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06일 수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9,28ㄴ-36)
제1독서<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다니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화답송>시편97,1-2.5-6.9(◎1ㄱ과9ㄱ) ◎ 주님은 임금이시다.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다.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주님, 당신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 모든 신들 위에 아득히 높으시옵니다. ◎
복음<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루카9,28ㄴ-36)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는 '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 '레미'(remi)는 '던지다', '배치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로 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는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은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wenaphek)는 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임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과 '립보 랍베 완' (ribbo rabbewan)은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는 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전하며, 다른 공관 복음서들과 달리 그분께서 산에 오르신 까닭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그곳에 가셨습니다.
루카 복음에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자주 나옵니다.
그분의 세례와 공생활, 열두 제자의 선발, 베드로의 신앙 고백, 거룩한 변모, 주님의 기도, 겟세마니, 그리고 십자가 수난과 같이 당신 생애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관점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른 당신의 인생을 볼 수 있으셨고 그것으로 당신의 인생을 비추어 살피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성공하는 삶이 아닌 실패하는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할 사명을 받으셨음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중반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성공적이지 못한 인생을 살고 계시다는 몇 가지 신호가 나옵니다.
군중은 처음에는 예수님께 몹시 열광하였으나 점차 예수님을 버리고 그분 뒤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늘어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계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길이 과연 어떤 길인지 알고자 하셨고, 이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변하고 빛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드리시는 가운데 당신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를 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율법서를 대변하는 모세, 예언서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며 성경 말씀을 통하여 당신께서 나아가실 길, 곧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나아가시는 그분의 파스카(건너감)를 깨닫고 이것을 받아들이셨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맞서야 할 현실 세계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떠올리면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나아갈 길을 깨닫고 다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길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십자가의 길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자기 인생을 내주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는 믿음을 지키며 살아갑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내가 변해야 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3,13-15.19-21).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입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 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서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은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그저 죽은 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 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모습,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모습 앞에서도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강건하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곧 다가올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당혹해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힘과 용기를 지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27절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고 하였는데 이제 해처럼 빛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
쉽지 않지만 이 선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단장을 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 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내 맘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드는 초막을 지어야 합니다. 내 생각에 주님께서 맞춰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마음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용기가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착각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세속적인 권력의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성당에는 매주 목요일 성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11시 미사에 이어 성체를 현시하고 침묵 속에 기도하며 성체강복으로 마칩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삽니다.” 그래서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 신심이 더해지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표징을 가끔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고 강조하는데도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보여 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체험이 전부는 아니지만 성체께 대한 믿음을 더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체험한 사람은 더 자주 준비된 마음으로 미사참례와 영성체, 성체조배를 하며 나눔의 신비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체험을 했다는 것은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해 확인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사랑합니다.
2025년 08월 06일 수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상우 바오로 신부)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의 예고편이라면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완성이지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아 어머니이신 교회는 오늘 독서와 복음으로 무엇을 전할까요?
구약 성경의 후기 문헌인 다니엘 예언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7,13)를 묘사합니다.
연로하신 분, 곧 하느님 곁으로 인도된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며, 민족과 나라, 언어가 다른 모든 이가 그를 섬기게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묵시 문학적 메시지로 오늘 독서는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인간의 희로애락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심판관이나 초월적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한편 다른 공관 복음서와 함께 루카 복음서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전합니다.
구약 성경의 이 두 인물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대표하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의 역사를 요약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둘과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베드로의 철부지 같은 제안이 무색하게 구름이 이 두 인물을 덮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복음서에 이르러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재해석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 나라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聖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人들.
복음(루카9,27-36)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 하늘을 향해, 곧 하느님의 뜻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깨달아 죽기 전부터 하늘나라를 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오늘 그 하늘나라를 보여주려 하심이다.
28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8)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 여드레(8), 부활을 뜻하는 숫자 8을 쓰셨고, 제자들도 셋, 하늘의 숫자3으로 소개한다. 곧 앞 22절에서 예고하셨던 죄인들의 구원, 하늘나라의 완성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뜻한다.
(루가9,22)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병행복음으로 보면~
(마르9,3)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 곧 예수님의 모습, 의복은 이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늘의 거룩, 의(義)의 빛인 것이다.
(요한8,12)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 어둠(죄, 죽음)을 품어 없애시고 내시는 ‘생명의 빛’이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사흗날의 부활로 얻는 생명이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원리다.
(묵시21,22-24) 22 나는 그곳(하늘)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24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율법)와 엘리야(예언자)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대속의 죽음과 사흗날의 부활)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 하늘 성전, 생명의 빛이신 그 셋의 죽음과 부활의 주님을 깨닫지 못하니 땅의 셋으로 준비하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우리(나) 삶의 모습을 보라 하신다.
<사제께서> 베드로는 수난을 뛰어넘어 부활의 영광에로 바로 직행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참 내 자신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의 세 제자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이면에는 이 행복한 순간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행복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닥칠 ‘수난과 죽음 앞에서 힘을 내라’고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닥칠 엄청난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천상의 모습을 잠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 사건들은 육신의 욕망, 그 자아를 부수셔서 구원으로 다시 세우시기 위한 하느님의 훈육이다. (히브123,7-11)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 소리, 히브리어 ‘콜’이다. 콜을 파자하면 ‘코프’와 ‘라메드’다. *코프-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 *라메드- 교훈하다. 가르치다. 그러니까 새롭고 살아있는 길,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새 계약의 말씀으로, 제사와 윤리, 옛 계약의 사람을 부셔 버리고 부인하도록 가르쳐서, 다시 하늘을 향해, 곧 ‘하느님의 뜻을 향해 똑바로 서라’는 말씀을 *다시 하신 것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히브10,19-20)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새 계약) 덕분에 성소(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갈라6,14-15) 14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아멘)
그리고 소리(콜)에서 파생된 말이 ‘카라- 초청’이며 가라에서 나온 말이 ‘칼라토스(성령), 파라 칼라토스- ’보호자 성령‘이다. 곧 보호자 성령께서 초청(招請)하셔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옛 사람의 자신을 부술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36절이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알릴 수가 없었다)로 마친다.
그래서 37절 이하, 더러운 영(말, 소리)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과 44절에 예수님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말씀하신다.
(루가9,44)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 죄인들의 구원, 곧 하늘나라의 완성을 위한 새롭고 살아있는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3)의 죽음과 사흗날의 부활(8)을 다시 말씀하신 것이다.
(루가9,45)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요즘 매미들이 한창 소리를 질러댄다. 7년을 땅속에서 살다. 땅 위로 나와 10일을 살며 내는 소리다. 곧 땅(세상)의 것을 추구하며 그 결함(缺陷)이 있는 쉼, 안식(7), 충만(10)을 위해 사는 이들아 너희들의 그 불안의 옛 사람을 부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참 쉼, 안식(7), 충만(10)을 누리는 새 사람으로 다시 서라’는 하느님의 소리로 들린다.
(갈라6,7-8) 7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롱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 8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게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 말씀을 육신의 뜻, 의(義)를 위한 소리로 들으면 멸망이며,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믿게 해 주실 성령을 의탁하면 생명이다.
(로마8,1-2.10)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새 계약)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믿음)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 우리 인생(삶)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숨, 성령으로 살아지는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
☨은총이신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부수시고 다시 세우시는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주소서. 그 소리로 살아감을, 살아 짐을 깨닫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