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 14일 월요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10,34-11,1)
제1독서<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탈출1,8-14.22)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화답송>시편124,1-3.4-6.7-8(◎8ㄱ) ◎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
○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저들 이빨에 우리를 먹이로 내주지 않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
복음<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11,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제1독서(탈출1,8~14.22)
"그 무렵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8)
흉년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뿐 아니라 여러 많은 고통을 겪게되는 야곱 일가는 먼저 이집트로 끌려가 성공한 요셉에 의해 이집트의 고센땅에서 정착하게 된다.
그 당시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고센땅에 내려갔을 때 가족수가 불과 70명 정도였다.
고센땅은 이집트 카이로에서부터 나일강의 삼각주를 통과해서 홍해바다로 가는 영역속에 존재하는 아주 비옥한 땅이다.
야곱 집안은 대대로 목축을 했기에 그 당시 고센땅에는 목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요셉의 코치에 의해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당시 부러울게 없는 최대 강국이었고, 또한 목축하는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 근처에는 가기 싫어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관심밖에 놓여 있을 수 있었다.
성서학자들은 이 고센땅을 가리켜 이스라엘 민족의 '인큐베이터'였다고 말한다.
어린 생명, 즉 아주 연약한 생명이었던 이스라엘 부족을 잘 키워가지고 바깥으로 내놓는 역할을 하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46장 3절을 보면, 이집트에 넘어 가기 전 가나안의 경계 브에르 세바에서
제사를 드린 야곱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야곱 집안의 고통을 보상해 주시고, 자신이 선택하신 이 민족을 키워 사용하시고자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과 번영이 오래지 않아 어느 한 순간에 또 뒤집히기 시작한다.
그것이 오늘 독서의 탈출기 1장 8절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이 새 임금이 누구인가?
출애굽의 역사의 무대를 B.C. 15 C로 보느냐? B.C. 13 C로 보느냐? 에 따라 견해가 달라질 수 있다.
성서 고고학이 더 발전되면, 명확하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성경을 근거로 추정하는 한가지 설을 소개해 본다.
열왕기 1권 6장 1절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한 해가 출애굽 사건이 있은지 480년이 지나 솔로몬 즉위 제 4년이라 밝히고 있다.
솔로몬 즉위 제 4년을 거의 B.C.960 년으로 보고, 여기에 480년을 더 했을 경우에
출애굽 연대는 B.C. 1440년이 된다.
그리고 판관기 11장 26절을 보면, B.C.1100년경에 활동했던 판관 입다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거한지 300년이 흘렀다고 말한 것을 종합하면, 출애굽 연대를 B.C.1445-1440년경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집트 제18왕조인 투트모세 3세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했다고 추정하는 설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셉을 알지 못했던 새로운 파라오, 즉 이집트의 통치자가 일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점점 강해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 앞에 위협을 느끼는 새로운 파라오는 이제 탄압의 음모를 꾸미고, 이스라엘 부족의 운명은 노예의 자리로 전락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핍박의 회오리 속에 빠져들게 된다.
파라오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줄곧 이스라엘을 괴롭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하고자 하는 음모, 즉 갓 태어난 사내 아이를 다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가 시작된다.
이런식으로 하느님의 선민, 계약의 백성을 이 땅에서 끊어버리기 위한 사탄의 음모는 역사를 통해 계속 반복된다.
그렇게 해서 사탄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목표는 메시아(구세주 예수님)인 것이다.
그 예수님이 구원자로 역사 안에 들어 오지도 못하고 들어오더라도 제거하기 위해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하고 사내 아이들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주는 장본인은 항상 사탄이며, 하느님은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하느님께서 뜻이 있어 사탄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땅 고센에서 계속 축복과 번영을 누리고 살았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 시온의 땅을 생각했겠는가?
아마 까맣게 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땅에서 고통을 받게 되니까 비로소 '아~우리 민족을 가나안 땅에서 다시 한번 놀라운 백성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지'하며,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고, 시온을 향한 꿈, 시온의 본향을 향한 생각을 다시 일깨우게 된다.
