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18일 월요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16,29-33)
제1독서<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사도19,1-8)
1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2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4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7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8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화답송>시편68,2-3.4와 5ㄱㄷ.6-7ㄱㄴ(◎33ㄱㄴ) ◎ 세상의 나라들아,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 하느님이 일어나시니 그분의 적들은 흩어지고, 원수들은 그 앞에서 도망치네. 연기가 흩날리듯 그들은 흩어지고, 불길에 밀초가 녹아내리듯, 악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사라져 가네. ◎
○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주님이시다. ◎
○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
복음<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29-33)
29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부활 제7주간 월요일독서 (사도19,1~8)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6~7)
'안수하자'로 번역된 '에피텐토스'(epithentos) ~케이라스(cheiras)'는 '손을 ~에 얹었다' (laid his hands on~ ; placed his hands on~)이라는 뜻이다.
사실 '안수'를 묘사하는 명사 '에피테시스'(epithesis)가 있으나(사도8,18), '에피텐토스'라는 동사의 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사도행전 저자 루카가 바오로의 안수 행위를 보다 역동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안수는 단순히 상대방에서 손을 얹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신적 축복을 빌며, 타인의 건강과 성령의 임재를 위해 행하는 기도이다(창세48,14; 민수27,18; 마태19,13).
바오로가 안수한 후, 이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사도19,5) 성령이 임하여 신령한 언어(방언)와 예언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학자들 마다 해석이 좀 다르다.
ⓛ 어떤 학자는 바오로의 안수가 직접적인 성령의 임재를 가져온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단지 세례 예식의 마지막 순서를 맡은 바오로의 순서가 끝날 때 이러한 역사가 나타났다고 본다. 아마 세례는 당시 에페소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아퀼라가 집행했고, 바오로는 세례를 마치는 마지막에 손을 얹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시행된 세례에 의해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지, 바오로의 안수에 의해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②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사도행전 8장 17절에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의 임재가 없는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을 받은 사건이 있다. 사마리아 신도들에게는 세례와 안수 사이에 분명히 시간적 공백이 있었고, 양자는 별개의 사건이었다.
이로 볼때,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사도의 안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바로 안수가 성령의 임재와 역사(役事)의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③ 어떤 학자들은 본절의 사건을 바오로의 제3차 선교 여행의 핵심지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 이후에, 아시아 지방을 향한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된 에페소 교회를 위한, 새로운 12제자를 세우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으로 본다.
12사람이 바오로를 도와 에페소 교회의 일꾼들이 되었고, 본절의 사건은 그들이 예언의 영을 소유하고 방언의 은사를 가진 에페소의 일꾼들을 만들기 위한 예외적 경우로 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성령 강림을 안수와 직접 연관시키기 보다는 성령 강림은 성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결과였고, 또한 이때 일어난 방언과 예언은 성령 임재의 가시적 표징이며, 이들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한 특별한 역사로 보는 것이다.
④ 아시아 지방을 향한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될 에페소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는 자리에서 12명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고, 따라서 세례와 안수를 사도 바오로가 모두 집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도행전 19장 5절에 세례받은 사건이 언급되고, 19장 6절에서 '그리고'(kai ; 카이)하면서 안수받은 사건을 병행하여 묘사한다. 따라서 사도행전 8장 17절에서처럼, 세례와 안수를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안수를 성령의 임재와 역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순수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바오로의 안수 직후, 사람들은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엘랄룬 (테)글롯사이스; elalun (te) glossais; they spoke in tongues) 예언도 했는데(에프로페튜온; epropheteuon; prophesied), 여기서 쓰인 두 개의 동사의 시제는 모두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다. 따라서 그들이 상당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령한 언어(방언)'으로 번역된 '글롯사이스'(glossais)의 원형 '글롯사'(glossa)는 '언어'(language)를 가리킨다. 코린토 전서에서 방언은 영적으로 깊은 무아경에 빠진 상태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땅의 언어가 아닌 천상의 말을 가리킨다.(1코린14,2.14),
코린토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하느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서 기도의 깊은 자리까지 내려가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과 업적을 찬양함으로써,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였다.
