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27일 월요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착한 목자 (요한10,11-18)
제1독서<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11,1-18)
1 사도들과 유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3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4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5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
6 내가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피니, 이 세상의 네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7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8 나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0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습니다.
11 바로 그때에 세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다가와 섰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나에게 심부름 온 이들이었습니다.
12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13 그는 천사가 자기 집 안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14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화답송>시편42,2-3; 43(42),3.4(◎42,3ㄱㄴ) ◎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
○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비파 타며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
복음<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11,1-8)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4~15)
사도행전 1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할례받은 신자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함께 식사했다는데 대한,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 및 베드로의 변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의 계기가 된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까지 복음이 증거되며 교회가 확장되는 역동적인 역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안에서도, 이방인 선교의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이루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의 회심 사건과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다.
사실 이 사건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폐쇄적인 유대적인 전통을 깨뜨릴 뿐 아니라 이방안의 선교의 물꼬를 터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는 사도행전 10장 전체를 코르넬리우스의 회심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사도행전 11장 전반부의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다시 한번 베드로의 변론을 통해 이 사건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서도 이방인의 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이방인의 선교의 길이 더 환하게 열렸음을 보여 주려는, 역사가인 동시에 그 자신이 선교사이기도 한 사도행전 저자의 의도적인 기술이다.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4)
본절은 병행 구절인 사도행전 10장 30~33절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이 코르넬리우스가 베드로에게 전한 말이었음은 분명하다. 코르넬리우스가 천사로부터 받은 말을 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한 말인 것이다.
여기서 '너의 온 집안이'에 해당하는 ('파스 호 오이코스 수'; pas ho oikos su)는 '집의 거주자들', '한 집안 식구'라는 뜻이다. 즉 구원의 범위가 코르넬리우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 살고 있는 가족 모두에게 미칠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를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목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그 온 집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본절의 코르넬리우스의 이 진술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할례를 받은 후에야 구원에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러한 절차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본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15)
본문을 직역하면, '성령이 떨어졌다'(epepesen to pneuma to hagion; 에페페센 토 프뉴마 토 하기온; the Holy Spirit fell)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무거운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거나 덮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사도행전 10장 45절에서는 이것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본문의 '에페페센'(epepesen)은 성령의 주도적 역사를 더 강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성령께서 임하신 시기를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라고 언급했는데, 사도행전 10장 44절을 보면,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사도10,34) 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결과는 신령한 언어(방언)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 나타났는데, 이 표징은 베드로가 설교를 다 마치는 때에 맞추어 일어났을 것이다(사도10,46).
그러니까 본절인 사도행전 11장 15절은, 성령께서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될 때부터 각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의 심령과 영혼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도행전 10장 44절은 베드로의 설교 말미에 신령한 언어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써 성령 받은 사실이 외적 표징으로 나타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은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말해서 성령께서 유대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 부어진 것처럼, 이제 이방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도 부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카이사리아에서 있었던(사도10,1) 코르넬리우스 가정의 성령 강림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이란 표현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성령께서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예루살렘의 믿는 자들에게 말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행위가 전혀 비난 받을 것이 아님을 힘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제 잇속만 챙길 뿐 그들을 돌보지 않는 임금과 사제들을 ‘거짓 목자’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당신 양 떼를 찾아 돌보시겠다고, ‘착한 목자’를 세우시어 당신 백성을 구원하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예레 23,1-8; 에제 34; 즈카 10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된 ‘착한 목자’가 바로 당신이심을 밝히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우리의 진실한 관계가 참된 ‘앎’에서 시작되며, 그 앎은 성부와 성자 사이 일치의 관계만큼이나 구체적이고 생생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사랑한다고, 그분께 온 생을 걸어 희망한다고 말하는 믿음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은 복음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힘 있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목자들을 신뢰하며, 미사 참례에서 나아가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고 함께 나누면서 참목자이신 주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아는 만큼 믿게 되고, 아는 만큼 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종한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던 사도들과 유다계 신자들이 ‘한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모아들이시는 주님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목자 베드로가 있었고 또 그 목자의 말에 양들이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목자와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주님을 더 알아 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삯꾼과 도둑의 소리를 걸러 내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참으로 알아들으며, 영원한 천상 목장으로 향하는 그분의 사랑 받는 양 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1~12)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 11절과 동일한 '나는~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을 사용해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밝히셨는데, 여기서는 '착한 목자'로 밝히신다. 이것은 '양의 문'과 '착한 목자'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하는 '칼로스'(kalos; good)는 '도덕적으로 선한', 혹은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칭찬할 만한' 등의 의미를 전달한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목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윗은 주님을 가리켜서 '나의 목자'라고 하였다(시편23,1). 히브리어 '야훼로이'(yaheh roi)는 새 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라는 뜻인데, 70인역(LXX)은 이것과 다르게 '주님께서 나를 먹이신다'(kyrios poimainei me'; '퀴리오스 포이마이네이 메')로 번역했다.
