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12일 화요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를 보내겠다 (요한16,5-11)
제1독서<주 예수님을 믿으시오.>(사도16,22-34)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화답송>시편138,1과 2ㄴ.2ㄱㄷ과 3.7ㄹ-8(◎7ㄹ) ◎ 주님, 당신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소서.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
○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
○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
복음<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16,5-1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16,22-34)
그 무렵 필리피의 군중들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22~24).
본문의 '군중'(호 오클로스; ho ochlos)은 귀신들렸던 여종의 주인과 한 통속이 되어 사도 바오로의 실라스에 대한 인종 차별적 자세와 종교적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다.
이들이 바오로와 실라스를 대항하여 함께 일어섰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를 죄인 취급하는 비난의 온갖 말들을 쏟아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행정관들'이라고 번역한 '스트라테고이'(strategoi)는 필리피라는 로마 식민지에 임명된 '행정 장관들'(magistrates)를 의미한다.
그들이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내린 판결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는 것이었다. 옷을 벗기고 때리면(마태27,28) 크고 두꺼운 막대기 매로 맞는 아픔이 더해지기 때문에 참으로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매로 치는'에 해당하는 '랍디제인'(rabdizein)은 부정사(不定詞)형이며, 그 원형 '랍디조'(rabdizo)는 '막대기','지팡이'를 뜻하는 '랍도스'(rabdos)에서 유래한 것으로 '태장으로 치다'(2코린11,25)라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생애에서 이러한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으며, 유다식의 형벌인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2코린11,24.25).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밝혔더라면 상황이 반전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털깎는 자 앞에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위해 한 마디 변론도 하지 않고 침묵했던 것과 같이 침묵했다.
사도 바오로가 이 때 자신의 신분에 대해 침묵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피할 수도 있는 고난을 받아들임으로써 필리피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받게 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23)
실제로 유다의 태형(신명25,3; 2코린11,24)이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때리는 제한이 있는 벌인 반면, 로마의 태형은 상관의 정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거의 무제한으로 때리는 형벌이었다(2코린11,23).
아마 이때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가혹하게 매질한 것은 민족적으로 멸시받던 유다인에게 가혹 행위를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동시에 사회 유력 인사였으며 재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소인들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24)
여기서 가장 깊은 감방은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 감옥을 말한다. 더욱이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워 놓았다. 차꼬(크실론; ksylon; stocks)는 죄수들의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다리를 벌리지 않으면 안되게끔 양 발목에 채우는 기구이다.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는 캄캄하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서 양 다리가 벌려져 묶인 채 마치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처럼 취급당했던 것이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25-26)
'자정 무렵'은 밤 12경을 말한다. 심한 매를 맞은 후의 고통과 발목에 채워진 차꼬의 고통으로 인하여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는 더 이상 잠을 못 이루고 그 시간에 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때 취한 행동은 고통에 대해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고통과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하느님께 분노했거나 원망했을 수도 있고, 또한 선교사로서의 회의와 좌절감에 빠졌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바오로와 실라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로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고통당했으므로, 하느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충분히 항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환난의 날에 간구할 때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부르며 그들의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했다(시편50,15; 91,15).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로마5,3),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며(필리4,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성교회안에서 대신 채우기를(콜로1,24) 주저하지 않았다.
'찬미가를 부르며'에 해당하는 '휨눈'(hymnun)는 미완료 과거 동사로서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가 하느님의 하느님되심을 찬양하기를 큰 지진이 날 때까지 계속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육체는 지하 깊은 감옥에 갇혔으나 그들의 영혼은 갇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부자유한 육체와 상관없이 위로부터 주시는 하느님의 영적 자유와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코린토 후서 4장 8절에 보면 이런 영적 권세에 대해 사도 바오로가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한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25)
차꼬에 채워진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의 기도와 찬미 소리는 주위의 죄수들에게까지 울려 퍼졌다. 본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로 번역된 '에페크로온토'(epekroonto)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유일하게 쓰인 동사인데, 이 동사의 원형 '에파크로아오마이'(epakroaomai)는 소리를 듣는 것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 '아쿠오'(akuo)와 달리 시낭송이나 노래 및 연주등을 '기쁘게 듣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특수한 동사이다.
죄수들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기도와 찬미 소리를 흥미를 가지고 기쁘게 듣고 있었다.