한편, '예언을 하였다'로 번역된 '에프로페튜온'의 원형 '프로페튜오'(propheteuo)는 '신탁' 또는 '감추어진 일들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예언에 대한 정의는, 성령께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대신 말하고, 신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에페소의 열 두 일꾼들에게 이러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교회의 봉사자로 사용하셨다.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달리 최후의 만찬 뒤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긴 담화를 전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가르침, 그분께서 남기신 유일한 계명, 성령에 대한 약속 등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수님의 이 말씀들에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16,18) 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제자들의 반응이 사뭇 다르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무지와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조차 결국에는 그분을 버리고 각자의 길로 떠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결국 헛된 것임을, 그저 마음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와 나약함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위로의 말도 함께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맞설지 모르지만, 그 세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기신 분을 우리가 따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부족하지만, 그래서 너무도 자주 무너져 내리는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외치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7주간 월요일]
하늘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自由다.
(요한16,29-33)
29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참조)
(1요한3,8)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 이 말씀을 믿는 것이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 제자들의 믿음은 말씀을 깨달은 믿음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떠나심이 당신께서 다른 보호자, 성령으로 오셔서 자신들의 영원한 보호자로,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줄, 그 기쁨이 뭔지 몰랐기에 다 도망을 갔던 것이다.
믿음은 육적 만족의 상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고난과 시련의 상태에서 말씀 안에 하느님의 용서, 구원의 약속을 의지했을 때 나타난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고, 그분의 가르치심으로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그 성령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기에 그들의 믿음은 일시적이며 무력하기에 도망간 것이다.
32ㄴ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닌 아버지만 계시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느님만 계시면 됩니다. 곧 하느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깨닫고 믿게 된다면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서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이니까.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예수님이 이기신 것은 세상의 죄(罪)와 의(義), 심판(審判)이 그릇됨을, 즉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대속하심을 이기시는 것이다. 그 이기심,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믿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의 뜻, 계명이니까. 그래서 그 주님의 승리를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하느님의 큰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1요한5,2-5)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1코린15,57)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 오늘 본문 16장 전체 내용을 요약해 보면 -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6) 그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로하시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7) 말씀하시고, 당신이 가셔야 성령이 오셔서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주신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이며(14) 그 일은 성도들의 근심과 고난으로 나타나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마지막 말씀으로 오늘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나 용기를 내어라” 로 끝을 내신다.
16장 1-3절까지 제자(聖徒)들의 고난, 환난에 관한 내용이었고 마지막 33절이 고난의 내용이다. 처음과 끝이 모두 성도(聖徒)들의 고난(苦難)에 관한 내용이다. 중간에 인쿠르지오(샌드위치 속)로 ‘성령 오심’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니 성령오심과 성도들의 고난과 근심이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곧 성령께서 어떤 힘으로 성도(제자)들이 겪게 될 근심과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것들을 기쁨과 평화로 바꾸어 내신다는 것이다.
(로마8,8-10)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십자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오늘 독서에서-
(사도19,6) 6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 우리는 어제 성령세례는 어떤 형식이나 예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묵상 했다. 그것은 지나가야 할, 넘어서야 할 초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1코린13,8)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히브6,1-3) 1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를 놓아두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다시 기초를 닦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기초는 곧 죽음의 행실에서 돌아서는 *회개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 2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입니다. 3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성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성숙이라는 것이다. 너무 쉬워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쉽고도 어렵다. 그 무상으로 주시는 성숙, 선물은 나를 버리는 그 자기부인, 비움으로 받는 것이기에 어렵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 신앙의 목적중 하나가 나를 버리는, 부인(否認)하는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예수님으로 받는 하늘의 용서, 생명,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의 삶(십자가)을 통해 날마다 드러나는 시기, 질투, 미움, 원망 등의 죄성(罪性)을 인정하는, 그리고 자신의 善, 義라는 것 또한 구원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는 자기부인으로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날마다 묵상하고 믿고 따랐을 때 받는다. 성령께서 그 모든 것을 증언하시기에 우리의 근심, 고난, 걱정이 날마다 기쁨으로 바뀌는 것이다.
(요한15,26)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성령의 가르침을 날마다 묵상했을 때, 우리의 근심이 날마다 기쁨으로 바뀐다. 기쁨- 육의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 자유, 그 안식(安息)이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가 당신을 바라나이다. ~아멘!!!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6,29~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평화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열매맺는 삶의 비결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때에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 속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평화를 얻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도 들어 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에게서 나오므로(요한14,27)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진정한 평화를 소유하지 못한다.
요한 복음 16장 33절의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에서 '얻게'에 해당하는 '에케테'(echete; have)는 '소유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코'(echo)의 현재 시제 가정법으로서 '계속해서 소유하다'는 뜻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듣고 준비하면, 마음을 동요시키는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며, 또한 평화를 계속해서 소유하는 이 축복을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만 약속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고난을 당할 때에 취해야할 태도와 그렇게 해야 할 근거를 말씀하신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에 있어서 '겪을'의 뜻으로 번역 된 '에케테'(echete; have)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 '원리'로 정해져 있는 격언적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무리들이기 때문이다(요한15,19; 17,14).
