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07일 목요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15,9-11)
제1독서<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사도15,7-21)
7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3 그들이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4 하느님께서 처음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모으시려고 어떻게 배려하셨는지, 시몬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5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18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9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1 사실 예로부터 각 고을에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봉독하며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화답송>시편96,1-2ㄱ.2ㄴ-3.10(◎3) ◎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
○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
복음<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1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사도15,7-21)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 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6-18)
야고보 사도는 구약 70인역(LXX)을 인용한 듯 보이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즉 70인역 성경의 아모스 9장 11절에는 '그 뒤에'라는 말이 없고, '그 날에'라는 표현이 있다.
아모스 9장 11절의 '그 날'은 단수로서 어느 한 날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메시아가 오시는 날 즉 심판과 구원의 날을 말한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그 날에'라고 하지 않고, '그 뒤에' 즉 '메타 타우타'(meta tauta; after this) 라고 하였다. 야고보 사도는 '그 날에'란 표현을, 메시아의 날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자가 미래의 날로 본 것으로 해석하여 '그 뒤에'라고 풀어 인용하므로, 큰 문제는 없다.
한편 '나는 돌아와'라는 구절도 아모스 9장 11절에는 없다.
여기에 해당하는 '아나스트렙소'(anastrepso)는 '내가 돌아올 것이다'(I will return)는 뜻으로서, 이미 버렸던 자들로 생각되었던 자들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를 바빌로니아에게 포로로 넘겨주심으로 버리셨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왔을 때에도, 왕도 허락하시지 않으셨고, 예수님이 강생하실 때까지 약 400여년 동안 예언자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여기서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은, 그 백성에게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아모 9,11-12)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16)
'무너진 다윗의 초막'에서 '초막'에 해당하는 '스케넨'(skenen)는 '성막'(tabernacle)이 아니라 '천막'(tent)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다윗의 초막이란 성전이나 성소가 아니라, 그가 통치하는 보좌를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오셔서 그 무너졌던 다윗의 보좌를 다시 짓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사항이 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사셨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에스케노센'(eskenosen)으로 '천막을 치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케노오'(skenoo)의 부정(不定;Indefinite) 과거형이다.
즉 무너진 다윗의 '스케네'(skene) 즉 '초막'(천막)을 다시 지을 분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스케노오', 즉 거하신(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정치적 왕권을 다시 세우는 분이 아니라, 영적 나라를 다시 세우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고(1사무13,14 ;사도13,22), 다윗이후 남부 유다에서 몇몇 왕이 그 길로 행하였으나(1열왕15,11), 거의 대부분의 왕들이 그 길로 행하지 않아,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는 하느님에 의해 심판을 받았고, 다윗의 정치적 왕국은 물론 그 영적나라까지도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즉 다윗처럼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끊겼던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심으로서, 영적인 의미에서의 다윗의 초막을 다시 세우셨다.
따라서 본 문구는 그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새로운 나라, 즉 신약 시대의 교회를 세우셨던 것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17)
본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아모스 9장 12절의 내용을 히브리어 마쏘라 텍스트가 아닌 희랍어 70인역(LXX)에서 인용한다.
마쏘라 텍스트와 70인역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차이점이 있다.
1)'에돔의 남은 자들'이 70인역에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그 남은 사람들)로 바뀌었다.
2)'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기업을 얻게 하리라)가 70인역에는 '주님을 찾게 되리라'로 바뀌었다.
3)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민족들(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이 소유하게 될 기업인데, 70인역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찾는 것으로 바뀌었다.
정리하면, 마쏘라 텍스트는 유대인이 중심이며, 메시아의 나라가 도래하면 그들이 이방인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반면에, 70인역은 이방인 중심이며 메시아의 나라가 도래하면 그들이 유대인의 하느님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그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바로 이방인 중심으로 말하는 70인역을 인용함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나머지 다른 사람들'(그 남은 사람들)은 구약의 '남은자'(the remant) 개념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구원에 대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인간의 패역무도와 죄악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신실한 소수의 의인을 남겨 두셨는데, 이런 자들이 바로 '남은자'이다.(2 열왕19,31 ; 이사37,32 ; 46,3 ; 에제31,7)
본문에서는, 유대인 가운데에서 남은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신 메시아를 알아 보고 환영한 세례자 요한이나, 안나, 시메온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대의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고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오신 메시아를 환영하며 찾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뿐 만이 아니라는데 본절의 강조점이 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0)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격인 야고보 사도가 할례와 율법 문제로 이방인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4가지 사항만을 이방인 신도들이 최소의 의무 조항으로 지키도록 제안한다.
