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26일 목요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 (마태.7,21-29)
제1독서<아브람은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창세16,1-12.15-16)
1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그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하였다. 사라이에게는 이집트인 여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가르였다.
2 사라이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여보, 주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갖지 못하게 하시니, 내 여종과 한자리에 드셔요. 행여 그 아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내가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브람은 사라이의 말을 들었다. 3 그리하여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자기의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를 데려다,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지 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4 그가 하가르와 한자리에 들자 그 여자가 임신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제 여주인을 업신여겼다.
5 그래서 사라이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부당한 일을 겪는 것은 당신 책임이에요. 내가 내 여종을 당신 품 안에 안겨 주었는데, 이 여종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업신여긴답니다. 아, 주님께서 나와 당신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셨으면!”
6 아브람이 사라이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손에 달려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하구려.” 그리하여 사라이가 하가르를 구박하니, 하가르는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쳤다.
7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가르를 만났다. 그것은 수르로 가는 길가에 있는 샘이었다.
8 그 천사가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의 여주인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9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
10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
11 주님의 천사가 또 그에게 말하였다. “보라, 너는 임신한 몸 이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
12 그는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되리라. 그는 모든 이를 치려고 손을 들고 모든 이는 그를 치려고 손을 들리라. 그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살아가리라.”
15 하가르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하가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16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화답송>시편106,1ㄴㄷ-2.3-4ㄱ.4ㄴ-5(◎1ㄴ) ◎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의 위업을 누가 말하리오? 그 모든 찬양을 누가 전하리오? ◎
○ 행복하여라, 공정하게 사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
○ 저를 찾아오시어 구원을 베푸소서. 제가 당신께 뽑힌 이들의 행복을 보고, 당신 민족의 즐거움을 함께 기뻐하며, 당신 소유와 더불어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
복음<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마태.7,21-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16,1-2.15-16)
"하가르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하가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15-16)
성경에는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다시 돌아갔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하가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브람이 지어주었다는 창세기 16장 15절의 기록을 보면, 하가르는 주님의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람에게 즉각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가르는 주님의 천사를 만난 사실을 아브람에게 소상히 이야기했고, 아브람도 이를 받아들여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스마엘을 이름 지을 때 창세기 16장 15절은 '뻬노'(beno) 즉 '그의 아들'(his son)이란 표현을 써서,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그의 아들로 여겼음을 확인해 준다.
이것을 볼 때 여종 하가르의 몸을 빌려 자녀를 얻자는 사라이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 시작된 아브람 가문의 분쟁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16)
창세기 12장 4절에서 아브람의 나이가 일흔다섯 살로 소개되어 나온 이후 두번 째로 그의 나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물론 창세기 16장 3절의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지 십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의 내용을 보아서,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람의 나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로서는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람의 나이를 분명히 명시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86이라는 숫자가 히브리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즉 히브리인의 개념에서 완전함을 나타내는 3,7,10 이라는 숫자와는 별개의 숫자들이 조합된 86이란 숫자는 이스마엘을 출산할 때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백 살 되던 해에 이루어진 이사악의 출생(창세21,5)은 약속의 씨가 완전함을 상징하는 '10'이란 숫자가 연결되어 이것이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암시한다.
굳이 '86'이란 숫자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쉐쉬'(sheshi; 6)란 숫자이다. 이것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 '7'에 미치지 못하는 숫자로서 완전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만일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가지는 의미와 약속의 씨의 출생이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독자는 분명 '86'이라는 숫자 다음에 올 수 있는 의미있는 숫자로 이루어질 아브라함의 나이를 기대할 것이고, 그것이 곧 '100'이라는 숫자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악의 출생이 예고된 창세기 17장 1절이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었음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추정은 신빙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산상 설교 부분에 배치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명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여 주고 계십니다. 산상 설교는 참행복을 시작으로 율법의 완성에 관한 가르침과 그 밖의 여러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자신이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참된 믿음에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천 없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실천은 우리 믿음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실천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더 굳건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몸소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게 되는 체험이 있고 그 체험 안에서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려움과 고통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집니다.
좋은 말씀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유튜브,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묵상 글과 아름다운 글귀들을 서로 나눕니다.
이는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 구원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서로 나눈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아름다운 말씀은, 나아가 참사랑의 실천으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 실천 위에 자리 잡은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반석위에 지은 집
예수님께서는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7,21-29)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1)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2)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23)
마태오 복음 7장 15절~20절이 열매를 통한 거짓 예언자의 분별과 경계에 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오 복음 7장 21절~23절까지는 그리스도를 거짓으로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에게'로 번역한 '모이'(moi; to me)는 일인칭 대명사 단수 여격인데 '바로 나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님'에 해당하는 '퀴리오스'(kyrios; Lord)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을 창조주시요, 구세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 내지는 기도의 문맥인 것이다.
