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 29일 화요일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기념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11,19-27)
제1독서<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화답송>시편34,2-3.4-5.6-7.8-9.10-11(◎2ㄱ)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
복음<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11,19-27)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7월 29일 기념일 제1독서(1요한4,7~16)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0)
'이렇습니다', '여기 있습니다'로 번역된 '엔 투토'(en tuto)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사랑의 출처와 기원,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전치사구를 이끌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기원과 출저가 하느님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 사랑은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 독생성자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신 사건을 통해 분명히 입증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안에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기원이 된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에 나타난 사랑의 본질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다(1요한4,11).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내용을 먼저 언급하고, 뒤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라는 긍정적인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긍정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랑의 출발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구현된 하느님의 계획과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지극히 작은 응답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의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는 말씀과, 로마서 5장 10절의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에 나타난 사상이 여기에 들어있다.
이제 '속죄제물'로 번역된 '힐라스몬'(hilasmon; as an atoning sacrifice; to be the propitiation)의 원형 '힐라스모스'(hilasmos)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분리된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말한다.
'속죄제물'에는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염소'의 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했으며 따라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가 드려지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온전한 속죄 제사를 계획하시고 속죄 제물을 준비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죄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을 뿐만 아니라 화해의 제물이 되셔서 하느님와 원수였던 자들을 그와 화해시켰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 같은 진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사실성과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경계한 표현이다.
역사의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던 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파하면서 속죄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 구속 사업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내신 사건과 그로 인한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07월 29일 화요일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기념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죽음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도, 사회적인 지위와 능력도, 그 어떤 것도 죽은 이를 살리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사랑하신’(요한 11,5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정말로 가져야 할 것, 곧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됩시다.
라자로가 죽음에서 일으켜졌던 것처럼, 이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하신 예수님까지 희생시키시면서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초대가 이 믿음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면서까지 무엇인가 가지고 싶어질 때마다, 마르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기념일]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으로 지어졌고 숨 쉬고 살아가며 존재한다.
제1독서(1요한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을 주는 것,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려 우리의 죗값, 속죄 제물로 당신 아드님을 내주신, 인간의 지각, 사랑(페네스)을 뛰어넘는 사랑(아가페)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그 이타적이며 차별이 없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다. 그래서 죄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에페1,4-11참조)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을 전해주어 하늘의 용서, 생명, 구원을 받게 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 성령의 이끄심, 가르치심이 없으면 사랑하는 당신 외 아드님을 이세상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인간의 지각으로는 알 수 없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을 수 없다.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깨닫게(믿게)해 주셔야 알 수 있는 사랑이다.
보호자 성령의 이끄심, 도우심으로 그 하느님의 사랑, 이타의 사랑(아가페)이 내 안에 계심을 알 수 있다. 그 하느님의 본성, 신성인 사랑이 성경(예수)과 우주 만물이 말하고 있다.
(로마1,20)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에페4,6)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이 내 안에 계심이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다는 것, 앞10절에서 말씀 하셨듯이,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외아들(모노게네스-하나를 갖은), 선악의 그 둘(법,삼판)이 아닌 선이 악을 대속하여 생명을 주는 그 진리 하나로 갖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의 대속으로 얻는 하늘의 용서, 생명, 의로움, 구원을 믿는 것이지 내 죄를 심판하시며 또 내 뜻, 소원을 들어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다. 말씀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간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보는 것이다. 그 사랑(아가페)으로 나의 잘못과 이웃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나의 죄와 이웃의 허물을 대속하신 십자가의 사랑이니까.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 스스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그 사랑(아가페)을 받기 위해, 간직하기 위해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복음(루카10,40-41)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것, 그 한가지뿐이라 하셨는데~ 교회는 마르타를 성녀로 기념한다. 성경적이지 않다. 예수님의 일꾼이 아닌 교회의 일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는 단체가 얼마나 있는가? (참고로 우리본당에는 하나도 없다)
말씀과 관계없는 단체들만 수두룩하다. 마르타가 예수님 당신을 열심히 섬겼던 그 열심,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셨는데 교회는 필요하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래서 그 마르타들로 채우고 있다. 구원없는 마르타들을 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사랑)을 깨닫고자 하는 마리아들이 없다.
