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12일 목요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먼저 화해하여라. (마태5,20ㄴ-26)
제1독서<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3,15-4,1.3-6)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화답송>시편85,9ㄱㄴㄷ과 10.11-12.13-14(◎10ㄴ) ◎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0ㄴ-2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10주간목요일 제1독서 (2코린3,15-4,1.3-6)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7-18)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후 데 토 프뉴마 퀴리우, 엘류테리아'(ho de kyrios to pneuma estin, hu de to pneuma kyriu, eleutheria)
'주님은 영이십니다'(ho de kyrios to pneuma estin)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느님과 본체론적으로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코린3,6) 라는 주장을 여기서도 일관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대조하고, 문자와 성령을 대조하며, 새 계약인 복음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15장 45절에서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고 사도 바오로가 말하면서 창세기 2장 7절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의 기록을 확대 인용한 데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즉 코린토 후서 3장 17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이는 문자가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서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는 즉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는 탈출기 34장 30절의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 언급된 "자유"라는 주제를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대조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곧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 자신도 역시 회심하기 전에는 당시의 유다인들의 교만과 패역무도함을 그대로 답습했던 자였지만, 다마스코스 도상에서 '살려주는 예수의 영'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결국 이러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바오로는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갈라티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라고 바오로는 언급한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코린토 후서 3장 16절에서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치워지는 너울의 자유'란 결국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곧 가장 축복된 영적 자유'를 말한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8)
여기서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해 복음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는 것은 너울(수건)을 쓴 유다인들이 그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에 비교하면 크나큰 축복이요 놀라운 기쁨이지만,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드러나는 영광(로마8,18)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너울(수건)이 벗겨져 주님의 영광을 비교적 밝게 보게 되지만,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보는 때는 그분의 재림 이후며(1요한3,2), 그때는 우리가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로마8,29.30).
한편 주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이시며(콜리1,15),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1,3)이시다.
따라서 요한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라고 진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요한14,9).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 구절은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와 영화(glorification)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뀌어 갑니다'로 번역된 '메타모르푸메타'(metamorphumeta)는 마태오 복음 17장 2절과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변하였는데'로 번역된 동사로, 원형 '메타모르포오'(metamorphoo)의 현재 수동태이다.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이 사용된 것은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형상)으로 변형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메타모르포오' 동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르페'(morphe)에서 변형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외양과는 대조되는 존재의 변화, 즉 본질적 인간의 변화를 말한다(로마2,2).
그러나 본질적 인간의 변화라고 해서 인간이 신격화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인 변화가 본질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변화라고 하더라도, 신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존재론적 차이를 허무는 변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질적 변화는 죄로 인해 타락하여 희미해진 하느님의 모상(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즉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가 도래하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태조에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상(형상)과 가치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의화(義化)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화의 과정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힘입은 '이끄심'을 통해 영화(榮化)의 단계까지 실패없이 수행될 것이며, 그것은 '살려주신 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관된다.
2023년 06월 15일 목요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으로서 율법 안에 담긴 충만한 의미를 드러내려는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 의지는 이어지는 단락에서 곧바로 실현됩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48절에는 ‘–라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식의 정형화된 문구(대당 명제)로 시작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이 나열됩니다.
기존의 규정을 새롭게 풀이하며 하느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참뜻을 밝혀 주시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모습을 조명하는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그 첫 번째 가르침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는 계명을 다룹니다.
그리고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표현은 사형으로 그 죄를 엄하게 다스리는 율법의 규정(탈출 21,12; 레위 24,17 참조)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계명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뿌리를 보게 하십니다.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나 화를 원천적으로 잘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들이 살인죄처럼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지나친 풀이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 행위들이 근본적으로 살인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한 어조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그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은 언제든지 악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고 형제와 화해하는 일을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물론 사람인지라 평온한 감정만 지니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형제나 이웃의 잘못에 화가 치밀기도 하고 분노가 끓어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정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늘 그들과 화해하고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불붙는 지옥’이란 어쩌면 화해(和解)의 여지를 전혀 두지 않는 사람의 고집스러운 마음 상태를 일컫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이 ‘화해’(火海), 곧 불바다의 마음이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늘에 묶이면 자유롭습니다.
(마태 5,20ㄴ-26)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십계명의 제 오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철저히 지킨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 계명을 지킨 의로움이 아닌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차원의 의로움을 찾아라. 말씀하십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자기 형제 누구?