'먹이신다'에 해당하는 '포이마이네이'(poimainei)는 '포이마이노'(poimaino)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이며, 목자의 직분을 잘 나타낸다. 말하자면, 양을 인도하고, 안내하고, 다스리며, 보호하고 양육하다는 뜻이 이 동사 안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이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주님께서 자신을 이처럼 계속적으로 돌보고 계심을 다윗은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너무나 유명한 시편 23장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 속에 담긴 목자의 의미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에 해당하는 '텐 프쉬켄 아우투 티테신'(ten psychen auteu tithesin; lays down his life; gives his life)는 능동형으로서,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오셨다(1요한2,2).
죄 중에 있는 인생들을 속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며, 많은 이들의 죄를 대속하는 몸값은 예수님 당신의 목숨이셨다(마르10,45). 예수님께서 의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불경한 자, 곧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으신 사실(로마5,6~8)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당신 목숨마저 양들을 위해서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된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점을 물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으며(마태23,4), 사람들을 모두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마태23,15).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었던 것이다(마태7,15). 오늘날도 역시 가장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을 수 있다.
사탄은 위장술의 대가이기 때문에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하며, 사탄의 졸개인 마귀들도 자기들을 의로움의 일꾼으로 꾸미는 특성이 있다(2코린11,13~15). 착한 목자와 같은 일꾼과 마귀의 일꾼을 분별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과연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삯꾼'에 해당하는 '미스토토스'(misthotos; the hired hand)는 '고용하다', '일을 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미스토오'(mistho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주인이 아니라 돈 때문에 고용이 되어 일하는 사람이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품꾼'을 뜻하는 히브리어 '싸키르'(sakir)의 번역어로 나타난다(탈출12,45; 레위19,13 등).
이 사람들은 양들을 돌보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보수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참된 목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비록 외형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참된 목자는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질 물질에만 있기 때문이다.
'목자가 아니고'에 해당하는 '카이 우크 온 포이멘'(kai ouk on poimen; is not the shepherd)에서 '온'(on)은 '에이미'(eimi; is)의 현재 분사인데, 부정어 '우'('ou'; 모음 앞에서는 'ouk')가 분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강한 어조나 대조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목자가 아니라는 확실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또한 현재 시제가 진행 중의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앞으로도 도무지 목자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요한10,1; '도둑이며 강도다'; 로마2,21.22; 마태21,12.13; 마태23,16~19).
착한 목자들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양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자기 양처럼 여기고 보호한다. 하지만 삯꾼은 다르다. 그는 다만 품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어서 양들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은 주인 의식이 없기 때문에 양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오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보면'에 해당하는 '테오레이'(theorei; sees)는 '테오레오' (theoreo)의 단수 3인칭 현재 시제이며, '응시하다', '감지하다'는 기본적인 뜻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이것은 양을 노리는 이리가 접근하는 것을 현재 감지하고 있는 긴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양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 '이리'로 번역된 '뤼콘'(lykon; the wolf)의 원형 '뤼코스'(lykos)는 성경에서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 (마태10,16)고 말씀하신 것과,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감독들에게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와 양 떼를 해칠 것(사도20,29)에 대해 경고한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들의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제에브'(zeeb)의 번역어로 나오는데, '제에브'(zeeb)는 개과로 알려진 육식성 포유동물로서 혼자서, 혹은 떼를 지어 사냥을 하며, 용감하고 난폭하며 탐욕적이어서 보통 먹을 수 있는 분량 이상을 사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리가 접근한다는 것은 양들에게 위험이 임박했다는 징조인데, 이때 삯꾼은 양들의 안전을 지키려고 위험에 맞서는 대신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버리고 달아난다'에 해당하는 '아피에신~카이 퓨게이'(aphiesin ~kai pheugei; abandons~and run away)는 모두 단수 3인칭 현재 시제로서, 위험을 감지한 삯꾼이 취하는 약삭빠른 행동을 실감나게 보여 주며, 이 두 동사가 모두 현재 시제라는 점은 삯꾼들이 늘 이와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026년 04월 27일 월요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요한 10,11)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이처럼 ‘내주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사랑을 가장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둘 다 양 떼를 돌보는데 위험이 닥쳤을 때 한쪽은 자신을 내주고 희생하지만, 다른 한쪽은 자기를 지키는 데에만 급급합니다.
