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04일 월요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마태14,13-21)
제1독서<저 혼자서는 이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민수11,4ㄴ-15)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5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6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7 만나는 고수 씨앗과 비슷하고 그 빛깔은 브델리움 같았다.
8 백성은 돌아다니며 그것을 거두어서,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빻아 냄비에다 구워 과자를 만들었다. 그 맛은 기름과자 맛과 같았다.
9 밤에 이슬이 진영 위로 내리면, 만나도 함께 내리곤 하였다.
10 모세는 백성이 씨족끼리 저마다 제 천막 어귀에 앉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주님께서 대단히 진노하셨다. 모세에게도 그것이 언짢았다.
11 그래서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12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13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14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15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화답송>시편81,12-13.14-15.16-17(◎2ㄱ) ◎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
○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 고집 센 그들의 마음을 내버려두었더니, 그들은 제멋대로 제 길을 걸어갔다. ◎
○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나 그들의 원수들을 당장 꺾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적들을 치리라. ◎
○ 그들이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의 아첨을 받고,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되리라.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
복음<“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14,13-21)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또는, 비안네 사제 기념일 독서(에제 3,16-21)와 복음(마태 9,35―10,1)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제1독서 (민수11,4ㄴ-15)
그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 자손들까지 또 다시 울며 말하였다."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4)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5)
'그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한 '섞여 사는 무리'(mixed multitude; rabble), '잡다한 족속들'이 포함될 수도 있고, 모계쪽만 이스라엘 민족(레위24,10)인 혼혈아들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비주류 계층으로 누구보다도 불만이 많을 수 있고,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있을 수가 있었다.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로 번역된 '아싸프쑤프'(asapsup)는 탈출기 12장 38절에 나오는 '이국인' 즉 이스라엘 백성과 혈통이 다른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기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함께 모여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시키는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었던 일부 불만 세력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탐욕을 부리다'로 번역된 '히트아우우 타아와'(hithauu thaawa)에서, '히트아우우'와 '타아와'는 동일한 어근을 지닌 단어이다.
'히트아우우'는 '원하다', '갈망하다'(잠언21,10), '사모하다', '바라다'(미카7,1)라는 뜻을 지닌 '아와'(awa)의 재귀형으로, '탐내다'(신명5,21)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타아와'는 '아와'(awa)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욕심', '탐욕'(시편106,14), '정욕', '욕심'(잠언21,25), '소원'(시편21,3)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어서 따라오는 내용으로 보아 이들이 가진 탐욕은 음식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동일한 어근을 지닌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음식에 대한 그들의 탐욕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지나친 육체적 욕망이 결국은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신앙을 자극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까지 또 다시 울며 말하였다' (4)
원문에 '아싸프쑤프'로 나오는 불만 세력들의 무리들이 이집트에서 먹었던 음식을 갈망하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그것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줄까?' 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주위 환경에 얼마나 쉽게 영향을 받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로 번역된 '와야슈뷰'(wayashubu)는 접속사 '와우'(wau)와 '돌아가다'란 뜻을 기본적으로 지닌 동사 '슈브'(shub)의 미완료 3인칭 복수형이 결합된 것이다.
본문에서 이 '슈브' 동사는 '다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하느님께로부터 돌이켜 옛 행실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민수기 11장 1절의 말씀은 "백성이 주님의 귀에 거슬리는 불평을 하였다. 주님께서 그것들 들으시고 진노하셨다. 그러자 주님의 불이 그들을 거슬러 타올라 진영 언저리를 삼켜 버렸다." 이다.
민수기 11장은 지금까지 진술되어 오던 민수기 내용의 전환전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출애굽 제1세대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 민수기 11장 서두에, 특히 민수기 11장 1절과 4절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 '슈브'동사는 민수기 14장에 서술된 내용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나서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슈브)이 낫지 않겠느냐고 서로 논의한 다음, 결국 한 우두머리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슈브)고 결의한다(민수14,3.4).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민수14,35), 모세는 그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이 주님 뒤를 따르지 않고 '돌아선 탓'<배반했기('슈브')때문> 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민수14,43).
이처럼 민수기 11장 4절의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울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원망하고 불신앙하는 옛 행실(탈출15,24; 16,2; 17,3)로 '다시 돌이켜서' 결국은 이집트의 옛 죄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려는' 주 하느님께 대한 '배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축에 둘러싸여 있으면서(탈출12,38; 19,13; 34,3) 고기를 달라고 통곡하였다. 아마도 이 가축들은 하느님을 위한 제사용으로 준비되었기 때문에 먹지 않았던 것 같다 (탈출5,3; 10,24-26).
