 달리, '지각하다', '인식하다'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이 동사의 현재 분사인 '호 테오론' (ho theoron)은 인간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지 단순히 호기심으로 구경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각이나 인식 행위 자체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시 '믿음'이라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믿는 사람'에 해당하는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pisteuon eis auton; who believes in him)이 되어야 비로소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새 성경은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톤'(auton; him)이라는 대명사를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았는데, 믿음의 대상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번역하는 것이 좋다.
또한 '믿는 사람'에 해당하는 '피스튜온'(pisteuon)은 '피스튜오'(pisteuo)의 현재 분사로 동작의 계속 및 반복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하는 시제이다. 이것은 과거의 믿음이나 단절되는 믿음이 아니며, 계속적인 신뢰와 끊임없는 순종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예식에 따라 형식적으로 하는 신앙 고백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삶이라는 언어로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나타내는 것이 진실한 믿음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시는 사람은 모두 당신께 올 것이며(6,37 참조)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6,4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입교 예식을 시작하며 사제는 세례 받는 이와 다음의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 신앙을 청합니다. / 신앙이 그대에게 무엇을 줍니까? /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어서 사제는 다음과 같이 훈화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세례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의 목마름과 허기짐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온 삶으로, 곧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충만함과 행복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시간 안에서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생명의 빵’으로 오셨습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구약이 신약으로 열매 맺지 못하면 죽음이다.
복음(요한6,35-40)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 생명의 빵을 청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믿지 않는다.’ 하신다. 왜? 하늘의 생명의 빵(예수)으로 자신들의 뜻, 유익, 만족을 이루기 위해 청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이시다.
*(요한4,13-15)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땅의)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 (하늘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 여자가 주님의 물(말씀)을 청하기는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편안함, 만족을 위해 청하고 있다. 오늘 예수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만족(뜻)을 위해 따르는 그 속셈(실체)을 보라 하신다.
하늘의 생명의 물, 곧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계시다.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새 창조로 살리시는 구원의 일을 하신다.(히브4,12 1데살1.23 필리2,13 에페3,20 참조)
땅의 물, 인간의 뜻(만족)을 위한 말, 곧 세상의 지혜(힘)의 논리가 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믿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그 예수님을 보고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구원의 지혜(진리)이신 새 계약의 그리스도로는 믿지 못하는 것이다. (1코린1,21-25 참조)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믿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도 목 마르지도 않고 늘 하늘의 양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기억해 보자~
(요한3,16-17)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로마8,28-30)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새 창조, 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우리의 한 생애를 통해 모든 ‘희로애락’의 사건들을 통해 일하신다.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아들을 보고, 보이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창세 이전에 계셨던 그리스도로, 곧 하느님의 뜻인 구원의 지혜, 힘, 진리로 깨닫고 보는(호라우)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믿을 만한 것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동안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놓아지는 것을 말한다. 나를 만족하게 해주는 세상의 것들은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 가는 길에 가로막는 장애물(障碍物)이 될 뿐이다.
사제께서~ ① “우리 삶에서 내가 죽어야 하는 그 순간에, 죽으면 그 순간에는 죽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내 한 사람의 인내와 겸손함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경우가 많음을 체험합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나를 위해서 살고자 하면 하느님께서 죽이시지만......
② 내가 하느님 때문에 죽으면 하느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다. 스테파노가 주님의 품에 안기는 최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삶, 성체성사의 일상화가 바로 우리를 이러한 모습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하셨는데 앞①부분의 가르침이 너무 은혜롭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의미, 곧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십자가의 죽음, 그 피의 새 계약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성사생활이 일상화가 되면, 진실 된, 온전한 인내, 겸손, 자기 버림, 죽음이 나올 수 없다.
또한 하느님 때문에 죽을 수는 더더욱 없다. 그 생각 자체가 모순이다. 인간의 죽음이 하느님께 무슨 의미(유익)가 있다고.... (에제36,20-22 참조) 인본주의에서 나온 그릇된 생각이다. ‘그리스도교는 신본주의’다.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곧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이다.
새 계약의 예언(預言)~
(예레31,31) 31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성찬례에서~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성령(聖靈)의 증언~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히브10,15-19.22) 15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니,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그들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새 계약)을 넣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새 계약)을 새겨 주리라.” 17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아멘)
지금까지의 말씀을 모르고, 믿지 못하고 하는 고해성사에 충실하다 보면 율법(제사와 윤리), 십계명, 그 옛 계약에 묶여 “ 다 이루어졌다.” 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피의 새 계약’이 거저 주시는 하늘의 용서, 거룩, 의로움에 대한 믿음이 자랄 수가 없다. 잃어버릴 수, 놓칠 수 있다는 말이다. 구약(제사)을 신약(혼인잔치)으로 열매 맺지 못하면 죽음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옛 계약)가 아버지의 뜻(새 계약)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6년 04월 22일 수요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어느 누구도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고통이라도 그 의미와 열매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사람의 고통은 겉으로는 같아 보였지만, 한 사람에게는 절망과 저주, 다른 한 사람에게는 회개의 보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통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생명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저한 순종으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겪으신 고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십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요한 6,38).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6,39)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사람들과 가지는 관계 안에서, 자신을 거저 내주는 친교의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을 체험하지 못한 채, 영적 목마름 속에서 삶의 고통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도 하느님의 뜻에 하나 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생명을 구하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고자 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뜻에 내 마음을 온전히 일치시킬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