(마태15,9. 23,15) 9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은 제사와 윤리로 열심히 착하게,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마태5,20참조) 그들의 말, 신앙의 삶을 따르는 것이 지옥행 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기념일, 축일의 자리에 마르타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부족한 인간의 사랑, 인간의 의를 본받으려 헛된 신앙을 살게 된다.(이사64,5 티토1,14참조)
오직 우리 죄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래서 하늘의 용서, 의로움, 생명을 주시는 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진리로 기념하며, 축일로 지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요한4,23-24참조)
☨보호자 성령님!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계심을 깨닫고 믿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복음(요한11,19~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25~26)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놀라운 이적은 요한 복음의 일곱 표적 가운데 마지막 표적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되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앞으로 있을 당신의 부활과 그리스도에 의해 얻게 될 모든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라자로의 부활 사건은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한 사건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예수님의 체포와 죽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요한 복음 12장 11절 이후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공관복음에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는 것은, 공관 복음이 기록된 시기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전으로서 여전히 유대 지도자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라자로 일행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라자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다고 본다.
'라자로'에 해당하는 '라자로스'(Lazaros)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우셨다'이며,히브리어 '엘르아잘'(Ellazar)의 축소형으로서 그 당시 흔한 이름이다.
그는 현재 '라자로 동네'('엘 아자리예'; El Azarieh)로 불리는 곳,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촌이며 올리브산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베타니아'(Bethanias) 출신이다.
그는 중병에 걸렸다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흘'('텟사라스 헤메라스'; tessaras hemeras; four days)이라는 숫자를 밝히는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의 민간 신앙에 있어서 죽은 자의 영혼이 사흘간은 그 시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고, 미쉬나에도 삼일 이내에 시신을 확인하고 그 기간 내에 장사를 지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영혼이 완전히 그를 떠난 상태여서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최종적인 죽음의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라자로의 죽음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조성이 된 것이다.
생명을 주관하시고 생명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신 예수님께는 한 인간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수면, 즉 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요한 복음 11장 25절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갖는 부활과 생명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는 말씀이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Ego eimi; I am) 양식의 진술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위한 독특한 양식이다.
이 선언을 통해 '말씀의 계시'가 '행위의 계시'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나타내시기를 거부하시고 자신 속에 있는 현재의 사실로 나타내신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 안에서는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그것이 바로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며, 얼마 후에 있을 예수님 자신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부활의 실체를 인류에게 보여 주신 계시이며, 죄의 결과요 사탄의 시기인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패퇴시키고 정복하신 역사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죽음이 임금 노릇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ego eimi he anastasis kai he zoe;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라는 자기 선언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본체이신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의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시며,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부활의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바로 요한 복음 11장 25절 후반절과 26절에 등장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에 해당하는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ho pisteuon eis eme; He who believes in me)인데, 직역하면 '나를 계속하여 믿는 사람은'이다.
여기서 '피스튜온'(pisteuon)은 '피스튜오'(pisteuo)의 현재분사로서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사실 및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사실을 묘사한다.
'죽더라도 살고'에 해당하는 '칸 아포타네 제세타이'(kan apothane zesetai; h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이다.
'칸'(kan)은 '카이 에안'(kai ean)의 준말로 '비록~일지라도'(even though)라는 뜻이다.
'아포타네'(apothane)는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의 부정(不定)과거 가정법으로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으로서 사람이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물리적 죽음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믿기만 하면,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는다 할지라도 '영적 생명'이 그 안에 살아 있다고 선언하신다.
'살고'에 해당하는 '제세타이'(zesetai; he will live)는 '살아 있다','산다' 등을 뜻하는 '자오'(zao)의 미래 중간태로 '영적 생명'이 지속됨을 가리킨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우 메 아포타네 에이스 톤 아이오나' (u me apothane eis ton aiona; shall never die)에서 '우 메'(u me)는 이중 부정(否定)으로서 미래의 사건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한다.
여기서 '아포타네'(apothane)가 나타내는 죽음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어느 성현 군자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 했으며, '부활이요 생명'(요한11,25)이라고 했는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느 성현 군자가 죽어 빈 무덤을 가진 자가 누가 있는가! 예수님 만이 부활하셔서 예루살렘에 빈무덤을 가지고 있으며, 성모님 만이 몽소승천으로 육신이 무덤의 부패에 썩지 않고 영혼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피승천하셨다.