(요한20,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신 우리의 형제께 그분의 십자가의 길이 바보가 하는 멍청이 짓이라 화를 내며 말하면 당연히 지옥갑니다. 예수님을 모욕해서가 아닙니다.(마태12,31~참조)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지 못하니 구원의 의로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주는 의로움, 그것이 계명지킴의 자기 의로움을 능가하는 하늘의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의로움을 참이라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또 다른 살인입니다.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형제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받아 죄의식이 떠오르면~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우리 모든 죄의 죗값을 예수님(형제)의 죽음으로 다 갚으셨기에 더 이상 죄의식을 위한 예물은 없는 것입니다.(히브10,8)
그 깨달음, 그화해로~ 죗값을 위한 제사 예물이 아닌 죗값을 위한 제사 예물이 아닌 축제의 감사제(미사-에우까리스티아) 그 ‘기쁨의 예물로 바쳐라’ 하심입니다.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 형제 예수님께서 고소하십니다. 우리의 창조 목적은 구원의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것입니다.(이사43,7)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사랑하는 당신 외 아드님을 속죄 제물로 내주시어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로 다 용서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과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구원입니다.
그런데 자기 의로움으로 십자가와 상관없다고 그 예수님의 죽음과 상관없다. 말한다면 재판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고집부리지 말고 타협하라 하십니다. 사람의 계명에 의한 의로움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 곧 하늘의 의로움인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깨달아라~ 그래서 재판에서 감옥에서 나와라 하심입니다.
(마태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마지막 한닢, "에스카톨로지, 코드란테스“ 사각을 이루기위한' 마지막 한변‘이라는 뜻, 4분의 1 그 ’4의 마지막1‘입니다. 숫자3은 하늘- 숫자4는 땅이라 했습니다.(삼각과 사각의 그림으로~)
하늘- 3이 땅으로 내려와 땅의 4각의 완성을 이루는데~ 3의 찢어짐(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삼각의 꼭지점이 찢어져~ 벌어지면 마지막 한변이 남게 되지요? 그 비어있는 한변이 채워져 4각의 완성, 곧 땅의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삼각의 찢어짐이 대속(하늘)의 죽음, 그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되면 그래서 그 사랑을 자신(땅)의 완성을 위한 진리로 받아들이면 그 사랑이 마지막 한변으로 채워져 땅(4각)의 완성 곧 구원이 이루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죽음, 그 사랑이 마지막 한닢(한변)입니다. 그 사랑 하나를 깨달아 그 사랑으로 모든 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십계명의 각 계명마다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5,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인간의 사랑이 아닌 하늘의 대속 죽음, 그 사랑 그 마지막 한닢, 그 사랑을 주는 것,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이사64,5 로마10,3참조) 그래서 나 자신의 의로움(말)에 묶입니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아멘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5,20ㄴ-26)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에 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가 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나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5년 06월 12일 목요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의로움이, 이미 굳어진 전통과 법규에 충실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도록 마음에 기초한 형제애의 섬세한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지켜서 다만 상대를 죽이지만 않으면 형제애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2) 하고 덧붙이신 말씀에서, 옛 계명을 부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뜻을 전하시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뿌리로 돌아가시는데, 그 뿌리는 분노(忿怒)입니다.
분노는 나를 거스른다고 느끼는 상대에게 “성을 내는”(5,22) 감정입니다.
분노는 실제로 상대를 향한 공격의 마음입니다.
“바보!”(5,22)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경멸을 드러냅니다.
분노와 경멸은 생명을 무너뜨리는 힘을 가집니다.
정신적 사회적 생명을, 하느님 자녀의 존엄성을 죽입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화해와 친교를 이루며 살라는 초대입니다.
모든 인간은 처지가 다르더라도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형제”(7,22-24)라는 말을 네 번이나 쓰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험담과 비난이 형제자매들의 생명을 위협하는지요!
율법의 완성은 형제자매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자비의 얼굴’을 지니듯이 제자들의 의로움도 자비로 나타나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복음(마태5,20-26)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십계명(탈출20,13)의 살인(殺人)은 히브리어 ‘라짜흐’로 ‘죽이다. 돌육하다.’ 본문은 헬라어‘포뉴오’로 제사(祭祀) 용어다. 사람이나 짐승을 습관적, 반복적으로 ‘살해(殺害) 하지 말라’는 뜻이다. 곧 ‘희생 제사를 지내지 마라’는 것이다. 그것이 ‘살인해서는 안 된다.’ 의 진의(眞意)다.
죄인(罪人)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十字架)에서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제사를 완성하시고 죽으신, 그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내 뜻, 내 의로움을 위한 제사, 예물로 반복적으로 드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히브7,27) 27 그분(예수)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 율법, 그 옛 계약에서 제사를 지키게 하심은 새 계약인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을 알라’고 주신 것이다. (히브10,1-18참조)
예수님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 사랑은 모르고, 자신의 소원(所願)과 죄(罪)와 의(義)를 위해 계속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하신 일, 곧 그분의 의로우신 죽음과 그분의 십자가(十字架)를 부정하는 것이고, 모독(冒瀆)하는 것이며, 그것이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살인이다.