한편 곧이어 큰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의 기도와 찬미 소리를 듣고 있었던 그들은 한밤중에 큰 지진이 나고, 감옥의 기초가 움직이고,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리는 엄청난 사건을 바라보면서 그 기적이 바로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했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임을 즉각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 죄수들이 하느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의 기도와 찬미 자체가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권능을 행하심을 증거하는 믿음의 행위였다는 사실이 증거된 셈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찬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불신자들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적 행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26)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가 환난 중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미함으로써 거기에 뒤이어서 갑자기 초자연적인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인 큰 지진이 일어났고 (탈출19,18; 1열왕19,11; 이사29,6),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리며 감옥 문들이 다 열렸고, 모든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
여기에서 '뒤흔들리고', '열리고', '풀렸다'에 해당하는 동사들은 모두 다 수동태 동사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결단코 하느님을 의지하고 자기의 길을 맡기는 자들에게 실망을 주시지 않고 당신이 직접 나서서 그 모든 일을 이루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시편37,1).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지난 주일부터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일까요?
특별히 ‘죄’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이를 좀 더 뜻을 살려 번역하였습니다.
곧 “그분(성령)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동이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제 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그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실수와 잘못이라는 수렁 속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다.”라고 자책하며,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죄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내게는 영원히 책임져줄 보호자가 있다네♬
(요한16,5-11)
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 베드로와 토마스가 여쭈었었는데(요한13.장14장.) 그러나 그들이 ‘어디로 가십니까?’ 물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를 왜 가셔야 하는지 그 이유, 목적을 물어본 것이 아니라 기적과 능력의 스승께서 자신들에게 힘이 되어 주시지 않고, 자신들의 소원을 다 이루지 못했는데 떠나신다니 그것이 걱정이 되어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14,16.18) 16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의 보호자 역할을 하셨던 예수님께서 구원의 진리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다른 모습으로, 곧 우리를 뚫고 들어오실 영의 모습으로 다른 보호자 성령으로 오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위(上, 하늘)의 것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요한3,3)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로마8,9)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하느님의 뜻인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대속, 그 구원의 진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셔야,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셔야, 하느님 아버지께 가셔야 성령께서 그 십자가를 근거로 예수님을 진리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수 있는 것이다.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에,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뵙고도 믿음이 없었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후 그분을 받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성령을 받아야, 앞에 묵상한 성령의 법, 곧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생명, 새 계약과 다음 구절의 말씀을 믿을 수 있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 세상의 罪, 義, 審判, 곧 도덕과 윤리, 선악의 심판이 그릇된 것이라 하신다. 그 말씀은 세상의 관점, 사람의 자기 의로움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의로움을 개짐(똥걸레)이라 하시며 인정하지 않는다. 완전한 나라, 미움, 시기, 질투가 없는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의로움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 의로움은, 차별적이며 원수를 위해 죽어줄 수 없는, 순간적이며 한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의로움, 영광을 위한 삶, 신앙이 하느님의 뜻, 진리를 벗어난 죄, 불의인 것이다. (죄 -하마트리아- 과녁을 벗어나다.)
(요한5,44) 4 자기(사람)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로마10,3)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12,42-43) 42 사실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바리사이들 때문에 회당에서 내쫓길까 두려워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였다. 43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 요런 상태가 죄(罪)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로 받는 하늘의 의로움, 영광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구원의 진리이시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 예수님의 대속이 참 의로움이다. 원수를 위해 죽어 주시는 영원한 의로움이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셨다는 것은,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재물, 명예, 사랑, 의로움, 그 인간들의 것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이다. 그것이 이미 심판을 받았음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를 진리로 믿는 것이 용서, 생명이다.
우리의 사랑, 의로움으로 받는 구원이라면 그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러 오신 것이다.
지금까지 묵상했듯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우리가 행한 善, 의로움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또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다. 인간의 의로움은 기억하지 않으신단다.
(예제33,13) 13 내가 의인에게 반드시 살 것이라고 하였어도, 그가 자기의 의로움만 믿고 불의를 저지르면,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도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지 않고 사람이 자신의 의로움을 믿는 것이 불의(不義)다. 인간의 의로움은 구원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카운트가 안 된다는 말씀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 우리가 붙들고 가야 할 말씀이다.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가면 심판이다.