고통은 하느님의 백성을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훈련이다.
탈출기 3장 7절에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나온다.
그들은 고통을 당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느님과의 통교가 살아나게 되며, 하느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고, 하느님을 의지하니까 하느님의 쓰임받는 도구가 된다.
끊임없는 현세적 번영과 복에는 언제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지워버리며 자신이 하느님이 되는 세속화(극도의 인본주의)가 반드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멸절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과정에 있어서 당신을 경외하는 산파들을 도구로 쓰시며 (탈출1, 20~21) 당신의 일을 진행해 가신다.
이집트 고센땅으로 내려간 70명의 야곱 가족을 200만명으로 키우시고, 그들을 해방시켜 가나안을 향하게 하는 모세를 준비시킨다.
탈출기 1장을 정리해본다.
번영과 복이 올 때 그 자체를 너무 기뻐하지 말 것이며, 그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겸허하게 하느님의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고통이 올 때 너무 낙심하지 말며, 그 배후의 하느님의 뜻을 살펴봐야 한다.
사탄이 핍박하면, 사탄에게 외쳐야 한다.
'너의 계교는 성공할 수 없는 음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계교와 거짓의 사탄아 물러가라. 물러가서 예수님 십자가 발치에 가서 그분의 명을 따르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오늘의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의 업적으로 표현된(이사 9,5-7 참조)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나 싸움이 없는 상태로 여겨지기보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죄를 넘어서고,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거나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되찾은 상태를 말합니다.
칼은 글자 그대로 군사적인 의미에서 싸우는 도구가 아니라 칼이 주는 표상과 함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리나 분열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화가 아닌 칼’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가족 관계입니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가족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습니다.
“칼을 주러 왔다.”라는 것은 비교를 위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자들은 가족에서 분리되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사회의 유대가 아닌 예수님과 이루는 관계가 먼저입니다.
제자가 되는 길에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 합당한 제자가 되는 길은 기존의 관계와 자신을 위한 길을 벗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하게 스승을 따르는 자세입니다.
넓은 의미로 제자인 신앙인들도 비슷합니다.
그 길에는 다른 것에 앞서 말씀을 따르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舊約에서 罪를 들춰내신 후, 新約에서 恩惠로 덮어버리신다.
왜? 죄를 모르면 하늘의 용서, 자비, 평화를 모르기 때문에.....
복음(마태10,34-11,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하느님의 뜻을 떠난 카인의 후예들인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인 말씀을 자신들의 뜻을 위한 법으로 바꿔가며, 또 세상의 물질, 문명, 문화, 과학, 경제를 발전시켜가며 그것들이 평화를 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창세4,21-24)
또한 거짓 사도들이 양의 옷차림을 하고, 착한 모습으로 와서 착하게, 의롭게 살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한 말을 믿고 있다. (마태7,15 2코린11,13-15 참조)
아니다, 속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닌 거짓들이 진리가 된 세상이다. 역사가 말하고 있다. 세상은 갈수록 악해져 가고 있고 평화가 아닌 절망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떠난 악한 생각들이 인정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세상을 기대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칼을 뽑으실 수밖에 없다. 가짜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세상이 속이고 있는 가짜 평화에 대한 갈망을 잘라 내시고, 영원한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다.
(잡회22,21) 21 친구에게 칼을 뽑았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라. 우정을 돌이킬 길이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실 속죄 제물, 어린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이 악(惡)이며 죄(罪)라는 것이다.
(이사53,5)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하느님이 먼저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산다. 하느님의 뜻은 하늘의 영원한 평화, 생명이고, 인간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것들의 결국은 땅속이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위해 세상 평화를 추구하는 가족을 부수신다.
