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7주간 토요일] 참된 증언 (요한21,20-25)

2025. 6. 6. 오후 12: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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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7일 토요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참된 증언 (요한21,20-25)


   


1독서<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사도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화답송>시편11,4.57(7) 주님,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늘에 있는 주님의 옥좌에서, 당신 눈으로 살피시고, 당신 눈동자로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주님은 의인도 악인도 가려내시고, 그분의 얼은 폭행을 즐기는 자를 미워하신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라.

 

복음<그의 증언은 참되다.>(요한21,20-25)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28,16-20.30-31)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2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아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된 것은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하고 있던 것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 유력자들을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청한 것도 일차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그 이스라엘의 희망' 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이 '희망'이라고 번역된 '엘피도스'(elpidos)라는 용어의 개념은 사도 바오로가 유대아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 중에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는데 (사도23,6; 24,15; 26,6.7), 그것은 곧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약 성경 약속들의 성취'를 의미한다(사도26,6.7).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나자렛 예수에게 그 희망이 성취될 수 없다고 믿는 유대인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 희망'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해 죄수의 몸이 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점들을 해명하고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을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끝까지 전하고자 하였던 “이스라엘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행전은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로마에서 바오로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친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사명에도 들어맞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바오로 사도가 전한 이스라엘의 희망이며, 온 인류의 희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의 선포는 교회 역사 안에서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집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지막인 요한복음 21장 20-25절은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증언되고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며

공동체 안에서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을 다시한번 떠올립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아버지 하느님의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기록된 말씀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예수님. 그분께서 바로 우리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우리를 먼저 초대하셨고, 이제 모든 이에게 이 은총의 선물이 전해지도록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부르십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네

 

(요한21,20-25)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온갖 질투, 미움, 분노 등이 일어난다. *저주의 시몬에서 주님의 사랑, 은총으로 반석이라는 이름을 받은 베드로가 동료 제자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앞18절에서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고서도 여전히 자신으로 차 있는 모습이다. 우리의 모습이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의 어린양, 곧 하느님의 사랑,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끝까지 어둠(시몬()의 모습으로 폭로되고, 그 어둠의 존재를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먹이시고 섬겨주시는 빛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결론으로 부각되면서 끝을 맺고 있다. 한쪽(인간)은 계속 실패했는데, 한쪽(주님)은 집요하게 아침까지 싸들고 쫓아다니신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15절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이들- 곧 배와 그물과 기타 고기 잡는 도구들, 그리고 고기 잡는 행위, 이것들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모두에 “예”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며(고통스러워하며) “그 사랑, 주님이 아시쟌아요” 하며 자신 없는 대답이었음을  묵상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자신을 했었다. 사랑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랑의 확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도한 삶을 살다보니 점점 ‘나는 안 되겠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주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면 제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몬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여정 속에 있는 우리의 실존이다.

사랑은 하나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에페3,16)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 하늘의 그 사랑이 나를, 이웃을 살리신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쟌아요.”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그 사랑을 진리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분 사랑 안에서만이 다른 이와의 비교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

너도나도 그분 앞에서는 죄인, 없음의 존재로 그분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우리의 피난처이다.

 

☨ 은총의 천주 성령님! 하느님 사랑에 저희 모두가 “아멘”하게 하소서~~아멘!!!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요한21,20~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

 

요한복음 21장 25절은 과장법에 의한 수사학적 표현인데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요한복음 사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지식조차도 모두 기록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그대로를 다 기록했다면그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했을 것이다하느님께서는 4복음서 저자들에게 그 책을 기록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주셨고각 저자들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지식과 능력을 사용해서 많은 내용들 중에 꼭 필요한 내용만을 취사 선택하여 하느님의 의도대로 기록한 것이다.

 

둘째로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온전히 담기에는 부족했다고 알아들을 수 있다.

 

세째로자신의 한계이자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일을 기록하는 작업의 한계를 인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 아니며또한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의 내용이 부분적이므로요한 복음사가가 함께 했던 교회 공동체가 요한복음에만 한정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왜 한 제자에 의해 단 한권의 책으로 기록하게 하지 않으시고세 권의 공관복음서를 쓰게 하시고 난 뒤에 다시 요한 복음사가를 통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한다.

 

사실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늘 예수님과 동행했고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70년 정도를 더 살면서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많은 사목을 하였다그러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21장 25절을 통해 요한 복음서를 다 기록한 뒤에 보여 주는 모습은 하느님 역사의 광대무변함과 그분의 크신 사랑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20250607일 토요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두 사도를 보여 줍니다.

그 둘은 주님께서 자주 함께하셨고 주님 승천 뒤에도 자주 함께 움직이던 제자들입니다(사도 34장 참조).

마지막 만찬 때는 요한을 시켜 주님께 여쭈었던 베드로(요한 13,23-25 참조)가 이제는 자신이 직접 주님께 여쭙고 요한은 침묵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이 살아 있기를 바라실 만큼 주님께 그는 각별한 존재였을까요?

그런데 그가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요한 스스로 딱 잘라 말합니다.

실제로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주님 승천 뒤 칠십여 년을 더 살다가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늘 복음의 구절이 신앙인의 삶에서 보이는 두 가지 모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곧 베드로는 지상의 시간에 남아 있는 삶을, 요한은 영원한 하늘 거처에 사는 삶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요한 복음 강해참조).

