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다해) 06월 27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루카15,3-7)
제1독서<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에제34,11-16)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12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13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14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화답송>시편23,1-3ㄱ.3ㄴㄷ-4.5.6(◎1)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제2독서<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5ㄴ-11)
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15,3-7)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3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예수 성심 대축일 제1독서 (에제34,11-16)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4)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붇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16)
에제키엘서 34장 14절은 하느님께서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는 일의 결과로, 유다 백성이 이전의 고통과 아픔을 잊고 풍요로움과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교차 대구 구조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4절에서 '좋은' 풀밭과 '기름진' 풀밭이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좋은'에 해당하는 '토브'(tob)는 몇 가지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있던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나무 열매(창세2,9)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고, 이집트에 있던 칠 년 풍년 기간에 거둔 풍성한 수확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창세41,9).
그리고 '기름진'에 해당하는 '샤멘'(shamen) 역시 14절처럼 식물을 수식하는 경우
풍성한 소출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 선민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길 것이라는 말씀에서 이같이 먹을 것의 풍성함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에제키엘서 34장의 유다 백성을 양에 비유하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그들을 먹이시는 목자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유다 백성이 하느님의 징계로 인한 바빌론과의 전쟁을 겪고 선민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칼에 죽은 사람이 굶주려 죽는 사람보다 복되다고 할 정도로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녀를 잡아 먹는 참혹한 상황을 겪었던 뼈 속 깊이 박힌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예레4,8-10; 5,9.10)
한편, 14절에서 양이 유다 백성이 회복되어 거처할 장소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있는 목장으로 묘사되었다. '높은 산'이라는 표현은 적들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은 13절에 설명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장소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유다 백성에게 주어진 '높은 산'이 '좋은 목장'이 되는 것은 지형적인 안정성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전능하신 힘과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곳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우상을 섬겼지만(에제20,28), 하느님께서 그들을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해서 심판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신 이후에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변화되어 그곳에서 하느님을 섬겼다(에제20,40).
본절에 기록된 '높은 산' 역시 지형적으로 안전한 산일 뿐 아니라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상이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목자로 계시는 영적으로 안전한 산이므로 유다 백성은 더 이상 이방 민족으로 인해 수치와 멸망을 당하지 않으며, 영원히 안전하게 거처하게 될 것이다.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16)
앞에서 에제키엘서 34장 13절과 14절에서는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양 떼인 선민 유다 백성을 바빌론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어 기르시고 돌보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34장 16절에서는 유다 백성의 개별성을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양, 흩어진 양, 부러진 양, 아픈 양을 먹이시고 돌보실 것이지만, 기름진 양과 힘센 양은 없앨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상 본절의 내용은 악한 목자들이 자행한 탐욕과 방임을 지적한 에제키엘서 34장 4절의 내용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에제키엘서 34장 16절에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보심의 대상이 될 유다 백성을 비유하는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양에 대한 묘사는 본문에 기록되지 않은 '약한 양'에 해당하는 '한나홀로트'(hannaholloth)를 제외하고는 에제키엘서 34장 4절에 묘사된 순서와 역순으로 기록되었을 뿐, 에제키엘서 34장 16절 상반절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처럼 이미 앞에서 언급된 아프고 부러진 양들에 대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약속을 본문에서 다시 반복하는 이유는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부로 자신의 배를 불린 자들에 대한 심판과 대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거짓 목자인 유다 임금들의 권력에 의지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에 앞장서서 사리사욕을 챙겼던 대지주나 거상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는 방법을 기술한 '내가 없애 버리겠다'에 해당하는 '아쉬미드'(ashimid; I will destroy)의 원형 '샤마드'(shamad)는 거의 모든 용례에서 자연적 멸망이 아닌 하느님의 심판에 의한 멸망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신명4,26; 28,26; 예레48,40).
결론적으로 거짓 목자들을 파멸시키시고, 자신의 양을 직접 돌보실 착한 목자로서 소개되는 하느님을 묘사하는 에제키엘서 34장 11-16절 단락에서, 15절까지는 자신의 양을 돌보시는 착한 목자로서의 이미지만 강조하다가 16절에서 처음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자들에 대한 심판자로 드러난다.