한편, '용기를 내어라', '담대하라'로 번역된 '타르세이테'(tharseite; take heart; be of good cheer)는 '타르세오'(tharseo)의 현재 명령형으로서 '계속해서 용기를 내라', '계속해서 무서워 하지 말라'는 뜻이다.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는 이같은 명령형이 '마음을 다시 먹으라'(take heart)는 뜻으로 흔하게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제자들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확실히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고, 아직 예수님을 위해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시 먹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러한 제자들의 내적인 상태를 잘 아셨기 때문이다(야고4,7참조).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서 '이겼다'로 번역된 '네니케카'(nenikeka; have overcome)는 '니카오'(nikao)의 완료 시제인데, 예수님께서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이미 이겼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어둠의 권세에 대한 승리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니카오'(nikao)는 '이기다', '정복하다'는 뜻인데, 신약에서는 언제나 영적 승리에 대해 사용되었고,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나차흐'(natsah)의 역어로 나타나 거의 독점적으로 적의를 가진 권세들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는 데에 쓰였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영적인 어둠의 권세인 이 세상 임금인 사탄(요한12,31; 16,11; 에페6,12)에게 승리하셨다는 의미이다.
[부활 제7주간 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책으로, 그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활동 또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힘 곧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그리스도를 알리는 활동을 담은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부름받은 바오로 사도의 활동이 사도행전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요.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서 제자들을 만나고, 그들이 성령을 받는 과정을 전하며 성령의 역할과 믿음의 성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줍니다.
바오로 사도와 제자들의 대화는, 회개의 표시인 요한의 세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령 안에 머무는 삶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의 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세례받는 우리를 성부와 성자께서 당신 안에서 결합하시는 그 친교와 거룩함과 생명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세례성사의 이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요한의 세례만 받은 에페소의 제자들처럼 세례를 한갓 종교적 관행으로만 여기고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며 그 능력의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느님의 겸손’이라고 부르실 만큼 성부와 성자 뒤에 숨어 계신 성령께서는 신앙인의 일상에서 대체로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활동하십니다.
신령한 언어 같은 성령의 특별한 선물을 받지 않더라도, 성령께서는 우리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 안에서 속삭이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처럼 성령의 협력자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복음(요한16,28-33)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아버지의 뜻으로 죄인(罪人)들의 구원을 위해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속(代贖)의 속죄(贖罪) 제물(祭物)로 죽으시고, 우리의 구원이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돌아가실 예수님이시다.
(골로1,21-22)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아멘)
(1티모3,16) 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예수)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분께서는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습니다.
29 그러자 제자들이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ㄱ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 앞에서 하신 성령에 관한 말씀을 알았다는 것이다.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께서 오시면(요한14,26)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며, 앞으로 올 일들을 가르치시고 알려주실 것(요한165,13)을 믿었다는 말이다.
30ㄴ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믿는다고?(의문으로 물으신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의 믿음이 그릇된 것임을 아셨다. 곧 자신들의 소원을 위한 능력의 말씀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ㄱ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제자들이, 능력이 없어 보이는 당신을 배반하며 떠나도, 아버지께서 함께(하나) 계시니 괜찮다 하신다. 그런데 그 하나 됨으로 당신을 배반한 제자들, 죄인들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 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아버지의 뜻과 주님의 뜻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으로 그 배반자, 원수,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의 죄값(罪價)으로 죽으러 오셨고, 죽으시는 것이기에 그 죄인들의 죄의 용서로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사랑하심이다. 영원한 사랑이시다.
(마르3,28-29)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 그러나 세상, 곧 믿음이 없는 이들은 그 말씀을 어리석음으로 보기에 그 말씀을 거부(拒否)하며 전하는 이들을 핍박(逼迫)한다. 그래서~
33ㄴ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구원(救援)은 무엇을 했는가? 로 받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되었는가?’ 로 받는 것이다. 우리는 담아야 할 ‘질그릇’ 이다. 우리 안에 위(上)에 것, 하늘의 말씀을 담아 하늘이 되어 받는다는 것이다.