왜 그런가? 예수님만이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부활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육신은 비록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하더라도 그 영혼과 천주성은 없어지지 않는 분이시다.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상에서 제단이요, 제관이며 제물이 되시어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다 이루신 다음에는 더 이상 육신으로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사실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되시려면 당신의 존재 양식을 새롭게 바꾸셔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

2025년 07월 29일 화요일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기념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주님께서 사랑하는 이가 병을 앓고 있다고 알립니다(요한 11,3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야 두 자매를 방문하십니다. 이에 마르타와 마리아는 주님께 일종의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해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을 저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의인의 부활을 생각하는 마르타의 답변을 보면 ‘지금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하실 일에 확고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당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는 훌륭하게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돌을 치워라.” 하셨을 때, 마르타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11,39)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을 보면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잘 모른 채, 오직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의지에서 한 동의 차원의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부족한 믿음에도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믿음의 크고 작음보다는 믿겠다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07월 29일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기념일]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義로 드러나야”
복음(요한11,19-27)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 그녀들의 오빠 라자로가 죽은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수님은 육(肉)의 죽음을 막아 주러 오신분이 아니다. 곧 세상의 육을 죽여 다시 하늘의 생명으로 살리시려 오신 구원자(救援者)시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 죽은 이를 살리셨던 그 기적(奇蹟)의 의미, 구원(救援)을 깨닫지 못해 오빠에게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청(請)이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 물론 마르타의 청(請)과 다른 의미로 말씀하심이다. 어쨌든 믿지 못하는 마르타 이다.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신앙관은 세상의 끝날, 종말 후 부활(復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새 계약을 믿는 이에게 죽음은 곧 부활(復活)이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 세상의 죄(罪)를 없애시려 세상의 죗값으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시고 의롭게 하시려 사흗날에 부활하신(로마4,25)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리로 믿는 이는, 죽더라도 사흗날(3, 하늘)로 되살아나고, 살아서는 그리스도의 사흗날의 부활이 주시는 하늘의 의(義), 생명을 미리 산다는 말씀이다.
제사(祭祀)와 윤리(倫理)의 신앙(信仰)은 절대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용서(容恕), 생명(生命), 부활(復活)이다. 곧 죽음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부활과 하나’이다. 우리에게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심이다.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 세상을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아니다.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한 율법주의인 ‘마르타’이기에 못 알아듣고 엉뚱한 답을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늘나라의 회복이 아닌, 다윗 시대의 영화를 회복시켜 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 시켜줄, 이 세상을 위한 메시아를 믿었고, 고대했다. 곧 세상의 평화, 영광, 생명(건강)을 위해 오신 그 메시아로 알고 답(答)한 것이다. ‘마르타’는 그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답한 것이다. 우리는?
아니다. 곧 사라질, 영원한 어둠에 같히게 할 세상의 평화, 영광에 목숨을 건, 그 노예(奴隸)의 삶에서 건져내시어 하늘의 영원한 평화, 영광,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마르10,45참조)
(1코린15,19)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 구원 받지 못할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1코린15,20)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 요한11장 42절 이후, 예수님께서 죽어 나흘(4)이나 지난 ‘라자로’를 살리신다. 그러나 다시 죽을 라자로다. 육(肉)의 목숨, 건강을 위한 ‘마르타인 우리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죽으셨고, 의롭게 하시려 사흘(3)날에 부활하신 그 ‘십자가의 복음, 말씀으로만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아들으라.’ 하심이다.(사도17,28참조)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또한 그렇다. 오늘 그들을 위한 기념일(記念日)이다.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흗날의 죽음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이사1,14)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 육(肉), 그 4의 죽음을 하늘(3)의 죽음이 먹어(품어) 존재함이다.(2코린3,4) 또한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신앙은 마음이 완고해져(마르6,52) 오히려 그리스도를 적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11,53)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으로 땅(세상)의 것을 위해 의롭게 산 이들이 제사와 윤리를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완성하시고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늘나라의 의(義)이신 자신들의 구원자를 몰라보고 죽이기로 결의를 한 것이다.
(1코린1,18.21)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이며 인간의 지혜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다가의 구원의 복음이 저희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본디 7월 29일, 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이었으나,2021년부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경되었다.(교황청 경신성사성, 2021년 1월 21일 교령)
왜 자꾸 없는 기념일을 보태고 보태는 것일까? 성경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이 된다.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차라리 스스로 거세라도 하면 좋겠습니다." (갈라5,12)
![[강론 영상]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https://search.pstatic.net/common/?src=http%3A%2F%2Fblogfiles.naver.net%2FMjAyNDA3MjlfODcg%2FMDAxNzIyMjExMjU1MjQ2.Ir2BBHihF7v3CuayZEFCFCEORzMXy5IRLHGTtlR5qzEg.QgEZ9VP_ZPL2rwMydEG9GlmSZB0LJzJ8JXBzmg324iog.JPEG%2Fweb3-raising-of-lazarus-duccio-di-bouninsegna.jpg&type=l340_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