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23일 월요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7,1-5)
제1독서<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12,1-9)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화답송시편 33,12-13.18-19.20과 22(◎12ㄴ)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복음<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7,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12,1~9)
그 무렵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1)
'주님께서~말씀하셨다'에 해당하는 '와요메르 예흐와'(wayomer yehwa)로 시작하는 본문은 아브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부르심을 받고 역사(歷史)의 전면에 등장하는 장면을 보도한다.
이것은 역사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인간 아브람이지만, 그 배후에는 주님의 역사(役事)하심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본문이 '그 무렵(그러자;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로 번역되는 '와요메르'(wayomer)로 시작되는 것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주로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
'(너는)~가거라'에 해당하는 '레크 레카'(lek leka)에서 '레크'(lek; go)는 '걷다'라는 뜻이 있는 '할라크'(hallak)의 2인칭 단수 명령형이다. 그리고 '레카'(leka)는 전치사 '레'(le)와 2인칭 단수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너에 대해서는'(as for you) 또는 '너에 관한 한'(as far as you are concerned) 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레크'(lek)라는 2인칭 단수 명령형 그 자체가 '너는 가거라'라는 의미가 있는데, 다시 '너에 대해서는(관해서는)'이라는 뜻이 있는 '레카'(leka)를 덧붙인 것은 '가거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아브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아브람을 대신하여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람이 버리고 떠나야 할 것으로 명시된 세 개의 단어인 '메아르체카'(meartseka), '밈몰라드테카'(mimmolladtheka), '밉베트아비카' (mibbethabika) 앞에는 모두 철저한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민'(min)이 붙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당신 자신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반면에, 인간의 거룩함은 하느님을 향한 지향으로 세속과 이기와의 철저한 구분에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이것은 또한 거룩한 당신의 백성을 구별하여 세우시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이미 아브람이라는 칼데아 사람을 세상에서 철저히 분리시키는 일에 예표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이 떠날 대상이 고향, 친족, 아버지의 집 등 삼중으로 표기된 것은 결국 과거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브람이 이러한 것들을 과감히 버리도록 하느님께서 강력하게 요구하셨음을 의미한다.
루카 복음 14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도 '이와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한편, '네 고향'으로 번역된 '메아르체카'(meartseka)는 '너의 땅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이 말이 다른 두 가지, 즉 친족과 아버지의 집보다 앞에 나온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궁극적으로 인도해 가실 곳이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최초의 요구로 '땅'을 떠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것은 옛 삶과 새로운 삶의 구별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새 출발과 더불어 가나안의 약속이 지배하는 삶의 영역으로 향하는 실질적인 삶을 강하게 명령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있을 거처를 미리 마련해 놓으시고, 기존의 것에 안주하지 말고 떠날 것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6절에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친족'으로 번역된 '몰레데트'(molledeth)는 '낳다'(창세4,18), '태어나다'(고헬렛7,1)로 번역되는 '얄라드'(yalld)에서 유래하여 '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난 자' 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친족'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신 것은 당시 하란에는 아브람의 형제 나호르의 가족들이 살았기 때문이다(창세24,10; 28,10). 아마도 나호르 가족은 테라 일행이 칼데아 우르를 떠난 후(창세11,31) 바로 뒤이어 하란으로 이주하여 계속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치안 유지가 잘 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는 오늘날보다 친족의 중요성이 더 컸다. 따라서 친족이 많은 자는 유력한 자로 여겨졌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친족은 모여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친척 뿐만 아니라 보다 가까운 혈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집조차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큰 희생의 요구이다.
이제 하느님꼐서는 '고향'이라는 넓은 영역에서 '친족'이라는 중간 영역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고 너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에 해당하는 '우밉베트 아비카'(umibbeth abika) 즉 가장 작은 영역으로, 아브람이 떠나야 할 곳을 점점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아브람은 그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을 떠나는 '지역적 이동'을 해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친족'을 떠나는 '공동체로부터의 이동'을 해야만 하고,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마저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브람에게 주어진 부르심의 내용은 당시 친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었던 고대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결코 따르기에 쉬운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에 대해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11,8)라고 계시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여기서 '너에게 보여줄'로 번역된 '아르에카'(areka)는 '라아'(raah; '보다') 동사의 사역형 미완료형에 2인칭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내가 너로 하여금 보게 할' 혹은 '내가 너에게 보여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직 아브람에게는 구체적인 목적지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아브람이 가야할 곳의 지명이 막연하게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그 땅'에 해당하는 '하아레츠'(haarets)으로만 표기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셨지만, 실상 그가 가야할 곳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지가 이미 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하아레츠'(haarets)라는 '그 땅'에 붙은 정관사 '하'(ha; '그')에 의해서 확인된다.
즉 '어떤 땅'이 아니라 바로 '그 땅' 가나안을 하느님께서는 생각하시고 아브람에게 명령하시고 계신 것이다. 아브람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하느님의 확신에 찬 명령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부터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 가운데 으뜸이자 특별히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계획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바로 그 시작의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으로 개명되기 전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는 아버지와 하란에 정착하여 오랜 기간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물론, 재물과 가축 수도 그곳에서 많이 늘었을 것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렇게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정착 생활에서 벗어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신앙생활은 정착 생활이 아니라 방랑 생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정된 삶은 그 안락함 속에 우리를 계속 머무르게 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법을 점점 잊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선조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그분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방랑길에 늘 함께하실 하느님을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역동적인 신앙 여정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시 어느 한곳에만 계속 머무르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여 봅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십자가를 우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마태 7,1-5)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 성경 말씀을 제사와 계명의 그 율법으로, 그리고 선과 악의 도덕과 윤리로 보게 되면 반드시 판단하게 됩니다.