특히 16절 마지막에 나오는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는 표현은 심판자로서의 하느님을 더욱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에제키엘서를 읽는 바빌론에 머무는 유다 포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괴롭히는 자들에게 심판을 단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고,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세리나 죄인과 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가까이 하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루카 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
곧 되찾은 양(3-7절 참조), 되찾은 은전(8-10절 참조), 되찾은 아들(11-32절 참조)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잃었던 당신 자녀를 다시 찾았을 때 느끼시는 하느님의 큰 기쁨을 전하십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밤낮으로 길을 헤매며 애쓰는 목자,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심 안에 머물며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착한 목자,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심장마저 꿰찔리시어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예수님께서는 또한 성체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우시고 다시 살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오늘 하루, 예수 성심과 하나 되어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세상의 모든 사제가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 주님의 착한 목자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말씀으로, 회개로 찾아오시는 주님.
복음(루카15,1-10)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 판단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이들이 한다. 죄인임을 자각(自覺)하는 이는 남을 판단할 수 없다. 예수님을 의지하며 말씀만을 갈망(渴望)할 뿐이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양(羊)이 무슨 회개를 했나? 주인이 잃은 양을 끝까지 쫓아가 찾아 데려온 것을 ‘회개(悔改)했다’고 하신다. 주인이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왔음을 기억(記憶)하자.
(요한1,29)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죄를 없애시는- (직역하면) 죄를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곧 세상의 모든 죄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짐으로 없애시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니까 양(羊)의 주인(주님)은 그 양의 죄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짐으로 없애셨고, 그 양은 그 주인(주님()을 믿고 따라왔던 그것을 회개(悔改)라 하신 것이다.
회개(悔改)는 하느님의 찾으심으로 시작(始作)된다는 말씀이다. 양(羊)은 그렇게 자신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없애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늘 간직하고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러나 온갖 유혹과 거짓 가르침으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길을 쫓아가 헤메일 때가있다. 곧 인간의 방법으로 잃었던 예수님을 찾게 된다.(루가2,43-45참조) 그러면 말슴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인, 여자, 마리아(쓴물)처럼 된다. (루가2,50참조) 그래서 연결된 비유를 더 주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성령)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 잃어버린 한 닢, 곧 잃었던 은전을 찾았는데 ‘회개(悔改)했다’ 하신다. 대속, 그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은전 ‘열 닢’은 십계명으로 그 열 개의 계명 하나하나 모두가 하늘의 대속(代贖), 그 이타의 사랑을 담고, 진리로 말하고 있다.
은전(銀錢)또한 우리 죄(罪)로 죽으신 예수님의 몸값을 뜻한다. (마태27,5) 곧 그 대속의 사랑, 그 하나를 깨닫지 못한 것이 은전 한 닢을 잃어버린 것이고, 성령께 의탁하여 그 열계명을 사랑의 계명, 하나로 깨달아 믿게 된 것이 은전(銀錢)을 찾은 회개(悔改)인 것이다.
십계명을 열 개의 계명으로 지키면 법이 되어 심판(審判)을 주지만, 대속(代贖) 그 이타의 사랑, 그 하나로 깨달으면(믿으면) 하늘의 용서(容恕), 자유(自由)다.
회개(悔改, 메타노이아)란 뉘우치고 반성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곧 하느님께서 죄인을 찾아주시고, 그 죄인은 자신을 찾아주신 그 주님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회개다.
하늘에서 땅으로 죄인들을 찾아오신 구원자 예수님~
(루가1,67-69) 67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요한1,9-11)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예수, 말씀)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 우리는 미사 때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고백(告白)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사(祭祀)와 윤리(倫理)의 신앙으로 스스로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며 애쓴다.
구원(救援)의 진리인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이타의 사랑을 잃어버렸기(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이다. 용서(容恕)는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로만 이루어진다. 죄인임을 자각하고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 그들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회개(悔改)한 (용서(容恕)받은) 이들이다.
우리 또한 자신의 뜻, 소원, 의무(의로움)를 위해 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죄의 속죄 제물로 내 주신,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당신을 제사(祭祀) 제물(祭物)로 드리며 완성하신 ‘다 이루어졌다’ 하신 그 사랑의 하느님과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찬미의 미사’를 드리러 모여야 한다. 하느님은 그런 이들을 찾으시고, 그들로 기뻐하신다.
(요한4,23-24)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1,11-12.14)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 사랑을 진리로 깨닫게 하시며 구원으로 이끄시는 천주의 성령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 예수님의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곧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분의 마음 없이, 그리고 그분의 마음은 그분의 몸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체는 예수성심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예수성심은 성체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신뢰하며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일생이 예수성심 공경에 대한 핵심입니다.