그렇다고 이들은 기근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 그들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만나가 하느님께로부터 공짜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평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식용을 다양한 먹거리로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불평과 원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느님에 의해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더 좋고 더 풍요로운 것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이미 1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어 고기를 먹게 하신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탈출16,1.13).
이집트에서 나온 지 1개월 후 그리고 홍해를 건너 엘림을 지나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원망했고, 하느님께서는 메추라기를 보내어 진을 덮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느님을 믿고 간구하기 보다는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줄까?'라고 슬퍼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역시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민수11,13)라고 말한 것으로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백성이나 모세나 모두 1년 전 신 광야에서 메추라기 사건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신 광야에서의 메추라기 사건이 일회적이었다는 점(탈출16,13),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제 그 고기를 한 달 간 구역질이 나도록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점(민수11,20)을 참고하고,
둘째로 봄철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홍해를 건너 이동하는 메추라기가 운좋게 자연적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떨어진 것으로 여겨, 신 광야에서의 메추라기 사건을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안 볼수도 있다는 점,
셋째는 시간적인 요인으로, 민수기 11장에 기록된 메추라기 사건의 시기는 시나이산을 떠난 시기가 출애굽한 이듬해 이월 이십일(민수10,11)이므로 그 이후가 분명하다는 참고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 광야에서의 첫 메추라기 사건(출애굽 일년 둘째 달 보름; 탈출16,1)이 있은지 약 1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 그때의 사건을 하느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믿는 믿음이 많이 시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공짜로'로 번역된 '힌남'(hinnam; freely; at no cost)은 '은혜','호의'를 뜻하는 명사 '헨'(hen)에서 유래된 부사로서, '거저', '값없이'(창세29,15)라는 뜻이다. 즉 여기에는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민수기 11장 5절에 기록된 음식들은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파와 마늘은 강제 노역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식사로 제공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 음식들을 '공짜로' 먹었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노예 생활의 강제 노역에서 이들은 참으로 힘들게 수고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음식들은 지극히 당연한 대가요, 오히려 부족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굳이 '공짜로'라는 표현을 써서 말한 것은 모세를 향한, 더 나아가서 하느님을 향한 강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집트의 종으로 있었을 때에도 이러한 음식들을 공짜로 먹었는데, 이제 자유로운 계약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겨우 공짜로 주어진 것이 이 만나뿐인가?'하는 한탄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배부른 노예생활, 종살이가 배고픈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유로운 생활보다 더 낫다는 불신앙의 극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오늘의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주님께서는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시편 146[145],7)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도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루카 1,53).
그런데 현실은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는 하느님에 대한 그분들의 찬미가 공허할 만큼 가혹합니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날마다 수많은 이가 죽어 갑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분께서 어찌하여 오늘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버려두시는가?”
세상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식이 기적뿐이라면 복음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세상의 배고픈 이들에게 빵이 부족하지 않도록 그분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가르침이라면 우리는 좀 더 유익한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간이 협력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경계하여야 할 첫 번째 유혹은, 군중을 돌려보내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우리는 이 같은 각자도생의 논리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필리 2,5)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구체적 사랑을 실천합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가진 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이가 ‘나’와 ‘우리 가족’에게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욕심으로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는다면 세상의 배고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오늘 이야기를 ‘빵을 많게 하신(multiplication) 기적’이 아니라 ‘빵을 나누게 하신(distribution)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형제들과 우리가 가진 빵을 나누려는 사람들입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스폴랑코 니조마임-자비) 慈悲로,
애간장이 녹는 마음이다. 또 조건 없이 생명을 키우는 여자의 자궁을 뜻한다.
독서(민수11,4-7)
4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 들이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 자손들까지 또 다시 울며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 세상의 힘(말)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믿는 이들을 흔들어 놓는 현세의 모습과 같다.
5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6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양식인 만나를 없음으로 여긴다.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7 만나는 고수 씨앗과 비슷하고 그 빛깔은 브델리움 같았다.
= 이집트, 그 세상의 양식을 원하며 힘을 없애려는 이스라엘, 곧 신앙인들이다. 세상이 주는 육의 기쁨, 평화, 영광을 원하는 요즘의 모습이다.
(요한14,27)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12,43) 43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루가16,15)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 그래서 어제 보았듯 본문 후 31절에서 고기 먹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벌하신다. 만나는 우리의 뜻에 맞지 않는, 입에 맛은 없지만 브델리움(진주)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양식, 보물이다. 하느님은 그 보물, 진주를 간직한 사람을 당신의 모든 것을 처분하시어 사신다. 구원하신다.(마태13,45참조)
복음(마태14,13-21)
13ㄱ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에레모스-광야)으로 물러가셨다.
