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14일 토요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아예 맹세하지 마라. (마태5,33-37)
제1독서<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습니다.>(2코린5,14-21)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화답송>시편103,1-2.3-4.8-9.11-12(◎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복음<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5,33-3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코린5,14-2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0)
화해하게 하는 사도로서의 직책을 받은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5장 20절에서 코린토 교인들을 향해서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직설적인 권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직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여기서 '사절입니다'로 번역된 '프레스뷰오멘'(presbeuomen; ambassadors)의 원형 '프레스뷰오'(presbeuo)는, '노인', '원로', '장로' 라는 뜻을 지닌 '프레스뷔스'(presbys)에서 파생되어 '노인이 되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후기에는 '사신이 되다', '사절이 되다', '대사가 되다' 라는 뜻으로 전용되었고, 여기서도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 시대의 파피루스나 비문등에서도 이 표현은 '황제의 사절이 그 직책을 수행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등장하는데, 바오로는 이러한 위엄있는 단어를 자신의 고귀한 직책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바오로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사절이라는 점은 '그리스도의'로 번역된 '휘페르 크리스토'(hyper Christu)라는 전치사구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것은 본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라는 뜻이다.
'~의', '대신하여' 로 번역된 전치사 '휘페르'(hyper; for)는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직책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황제의 사절이 황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로서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들어,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리스도의 메시지, 곧 복음을 전달하는 자로 그리스도의 권위와 권력등을 위임받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사절(대사)의 자격으로서 코린토 교인들을 향해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라고 권면한다.
이 편지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코린토 후서 1장 1절에는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와 온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로 나오므로, 여기서 화해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한 거듭남(새로남)과 회심의 차원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좀 더 의화를 통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서, 하느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를 누리기를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주님을 몰랐을 때의 과거의 어두움으로 돌아가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현재의 은총과 품위와 자격을 잘 간직하고, 은총을 성장시키기를 바라는 성화의 관점에서 "하느님과의 화해" 를 거론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이 코린토 교회 성도들이 아니라 일반 세상 사람들에게, 바오로가 화해케 하는 직책을 받은 자로서 그의 사목 현장에서 그와 같은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22)
코린토 후서 5장 22절은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의로움을 소유하게 하여 성도들이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음을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무죄함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구속 사업을 수행하실 완전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로마서 8장 3절에서 바오로는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차단하셨습니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코린토 후서 5장 22절의 사상을 피력한 바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 복음 8장 46절에서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자신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천명하신 적이 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도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라고 언급하여 그리스도의 무죄성에 대해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그가 하느님으로서 존재하실 때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성과 더불어 완전한 신성을 지니셨던 육화(강생)의 상태로 계실 때에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죄인으로 만드신 것'으로 표현하지 않고, '죄'(hamartian; 하마르티안)로 만드시어' 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드셨다면,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속 사업 계획이 무효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로 만들었다는 바오로의 언급은 단적으로 죄있는 인간의 육신의 모습으로 육화하게 하신 강생 사건과 결부된 표현으로서, 죄없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실제로 죄인처럼 취급되어 하느님의 의노를 한 몸에 받으신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상 죽음이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증하는 유일한 표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는 '히나'(hina) 가정법 구문으로 구성된 본문은 하느님께서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왜 죄로 만드셨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와 죄인인 인간과의 결속에 근거하여 우리를 단죄의 심판이 가져다줄 종국적 파국에서 건져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의로움'(dikaiosyne theu; 디카이요시네 테우)은 '죄인을 내면적으로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지위와 신분', 즉 '의화'(justification)를 뜻하는 것이다(갈라3,13.14; 필리3,9).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고, 그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의로움은 우리의 것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로마8,1; 8,38.39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리라는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주님을 두고 하는 맹세입니다.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 하느님을 증인으로 하는 맹세이기에 거기에는 어떤 거짓이 들어가서도 안 되고, 하느님과 한 약속은 성스러운 의무로서 꼭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느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없을뿐더러, 하느님을 두고 맹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이름 대신 하늘이나 예루살렘을 두고는 맹세할 수가 있었고, 그런 맹세가 남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늘이 하느님의 어좌이고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사 66,1-2 참조)이라면,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은 사람들 사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도 그렇게 쉽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예.’와 ‘아니요.’로 대답하는 것이 어렵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엇에 ‘예.’를 하고, 무엇에 ‘아니요.’를 해야 하는지 구분하는 것이 어렵고, 또 ‘예.’라고 대답한 것을 실제로 내가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며,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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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맹세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으로 확장하십니다. 맹세 자체를 금지하시면서 거짓 맹세를 못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맹세는 자신이 진실함을 보증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안다면, 맹세 행위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누구도 어떤 진리에 대해서 하느님을 걸고 맹세할 만큼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한 말에 오류가 있다면, 내가 한 맹세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도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지 기억한다면, 내일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맹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26,34-35)라고 맹세합니다. 이 무책임한 맹세는 거짓 맹세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마르 14,71). 맹세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반대로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기 자신까지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맹세 대신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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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주님! 저희 입술이 당신의 입이 되게 하소서.