(히브2,11-12)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 추악(醜惡)한 죄악(罪惡)의 우리를 형제(兄弟)로 생각하시어 대신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면서 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참 사랑이시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형제, 앞에서 확인했듯, 죄인인 나를 형제로,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쳐주신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
(요한20,17)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 죄인(罪人)인 나를 위해 저주의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 형제, 예수님께 ‘바보짓, 멍청이 짓’ 했다고 화(禍)를 낸다면, 그는 자신의 죄가 그대로 남아 지옥행(地獄行)이 된다. 세상은 절대 믿지 못하는, 갖지 못하는 ‘형제’시다.
(1코린2,14) 14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코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 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자신이 드리는 예물(禮物)이 형제이신 예수님의 뜻(이름)과 다름이 생각나거든, 돌아가 예수님의 뜻과 화해하고, 곧 깨닫고 돌아와 올바른 예물을,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이다.
* 제자들이 많은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이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하신다.(요한16,24)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뜻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이름, 뜨, 소원을 위해 청(請)했기 때문이다. (야고4,3 보충)
그러면 올바른 예물이란? 내 뜻, 내 이름, 의(義)를 위해 살았던 ‘나’를 버리고(부인하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 죄의 속죄제물, 예물로 죽으신 예수님과, 그분을 내주신 하느님(야훼)께 감사(感謝), 찬미(讚美), 영광(榮光)을 드리는 것, 그것이 ‘올바른 예물’이다.(요한 4,20-24 참조)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신앙의 최종 목적’임을 여러 번 확인했다.(이사43,7) 그 외에 다른 예물드림은 없다.(히브10,18) 그래서 미사는 내 뜻, 소원을 위한 제사가 아니고, 하느님께 감사, 찬미, 영광을 드리는 기쁨의 잔치가 되어야한다.
25ㄱ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 24절의 ‘화해하라’는 말씀과 같다.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간직해야 화해(和解)도 타협(妥協)도 할 수 있다.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신다.(2코린5,217-21 참조)
25ㄴ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 그러면 고소(告訴)는 누가하나? 하느님이 고소하신다. (예레2,9 호세4,1 미카6,1)
하느님의 숨, 말씀으로 창조되어 그분의 숨으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뜻, 영광을 위한 신앙을 살기 때문이다.(요한5,43-44)
하느님의 칭찬보다, 하느님 앞에 혐오스러운 사람들의 칭찬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루가16,15) 성서(구약)의 말씀이 고소하신다.(요한5,45-46) 인간들이 거스른 말씀이 감옥에 갇히게 하신 것이니,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풀려나 올 수가 없다.(예레2,22 13,23 참조) 하느님의 것이어야 한다.
26 (그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으면 나올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흘리신 피, 그 하늘의 대속, 그 의(義), 사랑으로 나올 수 있다. 다시~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약의 말씀으로’다.
(히브10,22)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말씀)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아멘)
<복습(復習)합니다.>
마지막 한 닢, ‘에스카털로지 코란테스’를 직역하면 ‘ 마지막 한 변’이라 했다.
‘마지막 한 변’- 삼각형의 맨위 꼭지 점이 깨지고 찢어져 두 변이 양쪽으로 벌어지고 나면, 채워야 할(그어야 할) 한 변이 남는데 그것이 마지막 한 변이다. 곧 그 마지막 한 변을 그어야(채워야) 사각(땅)이 완성 되는데 그 마지막 한 변을 긋는 것, 채우는 것이 사각(땅)의 완성을 위한 삼각(하늘)의 찢어짐, 그 희생,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늘(삼위일체)은 삼각, 땅(동서남부)은 사각.
그러니까 하늘(3)이 찢어지는 그 죽음, 사랑으로 땅(4)의 완성, 곧 땅(흙)의 존재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듯,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 그 사랑으로만 죄인들이 모든 감옥(묶임)에서 풀려 자유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구원(救援) 받았다. (그것이 하늘의 정의(正義)다. 율법의 자기 의(義)에 만족하는 것이 불의(不義)다.(로마3,20)
어둠에 갇혀 영원을 살아가야 할 우리가 영원한 빛속에서 영원을 살게 된 것이다. “마지막 한 변” 그리스도의 피(깨짐, 찢어짐), 그 사랑으로..........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감옥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는 저희가 율법, 그 옛 계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계약의 말씀, 사랑으로 빛의 나라, 하늘을 현실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모두의 마음에 성령이 불을 놓으시어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