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9,18-26)

2025. 7. 6. 오후 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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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7일 월요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9,18-26)

 


1독서<하느님의 천사들이 층계를 오르내리고>(창세28,10-22)

10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11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14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5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17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19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의 본이름은 루즈였다.

20 그런 다음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21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22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화답송>시편91,1-2.3-4ㄱㄴ.14-15ㄱㄴ(2)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께 의지하나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아래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안에 머무는 이,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 나의 하느님, 나 그분께 의지하네.”

그분은 사냥꾼의 덫에서, 끔찍한 역병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어 주시리니, 너는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내 이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복음<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28,10~22ㄱ)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하면서,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16)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17)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18)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그러나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즈였다.19)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로 번역된 '아멘 예쉬 예흐와 빰마콤'(amen yesh yehwah bammaqom)에서, '아멘'(amen)은 '진실로', '참으로'라는 의미인데, 주로 두려움이나 감격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빰마콤'(bammaqom)은 '이 장소안에,' '이곳에'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실로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도다'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난 야곱의 두려움과 함께 낯선 여행길에 하느님을 만난 야곱의 넘치는 감격이 표현되어 있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브에르 세바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들판인 이곳 베텔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근동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각 신들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역 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지역을 벗어나면 지금까지 섬기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지역 신 개념에 익숙해져 있었던 야곱이 하느님께서 어느 곳에나 계심을 비로소 확인하는 감격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야곱은 지금까지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베텔에서 야곱 자신의 하느님과 일대 일로 접촉하게 되어 야곱 자신의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잠언 8장 17절의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사랑해 주고 나를 찾는 이들을 나는 만나 준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야곱처럼 하느님과 일대 일로 만나 그 하느님을 나의 마음에 모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한편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로 번역된 '웨아노키 로 야다티'(weanoki

 

lo yadathi)에서 1인칭 대명사인 '아노키'(anoki; 나는)가 독립적으로 쓰인 것은 야곱이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알지'로 번역한 '야다티'(yadathi)의 원형 '야다'(yada)는 지적으로 아는 것은 물론, 감정적으로 깊이 동조하고 있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까지 가리키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이며, '로'(lo)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야곱이 하느님을 어느 지역에만 국한되어 계시는 지역신으로 알았고, 하느님을 마음속에 모시며 살아 오지 못했으며,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지 못했음을 베텔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었을 때 깨달을 수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에 해당하는 '마 노라'(ma nora)에서 '마'(ma)는 의문 부사로서 '어떻게', '얼마나 많이', '이 얼마나'란 의미이며, '노라'(nora)의 원형 '야레'(yare)는 '전율하다', '떨다'는 뜻으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떠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느님이나 부모, 임금, 성전과 함께 사용될 때는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단순 재귀형 수동 분사로 사용되어 야곱이 현재 하느님을 뵌 것에 대하여 스스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야곱은 죄인된 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고 만난 것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즉 종교적 경외심에 사로잡혀 크게 떨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번역된 '뻬트 엘로힘'(beth ellohim)에서 '집'에 해당하는 '빠이트'(baith)는 '짓다'(욥기27,8; 코헬렛2,4), '세우다'(룻기4,11; 예레45,4)라는 뜻이 있는 '빠나'(bana)에서 유래하며 일차적으로는 '세워진 집'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가 임금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궁전'(2열왕21,18; 1역대14,1), 하느님과 관련될 때는 '성전'(2열왕16,18; 1역대29,3)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 야곱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곳은 당시 성전 건물이 세워져 있던 곳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빈 들판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그 장소를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야곱이 바로 그 들판에서 하느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처험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느님께서 간택한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아무리 훌륭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그곳에 하느님께서 임재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장소는 한낱 건물에 지나지 않을 뿐, 결코 성전이 될 수 없다(이사1,12).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신다면, 우리 몸도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음을 코린토 1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밝히고 있다. 