이 4가지들은 모두 당시 유대인 신자들은 율법상 절대적으로 금하는 것인 동시에, 이방인 신도들은 관습적으로 죄책감없이 행하는 것들이었다.
먼저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오는 '알리스게마톤'(alisgemayon ; 더러운 것)이라는 단어인데, 이교의 우상에게 바치는 데 사용되던 고기와 같은 제물을 뜻한다.(사도15,29 ; 21,25 참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어떻게든 우상과 접촉함으로 그 우상을 숭배하게 되거나(묵시2,14.20), 그 제물을 먹음으로써 마음이 우상에게로 기울어질 수도 있는 관계로 금지되었다.
이방인들은 특별히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때일지라도, 연회나 축하연을 할 때 우상의 신전을 사용하는 일이 있었으며,그것이 자연스럽게 우상과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불륜'(음행 ;phorneias ;포르네이아스)역시 우상숭배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이교도의 우상 신전에는 흔히 신전 창기들이 있어서, 우상 숭배가 음행으로 연결되곤 했다.
그러나 본문의 불륜은, 신전에서의 음행 뿐 아니라 일상에서 행해지던 각종 음란과 성적 방종을 다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15,19 ; 1코린5,1)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목졸라 죽인'으로 번역된 '프닉투'(pniktu)의 원형 '프닉토스'(pniktos)는 피를 흘리지 않고 교살되어 질식해 죽임당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몰졸라 죽인 짐승을 멀리하라는 것은, 피가 빠지지 않은 고기를 그 피째 먹지 말라는 것이다. (창세 9,4 ; 레위17,10-14)
이는 구약 성경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엄격히 지켜오던 규례였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레위17,10-14)
한편 '멀리 하라고'로 번역된 '아페케스다이'(apechesthai)는 '억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페코'(apecho)의 부정사 현재형으로서 '늘 억제하도록'이라는 의미이다.
이상의 4가지는 이방인 신도들에게 강제적으로 금한 것은 아니다. 다만 유대인의 율법과 이방인의 관습이 완전히 조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서로간의 원활한 친교와 신앙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자제해 줄 것을 권면한 것이다.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어제에 이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의 ‘옛 계명’과 그리스도인들의 ‘새 계명’이 대조됩니다.
독서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새롭게 믿게 된 이들이 더 이상 유다인들의 외적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유다인들의 옛 전통과 율법을 완성할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율법의 준수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특별히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비유’(참포도나무와 가지)와 달리 갑자기 명령형이 사용되고 직접 화법으로 강조됩니다.
그리고 이때 쓰인 동사 ‘사랑하다’(‘아가파오’)는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의지적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죽는 것’,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저 가만히 멈춘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을 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때, 오히려 그 사랑은 온전히 살아나고 자신도 구원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만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실존하는 가장 큰 힘이며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려 주시고, 그 이유도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나보다 더 나를 아시는 분, 성령께서 보호자이시니 복이다.
독서(사도15,5-11)
5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 몇이 나서서, “그들(다른민족)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 할례(割禮), 오늘날의 세례(洗禮)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세례 받음의 행위가 아닌 새 창조, 그리스도의 피(대속)로 얻는 용서, 구원 그 새 계약으로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이 씻겨 거룩하게 되는 그 새 창조의 새 사람 됨이 중요한 것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필립3,3) 3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 7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음.(예레17,9) 그 불가능을 아시고 성령을 보호자로 주신 것이다.(창세8,21 이사6,45 마르7,21 로마3,10`참조)
*성령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사도2,38)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 회개(메타노이아) -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 곧 세상 힘의 원리의 생활 방식을 끊어버리고 하느님 진리의 길로 돌아서는 그 회개(悔改)의 세례다.
(사도14,15)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대속, 그 십자가의 길만이 진리임을 믿는 믿음이다. 곧 그분의 피로 얻는 용서, 거룩, 의로움, 생명임을 믿는 믿음이다.
(1코린6,11) 11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 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 멍에, 율법(제사와 윤리)의 열심, 곧 행위 신앙을 말한다. 그것은 믿음을 줄 수가 없어 주님의 자유를 주어야 할 신앙이 오히려 무거운 멍에, 짐이 되게 한다.