예수성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공관복음의 표현은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스플랑크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을 고쳐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회개가 필요한 한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애절한 사랑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입니다(15,4-7). 이렇듯 예수님의 마음은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사랑과 관용의 마음이요 조건 없이 나를 전부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그저 나 밖의 존재를 대상화하여 일시적으로 자비를 베풀고 가슴 아파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심오한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바로 아파하고 소외된 이의 존재 깊숙이 들어가 완전히 동화되어 함께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웃의 인격과 삶의 상황을 완전히 품어야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뿐 아니라 온 우주의 핵심이고, 하느님 체험의 장소이며 우주만물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주님의 인격의 중심은 최고의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분의 전인격과 그분이 구체적 행동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체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로 충만한 예수님의 마음이 될 때 고통과 공허, 무와 죽음을 오히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지닐 때 무의미한 듯 보이는 삶이 의미로 바뀌고 절망이 희망이 바뀔 것입니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목적은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우리도 참된 사랑으로 보답하고 주님께서 당하신 수난을 보상하고 그분과 일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를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성심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 되셨음을 체험합니다. 이 사랑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 곧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안에서 온 힘을 모아 믿음을 고백하고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도 창에 찔린 그분의 마음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게 됩니다. 창으로 찔린 사랑하는 그 마음을 통해 절망과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마음을 느끼며, 그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 자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성심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 되셨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사랑이 아닌 그 무엇을 바라지도 원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사랑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성심께 드리는 흠숭지례 의식의 정점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 뿐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삶의 자리에서 모두가 손잡고 그분의 성심을 드러내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2025년 06월 27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하느님 자비의 비유’라고 불리는 루카 복음서 15장의 되찾은 것들의 비유(15,1-32 참조)는 ‘하느님 기쁨의 비유’라고도 불릴 만합니다.
기쁨은 자비를 넘어섭니다.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고 기쁨은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돌아감으로써, 그분께 발견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분께 발견되도록 자신을 내 맡겨야 합니다.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를 찾으시는 분 앞에 나와 서기만 하면 됩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가! 내 아들이, 내 딸이 돌아왔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분의 눈길 아래 머무르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듣는 이 복음은 예수님 마음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이 신심이 시작되던 시대의 심장이라는 상징을 넘어서서 그 실체인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통합적 신심을 기르도록 권고합니다.
사실 예수님 마음은 그분의 전 인격을 요약합니다. 그래서 예수 성심의 신비는 ‘예수님의 구원적 사랑 전체’의 신비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기도를 바치며 이 신비 안에 머무르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저에게 오소서, 저를 찾으소서, 저를 발견하소서. 저를 품에 안아 데려가 주소서”(성 암브로시오, 『시편 118편 해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예수 성심 대축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사랑. 그 은혜를 알아야 죽음이 두렵지 않다.
도덕과 윤리의 착한 삶을 요구하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천국은 안식처가 아닐 것이다.
자기 버림, ‘부인하기 싫어요’ 하는 것은 ‘나 부활하기 싫어요 하는 것’
복음(루카15,1-7)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 율법의 의(義)는 절대 죄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곧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그 의(義)로는 구원이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로마3,20) *투덜거렸다(현재 시제형)- 습관적(習慣的)으로 계속 투덜거렸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 잃었다는 것은 원래 ‘주인의 소유였다’는 것이고, 그래서 주인이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신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흙에 당신의 숨을 넣어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음을 ‘잃었다’고 비유하심이다.
왜 보내셨는가? 이 땅(세상)에서 하늘을, 곧 세상에는 진리(사랑)가 없음을 경험하고, 배우라고, 그래서 진리(사랑)는 하느님께만 있음을 깨닫고 그 진리(사랑)를 받아들여 하나도어 흙의 존재가 아닌 하늘의 존재, 하느님의 자녀로 재창조하시기 위해서 이다.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 왜 양(羊)을 몰고 오지 않고 어깨에 메고 왔을까? 주인(주님)과 양이 한 몸,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몸이 될까?
(요한1,29)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죄를 없애시는’을 직역하면 ‘죄를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그러니까 길을 잃은 양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양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곧 ‘십자가의 복음,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이 들어있음이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양을 찾을 때까지 뒤 쫓아 가서 찾아내시고 ‘회개했다’고 하신다. 회개(悔改)는 ‘돌아옴’을 뜻한다. (메타노이아-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 길을 벗어난 것이 죄(罪)이다.(하마트리아- 과녁을 벗어나다)
그러니까 ‘길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나 율법의 자기 의로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는 그 ‘아흔아홉’ 모두 하느님의 뜻(길)을 벗어난, 돌아와야(회개) 할 죄인(罪人)들인 것이다.