☨천주의 성령님! 영원한 보호자 되심에 감사 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복음(요한16,5~11)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7)
여기서 '진실을'에 해당하는 '텐 알레테이안'(ten aletheian; the truth)은 말과 관련하여 쓰이면, '참말을 하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그분의 말씀이 참이었음을 역사(歷史) 가운데 실제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 하셨다는 사실(사도2,1~4)과 그 이후에 제자들이 기쁨과 확신으로 충만한 삶을 지속했다는 사실(사도4,19.20; 5,41)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 '이롭다'에 해당하는 '쉼페레이'(sympherei; it is expendient; it is good)의 원형 '쉼페로'(symphero)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나르다'(to carry with others)는 뜻으로서, 편리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가시는 것이 왜 그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셔야만, 보호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함께 먹고 마시는 등 인간적인 정을 나눌 수 없는 성령께서 오시면 왜 제자들에게 유익한가?
그것은 첫째로,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의 지각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할 것이지만,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16,21.22; 17,22.23; 20,18~20; 사도2,14~36; 4,8~12참조).
둘째,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면 제자들은 홀로 남겨지게 되지만(마태14,23.24),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의 마음 속에 떠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동행하시기 때문에(요한14,17; 로마8,14)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유익하다.
세째,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업의 은혜를 적용시키는 분이 성령 하느님이시며 (사도2,38; 1코린12,3),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야만 가능하므로, 성령 강림이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들을 위해 왜 필요하고, 그 유익이 무엇인지 아직 깨닫지 못하는 상태였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호자를 보내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오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완성하신 구속 사업의 공로인 대속의 능력을 각 개인에게 나누어 주고, 적용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이롭다고 말씀하신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내가 가면'에 해당하는 '에안 데 포류토'(ean se poreutho; but if I go)에서 '포류토'(poreutho; go; depart)의 원형 '포류오마이'(poreupmai)는 기본적으로는 '가다', '여행하다'를 뜻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죽음으로 나아가다' 혹은 '죽다'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루카22,22).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위해 통과해야 할 관문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이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관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과 일치하여 예수님 안에서 죽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편, '보내겠다'에 해당하는 '펨프소'(pempso; I will send)의 원형 '펨포'(pempo)는 보내는 목적을 강조하는 동의어인 '아포스텔로'(apostello) 와는 달리, 보낸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강조하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다(사도2,1~4).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사도2,38.39).
성령께서는 높은 데서 와 입히우는 힘(루카 24,49)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언제든지 충분한 영적 능력을 유지하고,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약속일 뿐 아니라(요엘3,1~5) 명령이며(에페5,18), 우리가 청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주신다(루카11,13).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사도1,4.5).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쁘게 살고 역동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다.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증거가 되는 동시에 폭발적인 영적 능력의 근원이 된다.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보이시는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보이시지 않는 성령께서 오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이롭다고 하십니다.
오래전, 지금은 선종하신 신부님의 지도로 사제 연례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사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제 방이 신부님 방 근처여서 식당이나 성당, 강의실 등을 갈 때 여러 차례 신부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신부님은 벽면을 따라 찬찬히 걸으며 계단도 잘 오르내렸지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계단 개수나, 몇 보를 걸으면 통로가 오른쪽으로 꺾이고, 거기에서 몇 보 더 걸으면 당신 숙소라는 것들을 다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아닌 피부나 청각을 이용해서 날씨 변화 등을 느꼈지요.
창이 많은 복도 쪽을 걷노라면 “오늘은 햇볕이 좋네, 오늘 아침엔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가 보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눈은 정말 중요한 감각 기관이지만 거기에만 너무 의존하다 보면 다른 감각 기관들은 원활하게 쓰이지 못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떠난 뒤에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합니다.
함께 있을 때는 당연하게 여겨 잘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함께 있을 때보다 오히려 그의 ‘부재’ 때 그 사람의 참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하였던 이야기의 의미가 되새겨지거나 그와 나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는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고 하십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그리스도의 영, 성령, 영원한 보호자’로 함께하실 것이다.
복음(요한16,5-11)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등에게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 우리는 묻는가? ‘하느님의 외 아드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다가 돌아가셨는지. 그것을 알고, 믿는 것이 신앙의 목적’인데 ‘아무도 없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 소원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영(靈)의 생명(生命)이 아닌 육(肉)의 생존(生存)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요한1,9-11)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 들이지 않았다.