(요한3,3.5-6)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 땅, 육(肉)에 하늘의 영(靈)을 담아야 존재(存在)가, 생명(生命)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 자녀로 구원(救援)받는 것이다. (요한1,9-14참조)
(요한1,13)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 사제께서 ‘안타깝다’ 하시면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마음에 평화를 얻으려고 성당에 다닌다.’고 말하고, 개신교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교회에 다닌다.’고 말한단다. 우리 모두 세례(洗禮) 받을 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해 놓고, 없어질, 사라질 세상이 주는 평화를 위해 신앙의 열심을 부리며 살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부분에서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세상이 과연 평화를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세상은 불안과 두려움에 갇히게 한다.
*다른 사제의 가르침 중~ * 세상의 평화란 힘의 논리와 이익의 논리에 의한 평화입니다. 나의 편이 아니면 적(敵)이라는 분리와 구분의 논리에 의한 평화입니다. 겉으로는 전쟁이 없고, 조용한 것처럼 보여도 언제 불안한, 균형이 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不安感)에서 긴장해야 하는 평화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봅니다. 불안한 균형이 깨어지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옵니다. 지진(地震)과 자연(自然)재해(災害)로 전쟁(戰爭)과 내전(內戰)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고, 다치고 있습니다. 국가(國家)간의 이해관계로, 새 정부의 시작과 함께 시작하는 북한(北韓)의 핵실험으로 남북(南北)간의 긴장상태는 더욱 고조(高調)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이 언제까지 지속(持續)될지 참으로 암담(暗澹)합니다.
그냥 바라 보고만 있는 것이 오히려, 이러한 와중(渦中)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고(事故)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희망이 없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
본 16장이 (요한16,1-2. 33) 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리고,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로 끝을 맺는데~
= 이 승리(勝利)의 말씀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기에, 또 성령(聖靈)의 이끄심을 믿지도, 의탁하지도 않기에, 세상(肉)의 것을 위해 스스로 온갖 행위의 열심을 불게 되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 모두 신자(信者)들의 고난(苦難)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智慧), 계시(啓示)의 영, 성령(聖靈)이라는 날개가 달린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개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늘을 향(向)해 날 수 있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하늘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곧 성령의 도우심, 이끄심으로 하늘의 것을 위해 열심히 날개 짓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도우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어떤 힘을 제공하여 우리들이 겪게 되는 근심(謹審)과 환난(患難)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것을 기쁨과 평화로 바꾸어 내신다는 것이다.
(2코린4,6-7)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 -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하느님의 지혜(智慧), 계시(啓示)를 깨닫고, 믿게 해 주실 성령(聖靈)이시다. (에페1,17-18)
(골로3,1)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진리)에 앉아 계십니다.
= 성도(聖徒)는 땅의 것을 기도(祈禱)로, 미사(Missa)로, 추구(追求)하며 열심을 부릴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깨달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하늘의 참 기쁨, 평화를 받는다. 그 모든 것은 말씀을 담고, 말씀 안에 머무를 때,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
산책 길 옆 푸르렀던 나무 잎들이 시들어 있다. 갈색으로 떨어져 죽어가고 있는 잎도 있다. 비가 오지 않아 물을 담지 못해서 이다. 안타깝다. 우리 성도(聖徒)들이, 사랑하는 가족(家族), 친구(親舊), 지인(知人)들이 말씀을 몰라 영(靈)이 죽어가는 모습으로 보여 마음이 너무 안타깝고, 아프다.
<구약(舊約)>
(아모8,11)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신약(新約)>
(요한1,14)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영원한 보호자이시며 하느님의 지혜, 계시의 영이신 천주 성령님!
우리의 삶 속에서 늘 함께 하시며 말씀을 진리의 물, 생명수로 먹고 마시도록 힘이 되어 주시니 감사 합니다. 저희 모두의 마음을 불을 놓으시어 오늘 말씀들이 믿음으로 자라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나)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6년 05월 18일 월요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과 스승 유의태의 아들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병든 이들을 만납니다.
유의태의 아들은 시험에 늦을까 봐 그들을 외면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허준은 그들을 치료하다 늦어 시험을 보지 못합니다.
스승 유의태는 합격한 아들에게, 의사가 환자들을 외면한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며, “너는 허준에게 졌다.” 하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삶은 박해의 삶이고,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제자들도 순교하였습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완전히 실패하고 패배한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승리는 다른 이를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십자가 죽음이 패배이지만, 하느님의 논리로는 사랑과 희생을 통한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참으로 이기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구하고자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에게 부활의 승리와 구원을 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세상 속에서 이기고 성공하고자 경쟁합니다.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느님의 시각에서 참되게 이기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하기를 기도합니다.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