(마태 5,33-3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맹세-샤바(일곱번 말하다) 계약, 약속, 기둥(나무 기둥) 곧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계약, 약속인 것.
창조를 말씀으로 하시는데, 그 말씀이 완성하신 6일로 안식(7)을 얻는 것.
(창세2,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사람은 엿새 날에 창조 되어 바로 안식(7)을 맞는다. 안식은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하신 것으로 사람이 그 안식에 무엇 하나 보탠 것이 없다. 그렇듯 맹세(샤바)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위19,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 하느님의 이름(뜻) 안에서 거짓을 위해 7번 말하지 마라 그러면 내 이름(뜻)이 더러워 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사람의 뜻으로 거짓 되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例(마태5,21-22)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이 말씀을 이웃과 형제에게 화내고 욕하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로 , 인간의 계명으로 받아 열심히 지켜 자기 의로움으로 챙겼다면 하느님의 말씀, 계명인 그분의 사랑, 의로움. 그 진리를 헛되게 하는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이사64,5 티토1,14참조) 여기서 형제는 예수님(요한20,17참조)
(1요한2,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형제이신 예수님께 그분의 대속, 그 죽음이 바보짓, 멍청이짓 이라고 화를 낸다면 재판(심판)에 넘겨져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는 맹세-옴무(선언) , 지도자들에게 ‘거짓으로 선언하지 말아라, 가르치지 말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 하늘, 하느님의 옥좌, 하느님의 발판인 땅, 예루살렘, 예루(가르키다)+살렘(평화), 모두 하느님의 현존, 평화 안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모두 하느님의 맹세로 이루어 지는 것이지요. 샤바-일곱번 말씀으로 계약, 약속 기둥인 십자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잠언9,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 그렇듯 맹세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 우리는 그 하느님의 맹세로 맹세가 되어지는~곧 하느님의 맹세가 이루시는 평화와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 우리는 맹세 자체를 할 수 없는 존재 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맹세는 반드시 이뤄지지만 인간의 맹세는 배반으로 드러납니다.
(탈출6,7-8) 7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너희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이집트의 강제 노동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8 그런 다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 차지로 주겠다. 나는 주님이다.’”
그리고 배반의 맹세~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 라면 제 목숨까지 내 놓겠습니다.’합니다.(요한13,37)
그 후 예수님(사형수)의 제자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마르14,71)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니~~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머리의 생각, 그 마음은~
(에레17,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노아의 홍수 후~
(창세8,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 그 향내- 앞 20절에 정결한 제물 곧 정결하신 예수님의 죽음, 그 피로 저주가 없어지는 것.
그러니~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예’- 나이(진리). ‘아니오’- 우. 진리는 '진리'라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오'라고 만 해~ 곧 진리만 말하는 말씀. '너희의 말 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전해~'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29,1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잠언21,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티토1,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아멘.
2025년 06월 14일 토요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은 맹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느님의 소유이고 그분의 권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자기 머리카락의 색깔 정도는 자유롭게 바꿀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몸과 영혼 전체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맹세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믿음, 하느님의 것에 대해서까지 힘을 행사하고 싶은 의지를 내포합니다.
술과 분위기에 취한 헤로데가 헤로디아의 딸에게 경솔한 맹세를 하고, 그 맹세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이르는데, 이는 허튼 맹세의 결말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맹세란 어떤 일을 꼭 실행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내는 일로, 상대방이 자기 능력을 신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는 맹세가 아니라 정직과 진정성에서 나옵니다.
자기 능력이나 권한에 의지하는 맹세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지하는 겸손이 오히려 신뢰를 주지요.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굳이 거창한 대상을 동원해 가며 맹세하지 말고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마태 5,37) 하기는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삶이 무미건조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뜻합니다. 신
앙인은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정직하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순수함과 진실함이, 말과 행동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