동시에 '주님'이라는 호칭이 두번 거듭 사용된 것은 매우 큰 종교적 열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대해 신앙고백을 하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열정이 아닌, 위선 내지는 가식이거나 자신의 현세적인 복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아주 충격적인 가르침을 주시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7장 21절에서 '주님, 주님!' 하는 자가 진정으로 주님을 바로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만 고백하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를 지적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2)
여기서 '그날에'에 해당하는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en ekeine te hemera; on that day)는 미래에 주어질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적 표현인데, 하느님의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종말의 날을 가리키며, 함께 섞여 있던 밀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가 완전히 구분되는 날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토 소 오노마티'(to so onomati; in your name)가 한 절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악용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고대 사회에서 임금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그 명령은 임금이 직접 한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무엇을 했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힘을 빌어 행한 것이므로, 모든 영광은 예수님께 돌려야만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7장 22절의 거짓 추종자들은 애덕의 실천과 같은 말씀의 실천없이 예수님의 이름만을 빌려 기이한 일을 행하고는, 그 영광은 자신이 가로챈 삯꾼 목자와 같은 자들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23)
여기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에 해당하는 '우데포테 에그논'(oudepote egnon; I never knew)에서, '우데포테'(oudepote)는 부정문에 사용되는 접속사로서 '~도 아닌'이라는 뜻을 지닌 '우데'(oude)와 부정어 뒤에서 '일찍이 단 한번도' 라는 뜻을 지닌 '포테'(pote)의 합성어인데, '일찍이 한번도 그러한 적이 없는' 이라는 뜻을 가진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사람들이 놀랄만한 큰 권능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단 한번도 그를 알았던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을 일삼는'에서 '일삼는'에 해당하는 '에르가조메노이'(ergazomenoi; work)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불법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물러들 가라'에 해당하는 '아포코레이테'(apochoreite; depart)라는 현재 명령형을 사용해서 강력하게 떠나가라고 촉구하신다.
주님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고, 하느님의 일꾼으로 여겨지던 자들에게 행함이 없는 신앙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2025년 06월 26일 목요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참된 우정은 내가 잘나갈 때보다 실패하거나 곤경에 놓였을 때 더욱 드러나는 경향이 있고, 참된 신앙은 평온함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반석은 말과 기도가 아니라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폭풍이 우리 삶을 덮칠 때까지는 누구도 자신을 참신앙인이라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반석 위에 굳건히 머무는 한, 그의 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신심에 도취하지 않도록,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을 방패 삼지 않도록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때때로 진심과 행동이 없는 말들로 주님 앞에 나서지는 않는지요?
하느님과 우정의 친교를,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길은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아름답게 말하거나 성경을 잘 설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의 결론은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우리 공동체는 기도와 실천, 찬양과 행동의 균형을 잘 지키고 있나요? 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반석’은 무엇인가요?
삶에서 시련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 안에 진실하게 받아들여 그 말씀을 뜨겁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리하여 삶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目的)을 알고, 믿고, 누리는 것이 실행(實行)이다.
복음(마태7,21-29)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루가6,45)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구원의 능력인 새 계약의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는 것, 선한 것이다. 그 선한 마음에서는 하늘의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쳐 나온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루가6,46) 4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 ‘착하게 살자고, 살라고 종교 행위에 열심하라’고 권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하늘의 용서로, 거저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 실행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착함, 선함이다. 선(善, 그리스도)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착하게 사는 것만이 신앙의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예수님의 대속은 창조 이전부터 구원의 계획, 계약 안에 있었음을 기억하자(에페1,4~)
(창세3,17-18)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 아담이 먹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나쁜 나무다. 생명을 줄 수 없는 가시덤불만 내는 가시나무다. 그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ㅏ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무화과는 구약으로 율법(제사와 윤리)을 뜻하고, 포도는 신약으로 진리를 뜻한다. 곧 하느님의 지혜인 십자나무의 예수 그리스도다.(요한14,6)
(로마3,20-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율법으로 자신의 죄(악)를 깨닫고, 그 악을 대속하신 ‘십자나무의 그리스도로 건너와 생명을 얻으라’는 에덴동산과 성경 전체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 죄를 알게하는 율법(무화과)과 그 죄를 대속해 생명을 주는 진리(십자 나무), 모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나무인 것이다.
그런데 율법(제사와 윤리)에 멈춘 그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게 되면 하늘의 용서, 생명을 얻지 못하기에 그 자신이 가시나무, 나쁜 나무가 된다.
인간의 의로움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인간의 의(義)는 도리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니다) 율법, 그 옛 계약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시고 치워버리신 그 새 계약의 그리스도께로 건너와야 한다.
(히브9,15)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 옛 계약의 나를 비우고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를 담는 것, 좋은 나무로 좋은 열매를 맺는 선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착하게 사라고 가르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대속하신 당신으로 하늘의 용서, 생명을 받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무지랭이 같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랑을 절절히 깨닫고 믿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착한 삶이다. 인간의 계명을 지킨 착함, 선함과는 다른 것이다. 그 착함, 선함은 구원의 힘이 없다, 무력하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루가6,47-48)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48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 사람이 자신의 본질, 곧 땅(흙), 그 없음(죽음)의 존재임을 알고, 반석(생명의 물)이신 예수님만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아 그 예수님 위헤 집(나)을 지을 때, 곧 그분과 하나가 될 때 그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그 끝은 영원한 승리, 생명임을 믿기에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 누림이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요한6,68)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루가6,49)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 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 땅, 그 사람의 의로움, 곧 구원의 힘, 능력이 없는 열심한 활동(행위), 그 위에 집(나)을 지으면 시련이 왔을 때, 절망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사람(흙- 없음)의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못되어 허물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자신의 열심, 의로움의 자신을 믿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보호자 성령님! 오늘 주신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죽으러 오셨음을 알고, 그분 십자나무의 열매인 용서, 자유, 생명을 누리는 그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