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30일 월요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라. (마태8,18-22)
제1독서<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18,16-33)
사람들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을 16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화답송>시편103,1-2.3-4.8-9.10-11(◎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
○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
복음<나를 따라라.>(마태8,18-22)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창세18,16-3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3-26)
'다가서서'로 번역된 '와익가쉬'(waiggash)의 원형 '나가쉬'(nagash)의 기본 뜻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가다'(창세27,27; 2사무1,15), '접근하다'(민수4,19; 사도20,21)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대면하여 서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더욱 하느님 앞으로 다가섰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 성을 향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을 가졌는지를 반영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친밀함과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얻기 위한 간절함이 들어있는 행동이다.
시편 73장 28절의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 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8장 23절의 '의인'에 해당하는 '차디크'(tsadiq; the righteous)는 '의로운'(창세20,4; 시편116,5), '옳은'(잠언25,26; 이사41,26)이란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사람'(탈출9,27; 잠언18,17), '옳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이사41,26), 특히 '의롭고 흠없는 사람', '하느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사람'(창세6,9; 시편5,13)이란 의미로 쓰였다.
즉 의인의 기준은 성품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하느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대로 '악인'에 해당하는 '라샤'(rasha; the wicked) 역시 일차적으로는 '사악함'(시편5,5), '불의'(잠언4,17), '죄악'(시편125,3; 에제7,11)을 뜻하는 말이나 하느님의 성품과 그의 뜻에 위배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쓸어버리시렵니까'에 해당하는 '싸파'(sapa)는 '밀다'(이사7,20), '잡아채다', '빼앗다'(이사40,15), '치다'(1사무26,10)라는 뜻으로서, 어떤 쌓여 있는 사물을 '휩쓸어 파괴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가 하느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파괴시켜 버리다'(destroy), '쓸어 버리다'(sweep away)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차원에서 창세기 18장 23절은 하느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거나 쓸어 버려서는 안된다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호소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창세기 18장 24절에서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데, 먼저 의인 쉰명에서 시작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동성 연애 때문에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유보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그가 이처럼 쉰 명에서 시작한 것은 소돔과 그 인근 성읍(고모라, 아드마, 츠보임, 초아르; 창세기 14장), 즉 다섯 성읍들에서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열 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창세13,12) 전체 인구는 많았고, 그 가운데 쉰 명은 지극히 적은 수였기에 이 정도의 의인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송봉모 신부님의 아브라함에 관한 글에서는 그 당시 소돔 성읍의 인구를 만 명 정도로 본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성의 구원을 호소한 것은 의인 쉰 명이라도 크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혹시 ~있다면'으로 번역된 '울라이 예쉬'(ullai yesh)에서 '울라쉬'는 '아마도' 라는 뜻이며, '예쉬'는 '~이 있다'(there is)란 뜻이다. 직역하면, '아마도'(쉰 명은)있을 것입니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심섞인 추측을 반영하는 말이다.
즉 그많은 소돔성의 인구 중에 설마 쉰 명이 없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용서하다'에 해당하는 '나사'(nasa)의 기본적 의미는 '들어 올리다'(예레4,6; 에제3,14)이고, '(사람의 머리를)들다'(욥기10,15; 즈카2,4)라는 뜻도 있다.
이것은 죄인의 머리를 들게 해주는 것이나 죄벌의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들어 올려서 다시 높여 주는 행위가 모두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관련이 있기에, '용납하다', '사유하다', '용서하다'(창세13,6.7; 미카7,18; 탈출10,37참조)란 뜻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곳 전체'에 해당하는 '레콜 함마콤(lekol hammaqom; all the place; the whole place)은 '콜'(kol)이 '모두', '다', '전체'(창세2,2), '모두', '전부'(신명1,22)라는 뜻이 있으므로, 이것은 '의인 뿐만 아니라 악인도 거주하는 모든 성읍(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세기 18장 26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제시한 조건(창세18,24)을 기꺼이 수락하고 풍성한 자비를 약속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이 약속은 죄인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하느님도 아브라함도 여섯 번의 흥정을 통해 이토록 서로 자비에 호소하고 자비를 표출하지만, 기어이 자비를 받아 입을 만한 의인들이 없어 불과 유황의 징벌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원리를 볼 수 있다.