 

한편 야곱이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집',  '뻬트 엘로힘'이라고 부른 곳은 원래 '루즈'(luz; '편도나무'라는 뜻; 이 지방에 편도나무가 있었기 떄문에 붙여진 지명)지방이었다. 

 

그런데 야곱이 이곳에서 하느님을 시중드는 천사들은 물론 하느님의 뵙고 하느님께로부터 계약의 말씀을 들은 이후로 '뻬트 엘로힘'의 축약형인 '뻬트 엘', 즉 '베텔'(bethel)로 불리게 되었다(창세28,19).   

 

'기둥으로 세우고 ~ 기름을 부었다' (18)

 

히브리인들은 사람이나 물건을 거룩하게 구별할 때 기름을 붓는 관습이 있었다. 여기서 야곱은 자신이 하느님을 만나는  꿈을 꿀때 머리에 베었던 돌을 취해 성별(聖別)하기 위해 기름을 부었다. 

 

야곱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고대인들에게 흔히 행해졌던 우상 숭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임재를 기념하고 길이길이 기억하기 위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베텔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과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며(창세12,8), 직계 조상인 야곱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속해 있는 곳이다.

 

 

 

 

[연중 제14주간 월요일오늘의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공관 복음에 늘 함께 등장합니다.

복음서마다 이야기의 길이는 다르지만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 안에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자리합니다.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는 형태입니다.

아마도 두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는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처럼 전해지고 그것이 그대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충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청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회당장이 자신의 딸에 대하여 방금 죽었습니다.’고 말함으로써 치유 이야기가 아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는 손을 얹어 주시기를 청합니다원문에는 손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의미를 살려서 한 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혈하는 부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낫습니다.

그는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 만으로도 자신의 병이 낫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두 이야기는 회당장과 부인의 굳은 믿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한 손으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그분의 옷을 만지는 것 만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야기가 보여 주듯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9,18-26)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0~21)

 

여기에 '그때에'에 해당하는 '카이 이두'(kai idou; and behold)는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는 기사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의 삽입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수님께 다가와 옷자락의 술을 만진 여자가 앓고 있던 병은 '혈루증'(hemorrhagind)인데, 이것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증세를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으로서 레위기 15장 25~27절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간주된다.

 

또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만 부정한 것이 아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았으므로, 위의 유다인의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그분의 옷자락의 술을 만지려고 한 행위는 거의 목숨을 건 시도였다.

 

그러나 그 여자가 겪어 온 12년간의 육체적 고통과, 그에 못지 않게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고,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소외되는 고통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자락의 술만이라도 만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마태9,21)은 그 여자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결국 12년간 그 여자가 겪은 고통은 예수님이라는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하고, 그분을 직접 만나게 하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그 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 나아오며, 그리고 나와서 그분의 옷자락의 술이라도 만지는 믿음을 가지라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신호(sign)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에게서 어떤 비관론적 인생관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21절에서 '만약'(if)에 해당하는 '에안'(ean)은 번역하지 않았고, '대기만 하여도'의 '만'으로 번역된 '모논'(monon; only; but)이 나오는데, 이것은 '유일하게', '오직', '다만'이라는 뜻의 부사로서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그 일만을 하여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여자의 믿음이 매우 확고하였음을 잘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의 술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한 것을 미신적인 믿음으로 그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하느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 인격적인 믿음으로 묘사하고 있다(마태9,22).

 여기서 그 여자의 혈루증과 예수님의 겉옷은 '인간의 부정함'과 '하느님의 거룩함'의 상징물로 대조되고 있는데, 인간 자신의 부정은 오로지 하느님의 거룩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9장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믿음으로 만진 손'을 가진 그 여자를 찾으셔서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구원하였다'에 해당하는 '세소켄'(sesoken; has heald; has made whole)은 영적 구원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구원하다'라는 뜻의 '소조'(sozo)를 원형으로 취한다.