결국 차이는 ‘방향성’에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눈길과 마음은 언제나 양들을 향합니다.
그 반면 삯꾼의 관심은 자기 자신, 자기 몫과 손해 여부에 머무릅니다.
우리 안에서도 삯꾼의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듭니다. 신앙마저 나의 평안과 이익을 지키는 수단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내 선택과 관심은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열려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만을 향하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혼자 힘으로 완벽하게 되기를 요구하시지 않고 부족하더라도 ‘내주는 사랑’으로 한 걸음씩 옮기기를 바라십니다.
내 편의를 조금 양보하는 것, 내 시간을 조금 나누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내 것을 공동선을 위하여 기꺼이 내어놓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희생입니다.
이제 그분을 ‘안다’고 고백하는 우리도 그분을 닮아 ‘내줌과 희생의 가치’를 삶 안에서 조금씩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나만을 생각하는 삯꾼의 마음을 내려놓고, 착한 목자를 따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진정으로 ‘아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부활 제4주간월요일]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요한10,11-18)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예수님은 죽으시러 오셨다.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대속)을 바치러 왔다.
=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먹으시는 죽음, 구원의 진리이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갈라5,24) 24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 참 진리(예수)께 가지 못하도록 흩어 버리는 삯꾼이 본문 앞9장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이다. 태어나서 부터 소경, 곧 하늘의 생명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를 예수님께서 자비, 은총, 은혜로 고쳐 주셨다.
그 은총, 은혜를 받은 소경을 바리사이들이 제사와 윤리, 그 율법을 열심히 지킨 자신들의 착함, 자기 의로움이 참이라 고집하며 소경을, 곧 예수님의 은혜를 내 쫓아(흩어)버린 것이다. 그렇듯 많은 이들을 흩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율법을 사람이 다 지킬 수 있는 힘, 능력이 없기에 그 율법을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대속)으로 다 지켜내시고 그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움을 믿는 이들에게 거저 전가시켜주신 것이다. 그것이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 福音인 것이다.
(로마3,20-21.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 양(羊)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눈이 너무 나빠 앞에 가던 양과 조금만 떨어져도 쫓아가지 못해 길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주인의 목소리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단다. 실험을 해 봤는데 성대모사 잘하는 사람에게 주인의 옷을 입혀 양을 불렀는데 한 마리도 따라가지 않는다.
양은,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만 알아듣고 다시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목자가 돌봐주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양이다. 그 양(羊)을 우리에게 비유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죗값으로 죽어주신 그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이끄심)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가르침(과 사람의 말(가르침)과 어떤 것이 참 진리인지 분별을 못한다. 예수님의 진리의 길, 곧 십자가의 은혜로 거저 받는 의로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제사와 윤리의 신앙, 곧 사람의 의로움을 위한 길을 진리로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나무라시는 말씀을 에제키엘서 34장1-10절에서 말씀하시고 11-16절에 오늘의 착한목자(예수)의 말씀을 주셨다. 그중에~
(에제34,15-16)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 힘센 양을 버리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 힘, 곧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을 힘으로 갖고 있는 이들의 그 힘을 없애시어(부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慈悲), 공정이다.
(루가1,50-55)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 예수님 한 분만이 착한 목자라는 말씀이시다. 그분의 말씀, 곧 진리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예수님(진리)을 주는 일이 착한 일이다.
오늘 독서~
(사도4,9-12)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 예수님께만 목숨(생명)이 있다. 성경은 모든 이기 죄인이라고 곧 죽어있다고 하신다.(로마3,10~ 시편14,1-3 갈라3,8참조) 그러니까 인간은 죽을 수 있는 생명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만 죽으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명을 죄인들에게 주시기 위해, 즉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죽으시는 죽음이신 것이다.
*기억하자!
(요한1,4)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골로3,3)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의 성령님! 저희를 충만하게 하시어 온 땅에 하느님의 자비, 은혜의 말씀이 가득함을 보게 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진리로 따르는 삶을 살아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