= 앞 절에서 당시 메시아(머리)의 역할을 했던 요한이 죽고, 메시아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려 하심을 배웠다. 구원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심으로 이루어지기에(신명8,1-3참조) 예수님께서 외딴곳, 광야로 가신 것이다.
13ㄴ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 가엾은 마음- 하느님의 자비다. 오늘 그 하느님의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 자비(慈悲)로 병을 고쳐주심이다. 곧 예수님께서 죄(罪), 병(病)을 가져가심으로 고쳐진 그 대속(代贖), 자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사53,3-4)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 그 대속(代贖)을 다음절부터 다시 보여 주시는 것이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빵 다섯(모세5경-율법(律法)이다) 물고기 두 마리 (선(善)과 악(惡), 그 둘이다) 모두 심판(審判)으로 하늘의 생명을 받을 수 없는 부정함을 뜻한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찬미(讚美 유로게오)- 유(선) + 로게오(말씀) 말씀으로 덮으시니 양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곧 말씀이신 예수께서 그 부정(不淨)한 음식을 당신이 덮으셔서 없애시고(뺏어 버리시고), 하늘의 양식(糧食)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비(慈悲)다.(루가1,50-55참조)
그리고 부정한 음식을 덮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부정함으로 들어가시어 부정함이 되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을 양식으로 주셨다는 의미이다. 자비(慈悲)다.
(히브2,14-15) 14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 남은(페리쉬어- 차원이 다른) 부정한 땅의 음식과 차원이 다른, 곧 하늘의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 열둘(12)로 하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숫자12는 하느님의 아들, 사도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하느님의 사랑(아가페), 자비, 새 계약으로, 그 생명의 말씀으로 먹었을 때....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 많은 사람들이 먹었다는 의미 보다, 많은 사람이 다섯, 곧 인간의 입에 맞는 육(肉)의 뜻을 위한 율법(律法)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제사(祭祀)와 도덕(道德)과 윤리(倫理)로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자신의 뜻을 위한 인간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信仰)을 살고 있는 것이다.
(로마3,20-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제사, 윤리)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보호자 성령님! 하느님의 사랑(아가페)과 구원의 새 계약(언약(言約), 약속(約束))과 함께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그 애(哎)가 녹는 그 자비의 마음을 넣어 주셨으니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과 마음을 이웃과 살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4,13~21)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여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14)
'군중'에 해당하는 '오클로스'(ochlos; multitude; crowd)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본문은 여기에 양과 정도가 몹시 많음을 나타내는 '폴뤼스'(polys; great; large)란 형용사까지 사용하여 마태오 복음 14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람들의 수효가 마태오 복음 14장 21절에 의하면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따라서 여자들과 아이들 수까지 모두 포함하면, 그 수가 2만명에 육박하는 상당히 많은 군중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14장 14절의 언급에서도 할 수 있지만, '군중'을 가리키는 희랍어 '오클로스'(ochlos)가 '귀족'과 대조를 이루는 '천민'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데서도 암시가 된다.
이들은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께 큰 희망을 걸고 무리지어 나왔던 것이다.
한편,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e; was moved with compassion; had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는 '창자' 혹은 '내장'을 의미하는 '스플렌'(splen)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내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특히 사랑이 전제되어 있으며 상대방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마태9,36).
이것은 이 용어가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다가 상당히 거리가 먼데도 아들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탕자의 아버지가 가졌던 측은한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보여진다(루카15,20).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바로 이같은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복음 선교와 선행의 밑바닥에는 이처럼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병자들을'에 해당하는 '아르로스투스'(arrostous; sick)의 원형 '아르로스토스'(arrostos)는 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 '알파'(a)와 '올바로 살다', '평안하다'(사도15,29)로 번역되는 '론뉘미'(ronnymi)의 변형이 합하여진 단어로서 '평안함이 없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으로 병든 자를 가리키지만(마르코6,5; 16,18), 마음에 괴로움을 안고 사는 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서는 이 단어가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당시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음을 알 수 있고, 14장 15절에 저녁때가 되었다는 표현도 예수님께 나아온 병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그들을 고쳐주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2025년 08월 04일 월요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신학생 때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1815년 어렵게 사제가 되어, 시골 마을 아르스로 발령을 받습니다.
성인은 아르스로 가는 길에 길을 잃었고, 그때 우연히 만난 목동에게 “네가 나에게 아르스까지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 나는 네게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르스에 도착해 보니 신자 대부분이 냉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 반가톨릭주의와 반성직 주의가 널리 퍼져, 거의 모든 이가 교회를 떠났었지요.