 그 여자의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믿음은 자신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구원하는 결과를 나은 것이다.

 

 

 


   

  20250707일 월요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 독서의 배경은 야곱이 형의 미움과 살해의 위협에서 벗어나 살고자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사는 사람, 곧 집에 머물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창세 25,27 참조) 여행 자체가 커다란 시련이고 장거리 여행에 이미 지쳤을 것입니다.

형의 미움과 분노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며 풀이 죽어 있었고, 처음 겪는 여행에 지쳤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에, 또 언제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희망마저 사그라든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이전까지는 아버지의 믿음을 배우고 함께 나누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을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고난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고 있는 야곱을 당신 힘으로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은 야곱에게 눈물겨운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주님께 드리는 서원의 내용을 보면 지금 당장 겪는 어려움, 곧 양식, 보호 등만을 이야기하는 점으로 보아 당장 필요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없는 것에 아쉬움이나 부족함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좁은 식견을 훨씬 뛰어넘어 풍족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해 주신 미래에 대한 약속은 그가 더 높은 곳, 더 넓은 곳을 바라보며 희망 속에서 삶의 여정을 계속 걸어가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에페 3,20)이십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 딸에게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죽은 이를 살리시는없음(먼지)의 존재를 있음(하늘)의 존재로 하실 수 있는 그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회당장이다.

 

(요한5,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손을 대었다~'를 직역하면 아교로 딱 붙이듯~‘손을 붙였다입니다. ‘올인’ 이지요.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곧 과부 룻을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리는 구원의 옷자락(마태1,5 룻기3,9) 알몸으로 버려진 이를 덮으시어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사랑자비의 옷자락(예제16,8)입니다또한 그 옷자락은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가득한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사6,1참조)입니다.

하혈병 여자가 그 전능하신 사랑자비의 옷자락을 꽉은 것이지요딱 붙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말씀 안에 가득한 하느님의 말씀그 약속을 알아야 받는 사랑자비구원인 것입니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용기를 내어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병행복음 마르코(5,38)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한다고 전합니다.

지금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병의 치유(기적기도 응답을 바라며 찾는 치유 피정이나 기도회의 모습과 비슷하지요 (마태24,23~참조)

 

24 “물러들 가거라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 *안에서는죽음은 깨어날 잠인 것이고질병은 건강하게 될 징조일 뿐인 것이고죄는 용서로()이 되기 위한 과정인 것이지요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말입니다.

 

(2코린5,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생명(창조)의 손이 죽음()의 손을 잡아 하나가 된 것그 하나 됨으로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입니다창조의 새 창조인 것입니다.

 

(갈라6,15) 사실 할례(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말씀을 깨달음이 아닌 소문사람의 말로 듣고사제의 옷자락을 잡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그렇듯 소문으로 잘못 듣고 본눈 멀고 말 못하는 이들의 치유하심이 다음 절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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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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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제자 파견(派遣) (마태10,1-7)25.07.08조회 16[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수확할 일꾼 (마태9,32-38)25.07.07조회 12[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9,18-26)25.07.06조회 17[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증언할 것이다 (마태10,17-22)25.07.04조회 15[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9,9-13)25.07.03조회 18[성 토마스 사도 축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20,24-29)25.07.02조회 54[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마귀와 돼지 떼 (마태8,28-34)25.07.01조회 51[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 (마태8,23-27)25.06.28조회 48[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라. (마태8,18-22)25.06.27조회 9[성모 성심 기념일]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2,41-51)25.06.27조회 14[예수 성심 대축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루카15,3-7)25.06.26조회 14[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 (마태.7,21-29)25.06.23조회 10[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내 이름으로 모인 곳 (마태오18,19ㄴ-22)25.06.23조회 10[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 (루카1,57-66.80)25.06.23조회 10[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7,1-5)25.06.22조회 10[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6,24-34)25.06.20조회 13[연중 제11주간 금요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6,19-23)25.06.19조회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