=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의 뜻,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백성(자녀)들, 곧 당신 친구(제자)들의 구원, 생명을 위해 그들의 죄(罪)로 목숨을 바치시려 대속(代贖)의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어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죽으심으로 아버지께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예수님의 기도>
(요한17,11) 11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사도의 감사>
(골로1,12-13) 12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골로1,20) 20 그분(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에페2,14)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내 영혼(靈魂)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 어떠한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믿게 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오셔서 영원한 보호자로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1코린6,19-20)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예수의 죽음)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그래서 성령(聖靈)을 청(請)하지 않는 것, 모르는 것, 믿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屬)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로마8,9-10)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면 절대 세상의 의(義), 죄(罪), 심판(審判)의 그릇됨을 알 수 없다. *그릇된(엘렝코-고소, 고발하다.) 세상과 함께 제자들 안에 남아있는 세상의 그릇됨을 고소(告訴), 고발(告發)하심이다. 왜? 세상에게는 영원한 죽음을, 제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 *죄(하마르티아-과녁을 벗어나다.) 피조물(被造物)인 인간(人間)이 창조 주 하느님의 숨(생명의 힘)을 의지하여 살지 않는 것이 죄(罪)이다.
(창세2,7) 7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생명(生命)을 주신 하느님의 뜻, 영광(榮光)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의 힘, 열심히 자신들의 뜻, 영광을 위해 사는 것, 과녁을 벗어난 죄(罪)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創造)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이사43,7참조)
그래서 아담처럼 선악을 스스로 판단해 자신의 뜻, 의(義), 영광(榮光)을 위해 ‘나쁜 짓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창세3,5참조)
(요한12,43) 43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 예수님께서 단신만이 ‘길이요 진리(眞理)’라 하신 말씀이 틀렸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죽였다면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셔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復活)하신 후 승천(昇天)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곧 그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이며 구원의 의로움이라는 말씀이신 것이고, ‘세상의 의(義)가 틀렸다. 그릇되다.’ 하시는 것이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로마3,24-25)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그러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으니 너희들이 착하게, 의롭게 사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시도를 전부 멈춰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이다.
사람이 의롭게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의(義)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사람의 의로움은 상황에 따라 변질(變質)되고, 차별적인 ‘완전한 의(義)’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聖靈)을 받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어울리는 삶을 위해 더욱더 진지(眞知)하게 살아가려고 노력(努力)하게 된다.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세상의 의(義), 죄(罪)가 성령의 (그릇됨을) 고소, 고발로 이미 세상의 힘인 우두머리가 그 심판(審判)을 받았음이다.
<소개> 자신의 노력과 열심히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그 힘의 축적을 통해서 자신의 뜻, 영광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그 삶이 틀렸음을 깨닫고, 자신의 가능성을 부인(否認)하고,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며 자신의 살 길을 세상의 힘을 축적하여 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십자가)만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믿는 믿음임을 알아서 겸손히 순종의 삶을 지향하는 것을 죄로부터 돌이킨 ‘회개의 삶’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順從)한다는 것은 내가 그동안 믿었던 모든 것을 기각(棄却)해 내는 것이다. 곧 이 세상에서 내가 믿고 의지하고 힘이라 여겼던 것들을 끊어내는, 부인(否認)하는 삶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敎會)에서 전부 그런 것들을 달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죄인(罪人)되게 해 주세요. 죄인(罪人)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그 죄(罪)에서 건져 주었더니 다시 돌아가겠다는 꼴이다.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저와 저희 모두의 귀와 마음을 열어 주시어, 말씀이 잉태되어 믿음으로 자라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 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6년 05월 12일 화요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참 난해합니다. 뚜렷한 줄거리도, 인과 관계도 없습니다.
제목도 그렇습니다. 대체로 ‘북촌 방향’이라고 하면 ‘북촌으로 향하는 방향’을 이야기할 터인데, 이 영화는 ‘북촌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방향만 있을 뿐이지요. 많은 현대인의 삶이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세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요한 16,5).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시는지는 여쭙지 않습니다. 방향만 있고 목적지는 없는 것이지요. 방향은 그 순간의 선택일 뿐입니다.
그러나 목적지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멀리 보고, 계획하며, 마침내 도달하려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만 느낄 뿐, 목적지는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16,7)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보호자 성령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로 이끄십니다.
성령의 바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정처 없이 세상의 바람을 따르는 이들과 다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당에 가기는 하지만 왜 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순간의 감정이나 순간의 욕구를 좇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 성령의 날개를 달고, 하느님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날아갑시다.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