다시 말하여 베드로는 순교의 길로 주님을 따르도록 불렸고, 요한은 높은 곳에서 말씀의 신비를 꿰뚫는 관상이 완전해지도록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설교집참조).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에게 중대한 사명을 부여하시고 그를 새롭게 부르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새롭게 부르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1,22)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마땅히 고통이 따르겠지만 저마다 가는 길은 다르니, 남의 사정을 깊이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길에 충실해야 합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너나 잘하세요.

 

복음(요한21,20-25)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다른 이와 비교하는 삶을 산다. 누구는 나보다 착하지도, 신앙생활도 못하는 것 같은데 축복은 많이 받네? 혹은 아무개는 착한데 시련이 끊이질 않지?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너무하신 것 아닌가?

그리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데 복음은 들어보지도 못한 우리 선조들은? 오지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며 하느님이 공평하신 분이 맞냐고 하느님의 뜻은 알 수가 없다며 따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걱정하시고 해결 하셔야 할, 아버지의 일이지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걱정한 만큼 기도하는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 성경을 파고드는가? 나 자신의 구원의 확신도 없으면서 오지랍을 부리는 것이다. *예전에 내 모습을 적어봤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가?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며 놀라운 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 ‘한 처음에’ 가 그 1절 전체의 뜻을 품고 있고, 그 한절이 1장 전체의 뜻을 말하며, 그 한 장이 창세기 전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창세기 안에 성경 전체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한 처음’의 히브리어 ‘베레시트’는 ‘타우(완성), 씬(구별), 알레프(하느님), 레쉬(시작), 베잇(성전)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 ’한 처음, 베레시트‘는 ’하느님께서 성전 짓기를 시작하시고 완성하셔서 구별하여 주셨다.‘가 ’한 처음‘인 것이고 성경 전체의 핵심인 것이다.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는 것이고,(요한2,19-21) 우리가 그분의 성전 이 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기에(1코린6,19-20) ~ <성전은 하느님 나라를 모형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에 다 그 십자가(十字架)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때, 모든 말씀의 결론이 십자가로 끝나야 한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독서(사도28,17)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 바오로의 서간을 보면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十字架)만을 진리로 썼다. 바오로는 많은 말, 많은 일을 하고, 결론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리로’ 귀결 시켜 말했기에 유대인들의 죄수가 된 것이다.

즉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의 결론을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의(義)를 믿어 거저 받는 구원’이 아닌 인간의 관습에 따른 인간의 의로 결론지어 말하면 하느님의 죄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어 이 방향, 저 방향, 이 관점, 저 관점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래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들, 그리고 사 복음(福音)과 서간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유혹들, 거짓 가르침들이 난무하기에 말씀을 진리로 깨닫고 지키기가 힘들다.

진짜보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 가짜가 교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수했던 옛 사람들의 믿음이 참일 수 있다)

 

(2코린11,13-14) 13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14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 누가 참 빛인지, 가짜 진리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르침을 들으면 ‘베로이아 사람들’처럼 사실인지 성경에서 확인해야 한다.

 

(사도17,11) 11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 진리(알레떼아)라는 단어에 망각(레테) 이라는 뜻이 들어있듯, 우리 인간은 진리를 깨닫고도 쉽게 잊어버리기에 자주 성경을 보고, 또 보고, 되새기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게 된다. 또한 다른 이에게 참 진리를 전하게 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진실된, 올바른 진리의 기도를 하게 된다.

 

<사제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에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영원하지도 않은 내, 외적인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 불완전한 행복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행복은 어떻게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내 삶의 목적이 예수님’이 되면 저절로 행복은 따라 옵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목적이 되면 하늘나라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목적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나를 만나 예수님도 행복했나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어리고 이기적이며 모자라는 나를 따듯한 이해로 안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완벽한 사랑을 찾았습니다. (가요, 남녀 간의 사랑 노래를 주님과의 사랑노래로 듣고 쓴 고백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도 이끌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저희 모두의 마음에 성령이 불을 놓으시어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내버려두지 마소서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하나 되기를 - 요한복음 21장 15~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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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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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세상의 소금과 빛 (마태5,13-16)25.06.09조회 22[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기념일]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19,25-34)25.06.09조회 55[부활 제7주간 토요일] 참된 증언 (요한21,20-25)25.06.06조회 30[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나를 따라라.” (요한21,15-19)25.06.05조회 22[부활 제7주간 목요일] 하나 되게 (요한17,20-26)25.06.04조회 11[부활 제7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 (요한17,11ㄷ-19)25.06.03조회 10[부활 제7주간 화요일] 영원한 생명이란 (요한17,1-11ㄴ)25.06.02조회 16[부활 제7주간 월요일]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한16,29-33)25.06.01조회 12[부활 제6주간 토요일]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요한16,23ㄴ-28)25.05.29조회 11[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 (요한16,20-23ㄱ)25.05.29조회 11[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한알의 밀알 (요한12,24-26)25.05.29조회 9[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靈) (요한16,12-15)25.05.28조회 12[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 성령 (요한16,5-11)25.05.26조회 17[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 (요한15,26-16,4ㄱ)25.05.25조회 17[부활 제5주간 토요일] 나를 보내신 분 (요한15,18-21)25.05.23조회 18[부활 제5주간 금요일]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17)25.05.22조회 19[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15,9-11)25.05.22조회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