세상의 것을 위해 뭉친 가족이라면 식구가 서로에게 원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도 원수가 된다.(필리3,18)
(골로1,21-22)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십자가, 피의 새 계약)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속죄 제물)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38 (그러므로)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현실의 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죄성을 보고, 그 ‘내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 제 십자가로 지고 따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로마6,6)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갈라5,24)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육(肉)의 욕졍과 욕망의 죄(罪)가 죽은 것이다. 육의 목숨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육(肉)의 목숨을 위한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나오는 것이 죄밖에 없다고 하신 것이다. (마르7,20-23)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용서의 십자가’를 ‘제 십자가로 지고 따라오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목숨, 육의 욕망을 위한 삶을 고집한다면 영원한 죽음이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그래서 매일 ‘십자가의 복음, 피의 새 계약’의 말씀을 읽고 깨달아, ‘나 사랑을 위한 이기적 삶’을 버리는(否認) 신앙을 살아야 한다.
어두운 땅 속에 영원히 갇히지 않으려면~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8,10)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믿음)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40 너희(제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야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자기 버림, 부인(否認)으로 ‘하나 됨’ 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 하느님의 예언자(말씀)로 오셔서 ‘하느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말씀하심이다.
(1코린1,30) 30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구원)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시원한 물 한 잔? 갈증, 목 마름을 해갈 해 살리시는 생명 수, ‘주님의 한 말씀’이다.
(아모8,11)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그러니까 세상의 좋은 말, 훌륭한 지혜의 가르침을 아무리 매일 주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주지 못하면, 굶주리고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다.
(요한4,13)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말씀, 성령)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 *이 물- 땅, 세상의 말은 목숨을 다시 살리지 못한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 인간의 뜻, 죽음의 욕망인 유대주의, 그들의 속셈, 죄성을 드러내어 하느님의 구원의 뜻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복음이 ‘덮으시러’ 가시는 것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아멘)
☨은혜, 생명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0,34~11,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4)
마태오 복음 10장 34절에서 39절까지는 '제자들이 세상과 겪게 되는 갈등의 필연성 및 절대적 헌신'의 요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원문에는 마태오 복음 10장 34절과 35절에는 과거 시제, 마태오 복음 10장 36절에서 38절까지는 현재 시제, 그리고 마태오 복음 10장 39절에는 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첫 단락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피할 수 없는 세상과의 갈등 및 박해에 대해서, 둘째 단락은 제자로서 요구되는 절대적 헌신의 삶에 대해서, 세번째 단락은 자신의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함에 대해서 각각 다루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점층법의 구조를 통해 마지막 단락의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수준의 헌신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승되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외의 것들은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영원한 생명의 도(道)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높은 신앙의 경지이다.
여기서 '평화'에 해당하는 '에이레네'(eirene; peace)는 세상과의 타협을, 그리고 '칼'에 해당하는 '마카이라'(machaira; a sword)는 하나의 은유로서 세상의 모든 죄악과 불신앙에 대해서 복음을 들고 싸우는 적극적인 대처를 상징한다.
2025년 07월 14일 월요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 복음처럼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말씀을 접하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자주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오히려 그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으며 심지어 그 칼이 가족까지도 갈라놓는 도구가 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충만한 삶을 의미하며 진실을 감추고 겉으로만 분쟁이 없는 상태의 세상적 평화와는 다릅니다.
참된 평화는 악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들이나 성인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사회악을 거침없이 드러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그분을 단죄하는 무리가 생기는가 하면 그분께서 참예언자이시기에 기뻐하는 무리도 생깁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둘로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칼은 폭력의 상징이 아니라 분리의 상징으로서 무엇이 참되고 구원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파멸인지를 구별해 줍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생명을 주는 생각과 인간을 해치는 생각을 분별하게 합니다.
모호한 태도를 지니지 않게 하고 언제나 결단을 내리게 합니다.
듣는 이가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라는 숨은 동기 때문에, 결단을 요구하는 하느님 말씀을 겉으로만 듣고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 평화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공동체 안에서 거짓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참평화를 위하여 분열과 반대도 기꺼이 떠맡는 그분의 제자로 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평화는 하느님의 열정이 이루신다.
(마태10,34─11,1)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세상의 돈, 명예, 의로움이 주는 그 평화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올바른 하늘의 평화의 길로 돌아와 살게 하시려고 칼을 던지시는 것이다. *칼(발레인 마카이)- 전쟁 용어로 ‘격렬하게 던지다. 자르다.(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다) 사람의 그 어떤 수고, 노고도 결코 평화를 줄 수 없다. 역사가 증명하지 않는가?