즉 의인으로 말미암아 악인도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원리는 단 한 사람 뿐이었던 의인 예수님, 무죄하신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십자가 사건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로마5,18; 에페2,8.9).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아버지의 장례조차 허락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따르라는 이 말씀이 너무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자녀에게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믿음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가치들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가치와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부딪치게 될 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운 말씀’이라고 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여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보다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정치적인 의견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 더욱 앞섭니다.
체면과 자존심, 다른 이들의 평가가 더욱 앞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신앙을 먼저 선택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과 타협하면 안 되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함께 계시고, 그 길의 마지막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이 모든 이에게 소중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9,57-62) *병행복음 묵상글을 올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실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곧 죄인들의 죗값으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확실한 진리의 길이다,
그러나 오를 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모르고 따르겠단다. 그저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을 따르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라 생각한 것이다. 신앙의 목적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의 진리임을 모르는 신앙생활을 한다.
(1베드1,9)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모르면서 성당에 다닌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받는 용서를 모르고 그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구원, 하늘의 생명을 받는 것을 모르고, 그러니 자기 열심, 자기 의로움으로 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부린다.
58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 가난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 그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구원의 진리로 믿는이가 없다는 것이다.
(콜로1,18)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코린6,15)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탕녀의 지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신앙의 올바른 목적지부터 ‘찾으라’ 하신다. 헛된 신앙생활를 ‘버리라’ 하시는 것이다.
과녁을 벗어나다- 하마트리아-죄(罪)
59ㄱ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 앞절, 그 신앙의 목적지, 과녁을 벗어난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59ㄴ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죽은 이를 위한 신앙생활이 아닌 그 죽은 이, 곧 죄인을 살리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신앙을 살라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의 생명(진리)을 갖지 못한 사람을 어둠(죄)으로 죽었다고 한다.(갈라3,22참조) 그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이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 복음이다.
(마태4,23)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 모두 용서로 살려 주셨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복음,
(이사53,4-5) 4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루가4,18-19.21)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61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쟁기에 손을 댄 사람~
(집회38,25) 25 쟁기를 다루면서 막대기 휘두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황소를 몰면서 *자기 일에 몰두하며 송아지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겠느냐?
= 자기일,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사람, 곧 제사밖에 할 줄 모르는 자가(황소, 송아지는 제물) 하늘의 구원의 지혜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제사는 십자가에서 단 한번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돌아보는 자,
(창세19,17.26) 17 그들(천사)은 (화려한 삶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26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신앙을~ *그 헛된 죽음의 신앙을~ 그리고 *세상이 주는 편안의 삶을 돌아보면 재앙이다. 곧 하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의 길, 그 생명의 말씀(물) 신앙에서, 제사 그 피의 신앙으로 돌아가면 재앙이다. 그것이 물이 피로 변한 곧, 생명이 죽음이 된 이집트의 첫째 재앙이다.(탈출7,14~)
(갈라3,3)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생명)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죽음)으로 마칠 셈입니까?
= 그 죽음의 문화, 죽음의 신앙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돌아보면 인된다.
(갈라5,1)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죽으셨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아멘.!!!
♣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투신의 삶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8,21) 따르겠다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8,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은 한 인간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중요하고 급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삶의 우선순위와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중심과 순위가 뒤바뀌는 순간 인생은 하느님과 무관한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행하는 것을 인간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할 때 우리는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에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느님을 품고 행하고 만나야 하며, 무엇이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였던 장례 의무까지도 무시하시며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유일무이한 시간에로 초대받았으며 그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워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또한 예수님에게나 제자들 모두에게 급박한 까닭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은 무덤을 파주는 사람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 생명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말로써 험담과 거짓과 중상모략을 하고, 죽음의 문화에 동참하는 행동을 하며,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 온갖 탐욕적인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지니면서 역설적으로 반생명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면 죽은 이들의 장사를 지내는 죽은 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과거에 집착하거나 과거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 과거를 현재화(아남네시스)하고 미래를 현재화(프로렙시스) 하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은 바리사이나 루카복음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사사건건 ‘왜?’라는 물음을 자주 던지고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과거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미래에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을 내 삶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이나 베드로처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은총과 뜻을 헤아리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안일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안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해야겠습니다. 이 절박한 은총의 때를 뒤로 제쳐두고 나를 위한 현세적이고 육적인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오늘도 과거의 추억이나 상처에 파묻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사’를 치르는 ‘죽은 이’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25년 06월 30일 월요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독서에는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의 협상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을 구하려는 아브라함의 절박함은 탁월한 협상가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하느님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공정”(창세 18,25)의 논리로 자비를 청하면서 하느님을 설득하려 애쓰는 아브라함의 간절함도, 그의 말에 설득되신 듯 짐짓 양보하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의 독백은 아브라함과 당신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에게 당신 마음을 털어놓으시며 그를 당신 계획을 논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간절하며, 주님의 약속대로 다른 민족들을 위한 축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진실한 기도가 정말로 다른 이들을 악에서 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면서 중요한 신학적 원칙 하나를 제시합니다. 곧 의로운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칙은 단연 탁월한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돌아가실 때 결실을 거둡니다.