그런데 제사와 윤리, 그 율법의 의(義)가 구원을 주지 못하는 불의(不義)la을 깨달아(로마3,20) 그 무리에서 나와 ‘길을 잃은 양’ 이라면 하느님(말씀)께서 찾아 오셨을 때 얼른 따라 나섰을 것이다. 곧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회개(悔改), 곧 돌아오지만, 의인(義人)이라 자부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올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율법주의(律法主義)에서 나온, ‘길을 잃은 양 한 마리’ 라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아니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자신의 뜻(소원)을 위해 제사와 윤리, 그 율법신앙((律法信仰)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말씀이 부수러 오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肉身)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마태10,34-35)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 하늘의 진리, 사랑이 주시는 하늘의 평화를 배워 얻으라고 보내셨는데 세상이 주는 것에 만족(滿足)해하며 ‘온 가족(교회)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쳐 잘 사는 것’이라며 죽음의 길을 살고 있기에 부수시려(가르시러)고 말씀이 칼로 오신 것이다. 가르고 부셔야 구원(救援)이기 때문이다.
(히브4,12) 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신앙의 성숙은 말씀에 자신을 비춰 자신의 속(혼과 영, 마음, 생각)이 이기심과 온갖 쓰레기로 가득함을 보고 인정하는 그 자기버림, 부인이다.(마태16,24참조) 구원, 부활의 절대적 열매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소유였던 당ㅅㄴ의 자녀들을 끝까지 뒤 쫒아가 찾아내시곤 ‘회개했다’고 하셨다.
(요한6,44)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 이끌어(헬키오)- 어부가 물고기 건져 끌어 올릴 때 쓰는 단어다. 하느님은 우리를 끝까지 찾아내시어 이 세상에서 끌어 올리심으로 이끄신다. 물고기가 바다(세상)에서 끌어 올려지면 죽음(시련)이다. 그러나 그 건져진 물고기는 하느님께서 책임지신다. 당신의 생명(말씀, 영)을 넣어 다시 살리신다.(티토3,5 참조)
그런데 문제는 하늘의 생명(구원)보다 세상(바다)의 목숨, 영광을 더 사랑하며 고집을 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選擇)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예레1,5 요한15,16)
그러니까 요나처럼 하느님을 떠나 도망쳐 봤자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이다.(요나1,3)
(요나2,1.3.7.11 3,1) 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3 이렇게 아뢰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승의 배 속에서 제가 부르짖었더니 당신께서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 7 저는 산의 뿌리(밑, 땅속)까지 내려가고 땅은 빗장을 내려 저를 영원히 *가두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져 올리셨습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3,1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 하느님의 고집(固執)이다. 그 하느님의 고집이 죄인들을 구(求)하신다.
(예제34,16)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 자신의 뜻, 의(義)를 고집부리는 그 ‘힘센 양’은 그 힘을 쳐서라도 데리고 오시겠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공정(公正)이다. 요나를 그렇게 죽음에서 건져 올리셨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시련)들 안에 하느님의 뜻, 이끄심(헬키오)이 들어 있음이다.
(2코린2,14-15) 14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15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열매인 ‘자기 버림의 향기’다. 요나처럼~
(2코린2,16) 16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일을 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智慧), 계시의 영(靈), 성령께서 보호자로 오셔서 친히 이끄신다. 자기 버림, 부인(否認)의 삶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건저 올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깨닫고, 믿게 하신다. 또한 그것이 세상과 분리, 구별된 거룩한 삶이다. *‘거룩(하기야죠)’- 구별되다.
(에페5,16)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 잘 쓰시오(엑사 구라죠 - 건져 올리다)
(공동번역)16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 곧 사라질 하늘의 그림자일 뿐인 세상의 달콤함에 취해 살 때(시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의 의(義), 생존(生存)을 위한 사람의 지혜(知慧)의 가르침을 받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늘의 대속(代贖)인 그 하늘의 의(義)를 얻기 위한 ‘하느님의 지혜(智慧), 계시이신 보호자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할 때인 것이다.(1코린2장 참조)
(1코린2,6-7)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지혜는 그리스도(에페1,4), 곧 옛 계약의 그 모든 우리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시고(메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없애시고, 내 양(신부)이라 하신 그 ‘피의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시다.
늘 되새기자~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나를 찾을 때까지 뒤 쫒아와 주신, 그리고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회개 했다’하신 그 무한한 사랑과 은혜의 하느님을 알고, 믿어 그분이 사랑스러워 ‘내 님 계신 천국’을 그리워하며 이곳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사제 성화의날 - 10시미사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