그러던 어느 밤 성인이 사제관에서 몰래 도망쳤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너에게 맡겨진 저 많은 영혼은 어찌할 셈이냐?”라고 물으셨고, 그 물음을 들은 성인이 다시 본당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성인은 신자들에게 주일 미사에 나오라고 권하였고 묵주 기도를 바치며 종일 고해소에서 지냈습니다.
그러자 냉담하던 신자들이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유럽 전역에서 고해성사를 보려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특히 성인은 성체 신심이 강하여, 신자들에게 성체를 자주 모시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소개됩니다.
빵과 고기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시는 장면은(마태 14,19 참조) 성찬 제정 이야기와(26,26 참조) 닮아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전형으로 풀이되는 이 이야기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삶을 거쳐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성인의 삶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성체 신심이 누구보다 강하였고, 두려움과 약함 가운데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성인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성인을 통하여 많은 이를 회개하도록 이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무뎌진 마음도 당신께 이끄시기를 청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성경(聖經)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음(마태14,13-21)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 *‘배(교회)를 타시고’는 하느님의 뜻인 구원의 길, 방법이다. 그리고 그 배(船)는 구원의 진리(眞理), 길(道)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육로는 인간의 뜻을 위한 세상의 방법, 길(道)이다. *외딴 곳, 광야는 우리의 인생 길(道)로 마실 물, 먹을 양식이 없는 세상으로, ‘하늘에서 내리시는 말씀(물)을 먹는 것이 구원의 삶’이라 신명기 8장을 통해 공부했다.
그래서 땅(세상)의 양식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늘의 양식으로 바꾸어 먹이신 것이다. 곧 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먹이신 것’이라 공부했다.(토요묵상 참조)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 왜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까? 구원의 길인 배(예수)를 타지 않고, 인간들의 뜻인 육로(陸路)로, 곧 인간의 길, 방법으로 찾아온, 열심을 부린 그들의 행위가 영(靈)이 병(病)든 모습이기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이다.
인간의 뜻(소원)을 이루기 위한 열심히는 하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병행(竝行)복음인 마르코 복음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라한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구원의 양식으로 올바로 전해주는, 먹여주는 목자가 없어 영이 병들었다는 것이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 제자들도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을 깨닫지 못했기에, 육로의 길로 돌려보내 육(肉)의 양식(糧食)을 구(求)하도록 한 것이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곧 배, 교회 안에 함께 계신 예수님의 말씀이 구원의 진리, 구원의 양식임을 깨닫지 못해, ‘없다’고 한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늘의 구원, 생명의 약속인 말씀, 성경(聖經)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의 길인 교회 밖 세상의 말을 더 좋아하고 믿으려한다. 육(肉)을 만족(滿足)시켜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이 오늘 독서의 ‘하난야’처럼 사람의 욕망의 마음에 흡족한 말을 해, 헛된 거짓을 믿게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것이 믿음이라 착각하고 있다.
독서(예레28,15-17) 15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17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2티모3,15-16) 15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 성경(聖經)은 육로(陸路)의 길이 잘못된 것이라 꾸짖고, 구원의 길인 배(船) 안에 그리스도로 거저 새롭게, 의롭게 되도록 바로 잡으신다.(2코린5,17 로마3,24참조)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육의 양식, 빵을 하늘의 양식, 말씀으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성찬례(聖餐禮)의 원형(原型)이다. 곧 십자가의 대속, 피의 새 계약의 말씀인 당신의 생명을 먹이신 것이다.
(히브9,15)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 제자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을 ‘모든 죄(罪)를 용서(容恕)하시는 새 계약’으로 전(傳)해 주어야 한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12) 광주리에 가득 찼다.
= 숫자 ‘12’는 하늘의 완전 수, 하늘 아들의 숫자이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 그러나 모두 그 하늘(12)의 양식으로 먹지 못했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곧 자기 배를 불리는 기적의 빵으로 먹었다. 그래서 다음절이 예수께서 군중을 재촉하시어 그 표징(기적)의 자리를 서둘러 떠나게 하시고 풍랑(風浪)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몸(빵)을 용서(容恕), 구원의 새 계약(契約)의 말씀(12)으로 먹지 못하고 있다.
육로인 인간들의 지혜, 계명으로 육의 뜻, 만족을 위해 열심히 예수님을 찾으며, 그것이 믿음이라 착각하고 살았다. 믿음은 열심히 지켜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세상을, 나를 믿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육적(肉的) 나’, 옛 사람의 ‘나’를 버리게, 부인(否認)하게 한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게, 기도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