공동체를 죄와 악에서 구하려면 의인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앞에 머물러 기도하면서 모든 인류를 위한 기도의 중재자들이 되라고, 또 그들의 구원을 위한 의인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먼저 저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이 사명에 충실하겠다고 오늘 새롭게 다짐합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건너야 하는 신앙(信仰)
(마태8,18-22)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 건너편으로 가라(파스카) 앞절에서 보았던 선이 악을 대속하고 생명을 주시는 그 하나. 그 진리의 한 말씀(법, 계명)을 뱀(악)의 유혹으로 선과 악, 도덕과 윤리, 그 둘의 법으로, 인간의 계명으로 말하는 그 거짓말, 거짓 가르침으로 열병을 앓아 누워있는, 죽어있는 그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 곧 인간의 법, 계명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길(진리)로 건너가라(파스카)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군중이 아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놓치면 안된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선택한 이들, 곧 교회(聖徒)에게 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요한15,16)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 그러니 교회(우리)가 반드시 그 파스카의 길을 가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는 가려 하지 않기에, 아니 갈 수 없기에 하느님처럼(탈출3,7-8) 예수님께서 건너가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도덕과 윤리, 그 사람의 길이 아닌 선이 악을 대속하고 생명을 주는 그 진리의 길로 반드시 파스카(건너게) 시키시겠다는 의지이신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께서 ‘나’라고 하심은 죄를 대속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善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시다. 그 파스카의 신앙이 안되면? 곧 말씀을 문자 그대로 도덕과 윤리로 보면, 예수님을 박해하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갈라1,11-14)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티토1,14) 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어디든지?, 자신의 뜻,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 인간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또 자신의 의로움,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는 절대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이다.(코헬7,20 시편14,1- 로마3,10- 참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신의 뜻, 명예를 부인하는 길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23,1-4) 1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3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대부분 이 부분만을 기억하고 좋다고, 간다고 한다) 4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 *주님의 막대와 지팡이- 곧 주님의 말씀으로만 아쉬울 것이 없고, 말씀으로만 생기(힘)와 위안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다. 재앙(시련, 고난)의 길도 있을 터인데 주님의 말씀으로 그 시련,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것이다.
사실은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 3절 까지만 보면서 주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 헛된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이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 주님을 나의 주인, 머리로 곧 그분의 말씀을 위안으로, 생기로, 진리로 의지하는 이들이 없다는 말씀이시다.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혜, 생각으로 받아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한 그 각자가 머리로 살아가기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그들의 머리로 계실 곳이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 생명, 빛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그분의 지체가 되지 않는 모든 사람, 세상을 성경은 죽어야 할 惡이라고 하신다. (1요한5,19) 그 죽음으로 장사(葬事) 지내야할 아버지, 그 세상적 생각, 그 죽음의 길을 따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신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르는, 그래서 각자가 자기 생각으로, 머리로 자신만을 위해 사는, 그 머리 노릇으로 죽어야 할 우리를 살리시려 머리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지체들의 교만, 그 죄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교만의 죄 값을 다 치루시고 죽으신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그런데도 그 예수님을 믿는다(따른다)는 많은 이들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 그 사람의 가르침을 옳은 말, 길로 고집하기에 다음절이 그 죽음을 부르는 호수(세상)의 물(말)이 배(교회)에 가득 찼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사람의 생각, 계명, 길에서, 하느님의 뜻인 진리의 길로 건너가는(파스카) 신앙으로 현세에서 부터 하늘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