(마태11,28-29)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대속의 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갈라3,11) 11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3,20-21)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예수)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 구원(救援)- 하늘의 용서, 생명은 믿음으로 얻는 것, 율법의 그 우리의 열심(행위)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 새 계약)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 자기 의(義), 열심, 그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았기 때문에 말씀(로고스) 안에 하느님의 뜻(레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2코린3,15-16) 15 사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 모세의 율법, 곧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얻는 용서 의로움, 구원을 가리킨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로 풀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평화, 구원의 사랑, 계명(새 계약), 희망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루가24,26-27)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구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요한1,4.14)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페2,14)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티모1,1) 1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오로가,
= 믿음은 성경 전체에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보호자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깨달아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지, 인간의 열심한 행위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14,26)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깨닫게)하게 해 주실 것이다.
= 성령의 가르침으로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 희망, 구원의 계명, 새 계약, 그리고 사랑, 생명의 진리임을 깨달아 그분의 가지로 붙어 있으면(머물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充滿)해진다.
복음(요한15,9-11)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원수를 위한 대속, 그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이다. 좋아하는 이만 사랑하는 그 ‘인간의 사랑, 필포스’가 아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러야(알아야) 위선이 아닌 형제적 사랑이 나오고, 또 형제(이웃)가 나를 힘들게 할 때, 그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원수도 십자가로 용서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용서(容恕)인 것이고 사랑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다.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것이 하느님 진리(眞理)의 계명(誡命)이다. 그 계명을 지키는 것(킵- 밖으로 흘리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는 것) 마음에 간직해야 원수와 이웃에게 하느님의 사랑, 그 계명으로 용서와 사랑을 꺼내줄 수 있다.
(마태13,52)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마음)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 구약의 옛 계약(율법)을 신약에서 십자가의 대속, 그 새 계약으로 그리스도께서 용서, 구원을 완성하셨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아멘)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복(福)이신 당신으로 살게 하심에 감사하나이다.~아멘.!!!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복음(요한15,9~1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9)
요한 복음 15장 9절에는 두 가지의 사랑이 소개된다.
성부 하느님의 성자에 대한 사랑과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여기서 앞에 나오는 성부 하느님의 성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의 모델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처럼'으로 번역된 '카토스'(kathos; as)라는 비교를 나타내는 접속사에서 잘 드러난다. '카토스'(kathos)는 '마치~같이'로 번역되어 사랑의 방법을 나타낸다.
하지만, 때로는 '~만큼'으로 번역되어 양(量)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하고, '~인 까닭에'로 번역되어 이유를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복합적으로 다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과 동일한 방법, 그리고 동일한 정도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셨으므로, 성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느님 사이에 있는 신적(神的)인 사랑이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한 복음 15장 9절에서 두 번 사용된 '사랑하다'란 뜻의 동사 '아가파오'(agapao; have loved)나 '사랑'이란 뜻으로 한번 사용된 '아가페'(agape; love)가 모두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신적 사랑을 뜻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랑하다'는 동사가 이미 결정적이며 불변함을 암시하는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였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보여 준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뜻이다.
'내 사랑 안에'에 해당하는 '엔 테 아가페 테 에메'(en te agape te eme; in my love)에서 '내 사랑'은 실제 원문에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사랑'에 해당하는 '테 에메'(te eme)와 '그 사랑'에 해당하는 '테 아가페'(te agape)의 두 단어로 되어 있다.
이것은 소유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희랍어에서 소유의 뜻을 강조할 때에는 인칭 대명사의 소유격을 쓰는 대신에 '테 에메'(te eme)와 같은 소유 대명사 여격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소유하시고 있는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안에 머물러라고 명하신다.
여기서 '머물러라'로 번역된 '메이나테'(meinate; remain; continue)는 '메노'(meno)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머물러 있으라' 혹은 '살라'는 뜻이다.
또한 '메노'(meno)가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아마드'(amad)와 '쿰'(qum) 등의 역어로 주로 나오는데, 이것은 어떤 것의 존재 뿐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계속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뜻도 지닌다.
특히 '메노'(meno)가 하느님께 사용될 때에는 '지속하다', '불변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메노'(meno)와 더불어 신적(神的)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agape)가 쓰였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우선, 예수님의 사랑이 지닌 특성이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먼저 베푸는 사랑이다.
이것 뿐만 아니라 변함이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므로, 누구든지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이사55,1; 마태11,28; 로마2,11; 1코린1,26~31).
두번째는 우리가 얻은 구원이 지닌 영원한 효력이다.
예수님과 일치한 자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이러한 특권과 축복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가 영원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사랑의 관계도 또한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아가페'(agape)사랑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해나 조건이 전제되지 않는 것, 즉 이기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인 세상적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2026년 05월 07일 목요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어느 청년이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필’이 안 와서” 맞선을 거절하였다고요.