(예레6,13-14) 13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예언자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짓을 행하고 있다. 14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면서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
= 평화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열정이 이루신다.(이사9,6) 그 평화는 우리의 죄로 대신 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미카5,4 이사53,5 에페2,14 참조) 곧 하느님의 사랑, 열성이 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만 누리는 평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세상의 것이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우리 스스로가 속이고, 속고 있다.
(요한14,27)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골로1,19-20)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예수)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가 주는 하늘의 평화가 아닌, 세상의 힘, 자기 열심히 이루려는 평화, 곧 안식을 줄 수 없는 그 위선의 평화로 뭉쳐있는 가족 관계를 칼로 가르신다.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에페6,17)
곧 말씀 안에 머물면서 그 말씀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 죄인들의 용서,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을 깨닫게, 찾게 될 때 세상이 주는 평화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아는 그 잘라짐,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다. 육의 본능을 잘라내는 것이기에 속은 쓰리다. 그러나 영은 기뻐한다.
(묵시10,10)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말씀)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가족들이 하느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과 동시에 목숨과 같은 부모, 자식이다. 그들과 함께 하느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자신을 보고, 그 자신을 더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음이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우리의 죄로, 대신 죄로, 저주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가 달렸어야 할, 내 죄의 십자가였음을 믿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제자인 것이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원수 같은 집안 식구가 현실의 내 십자가이다.
그 현실의 십자가 곧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원수 같은 식구(이웃)를 사랑할 수 없는, 품을 수 없는 그 내안에 원망과 미움, 시기를 보며 불가능한 그 나를 자각하고 인정하는, 그래서 그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임을 깨닫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리로 메는 것이다. 그랬을 때 하늘의 용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에만 열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구원, 곧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신앙이 된다. 현실의 십자가를 잘 지고 열심히 사는 그 삶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를 악물고 잘 참아내며 잘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은 억지로, 이를 악물고 참고 하는, 그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선이라 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짓는 미움도 죄라 하신다. (루가11,39) 우리는 무엇이 제 십자가인지 다시 배워야 한다.
(마태11,29-30)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멍에, 십자가이기에 우리 죄가 용서로 가벼워져 편한 쉼(안식), 평화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하늘의 대속, 그 진리를 모르는 이들의 박해를 받는다(요한15,18~) 사실 세상은 관심이 없다. 박해는 교회 안에 있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육의 명예, 영광, 그 목숨을 위한 삶은 영의 목숨, 곧 하늘의 생명을 잃어버린다. 우리의 생명은 말씀(예수)이다. (요한1,14) 그 말씀 안에 숨겨진 진리를 깨달아 간직하는 것이 생명이다. 곧 참 진리(빛)가 주님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머리로 그분의 지체가 되면, 그를 가리켜 세상의 빛(진리)이라 하는 것이다.(마태5,14)
40 너희(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 모든 예언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진리로 선포한다.(루가24,27참조) 그리고 그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뜻, 계명을 목숨 바쳐 다 이루신 참 의인 이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대속을 진리로 믿고 간직하는 것이 하늘의 생명을 얻는 상(償), 福인 것이다.(요한14,6)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시원한 물 한잔- 한 말씀이다. 말씀을 선과 악(도덕과 윤리), 그 둘로 주지 말고, 그러면 심판이니까. 선과 악을 짝하여 하나로, 곧 예수 그리스도(善)께서 죄(惡)를 대속하시고 하늘의 생명, 하늘의 의, 영광을 주신다는 그 한 말씀을 자신의 의, 영광을 위해 짐 같은 무거운 신앙으로 걱정과 근심 속에 사는 이들에게 준다면, 모든 것으로 부터의 자유, 그 시원함을 주는 것이고 그는 결코 하늘의 상, 하늘의 용서, 생명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 지금까지의 복음, 기쁜 소식을 오늘 우리에게 선포하시려 떠나오신 것이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찾아오신 구원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여, 진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