사랑은 ‘필’, 곧 느낌일까요? 느낌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시작되지만, 사랑을 지속하려면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였다가도 헤어지거나, 부부로 살면서도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10).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은 인내와 끈질긴 배움을 요구하지만 그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려면 끊임없이 연습을 되풀이해야 하지만, 한 번 멋지게 연주하고 나면 그 기쁨으로 연습의 고단함을 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배우고 익히며 성장해야 하는 예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긴 세월 함께 지내며 예술처럼 사랑을 가꾼 노년의 부부들은 아마도 이 기쁨을 알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는 사랑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례하며 이러한 사랑의 예술을 배웁니다.
오늘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사랑의 살과 피가 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복음(요한15,9-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 그동안 우리가 공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음이 계명 지킴이며, 사랑 안에 머무름이며 그로 받는 기쁨이다.
앞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포도나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번식한다.
하나는 커팅(cutting) 이라는 방법인데, 말 그대로 가지를 잘라서 땅에 그냥 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접목(椄木)’이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이미 포도원에 심겨져 있는 좋은 포도나무 줄기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둘 중에 첫 번째 방법이 많이 쓰이는 번식 방법이다. 그런데 굳이 접목을 하는 이유는 토양에 이미 잘 적용한 나무의 뿌리를 사용하여 좋은 품종의 나무를 키우기 위한 것이다.
다른 땅에서 가져온 나무는 옮겨 심으려는 땅에 기생하는 기생충에 무차별 폭격을 당할 소지가 아주 많다. 그래서 이미 그 땅의 기생충에 면역이 되어있는 좋은 나무에 새로운 나무를 접목을 시키면, 그 원래 나무의 뿌리와 줄기 덕택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는 절대 ‘하느님나라’라는 땅에 심겨져 제대로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렇게 무력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우리(가지)가 ‘하느님나라’라는 토양에서 무럭무럭 그 나라의 풍요를 먹으며 열매 맺기 위해서는 예수라는 하느님 나라의 토지에 뿌리를 굳게 박고 있는 그 줄기에 접목되어 지는 깃,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접붙임’ 이라는 식물의 번식방법을 예(例)로 들어 하느님의 구원, 은혜를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이상-
*이 세상 모든 만물, 자연의 순리는 하느님의 구원의 지혜, 약속, 힘인 사랑으로 지어졌음을 또 한번 절감한다.
(로마1,20)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 집 근처 숲길을 걷는다. 그럴 때 사랑이신 하느님, 그분의 품안에 있음을 느낀다. 그분의 쉼, 안식을 누린다. 오감으로 하느님을 느낀다. 그 힘으로 매일, 오늘을 산다. *나무(스타오로스-기둥, 계약)는 하느님 구원의 은총의 약속으로~ *개울물은 생명수. 말씀으로~ *바람은 옆에 보호자로, 늘 함께하시는 성령으로~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자기 비움, 자기 부인으로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 기쁨, 열매, 쉼을 살 수 있도록 늘 말씀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저희 모두의 마음에, 발길에 함께 하소서. 의탁하오니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부활 제5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하고 말씀하십니다. 곧 ‘나에게 사랑받아라, 내 사랑을 받아들여라, 나에게서 사랑을 배우라.’라는 말씀으로,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빨아 올려야 할 수액이 바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말의 뜻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머물고, 누군가를 받아들이며, 나아가 배움으로써 자신의 깊이와 넓이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뛰쳐나가고 싶어 합니다. 제 능력과 자기의 옳음을 어서 빨리 세상에 입증해 보이고 싶은 것이지요. 신학교에서, 그리고 여러 차례의 피정에서 제가 받은 최고의 유혹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묵상하며 무엇인가 조금 배우고 알게 되면 곧바로 그것을 가르치거나 강론으로 전하려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쉼 없이 설레하며 우쭐거렸습니다. 피정에서 큰 체험이나 깨달음이 있으면 그 뒤의 피정 시간을 망치기 일쑤였습니다. 당장 뛰쳐나가 저에게 주어진 깨달음과 은총이 얼마나 큰지, 그와 더불어 그런 은총을 받은 저의 대단함을 은근히 떠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기도하고 묵상하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기가 쉬운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 사랑 안에 충분히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의 겉절이가 아니라 김장김치가 되어야 합니다. 산뜻하고 풋풋한 겉절이도 좋지만 김장김치의 깊은 맛은 따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