그 선악의 법으로 먹으면 아담처럼 자신부터, 이웃까지 판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로마5,12-16. 18) 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은총)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거져) 내렸습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은총)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 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은총)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십자가의 대속)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말씀(예수)을 내 뜻을 위한 제사와 윤리로 보면 심판으로, 그러나 하느님의 뜻인 대속의 십자가, 그 하늘의 진리로 받으면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눈으로 보다'의 4단계. 말씀을~ ➀. 눈에 보이는대로 보는 것.(옵타노마이) 그래서 ② 내 뜻을 만족시켜줄 능력의 힘으로 우상 삼아 보는(에이돈) 그리고 ③ 말씀의 뜻을 깨닫기 위해 여러 과정을 겪는 훈련의 단계 (블랙보우) 그래서 ④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는 단계(호라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아 내 뜻을 만족 시켜 줄 사람의 규정과 교리, 계명으로 갖어 버리면 내 눈에 하느님의 뜻을 헛되게 하는 들보가 되는 것입니다.(마르7,7 티토1,14참조)
(지혜13,1) 1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 사람의 눈으로는 좋게는 보면서 하느님의 뜻으로 보는 눈이 없는 그 무지의 들보를 빼내는 방법은 ‘옵타노마이’로 ‘아이돈’의 상태인 그 욕망의 나를 버리고 깨달음의 과정 ‘블랙보우’를 통해 ‘호라우’, 하느님의 뜻인 진리로 깨달아 돌아오는 겁니다.
(루가9,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믿는다면,~
(골로2,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 내 뜻을 위해 십자가에 경배를 한다면 십자가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열왕하 18,4 참조)
십자가는 죄의 용서, 구원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 진리의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요한3,18) 아들(진리)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5,24) 내가 진실로진실로(거듭해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진리로)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히브10,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아멘.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가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1~3)
마태오 복음 6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서 추구해야 하는 자신 스스로의 경건과 의로움과 관련된 규정을 다루었다면, 마태오 복음 7장 1~6절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대인 관계의 규정을 다루고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크리네테'(me krinete; do not judge)는 단도직입적인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니는 명령문이다. 여기서 '심판하지'로 번역된 '크리네테'(krinete)는 복수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명령형은 생활 습관이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할 때 사용되는데,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계속해 왔던 심판하는 일을 그만두고, 심판을 금하는 새로운 생활 기준을 가지라는 말이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율법이나 자신들이 만든 계율로 이웃을 단죄하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 혹은 비판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정당한 판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금하는 심판(비판)은 유익하고 지혜로운 선악의 구별이 아니라 이해심이나 동정심없이 상대방을 근거없이 헐뜯는 것을 말하며, 절대 공의(公義)로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말한다(로마2,1~3; 야고4,11.12).
그리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형제를 심판하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사실은 마태오 복음 7장 1절의 '심판을 받다'에 해당하는 '크리테테'(krithete; you are judged)가 수동형이라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 단어에서 동작을 받는 대상은 복수 2인칭 으로서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자들이지만, 비판을 하는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불공정하게 심판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단죄하시는 분이 바로 공의로우신 하느님이시라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7장 2절은 마태오 복음 7장 1절의 보충설명이며 재강조의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 '심판받고'에 해당하는 '크리테세스테'(krithesesthe; yo u will be judged)의 원형 '크리노'(krino)는 사사로운 단죄나 헐뜯는 것을 가리키지만, 판결하고 언도하는 사법적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그 되로 받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메트레테세타이'(metrethesetai; it will be measured)의 원형 '메트레오'(metreo)는 양이나 길이를 재는 것을 가리키는 '메트론'(metron)에서 유래하여 물건 거래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제적 용어이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 7장 2절은 사법적 용어와 경제적 용어를 사용하여 이웃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자는 동일한 처우를 받게 될 것을 강조한다.
두 단어가 모두 수동태로 사용되어 상대방을 향한 심판과 되질함이 하느님에 의해 자신에게 되돌려질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마태오 복음 7장 3절은 '형제의 눈 속'과 '네 눈 속', '티와 들보', 그리고 '보면서'와 '깨닫지 못하느냐'가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는 기교적인 문장이다.
'티'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hos; mote; speck)는 '시들다'는 뜻을 가진 '카르포'(karpho)에서 유래하여 지푸라기나 왕겨 등을 뜻한다.
그리고 '들보'에 해당하는 '도코스'(dokos; the beam; the plank)는 '받치다', '지탱하다'는 뜻이 있는 '데코마이'(dechomai)에서 유래하여 건물을 받치는 기둥, 재목 또는 서까래를 뜻한다.
타인의 조그마한 결점을 상징하는 '티'와 자신의 큰 허물을 상징하는 '들보'라는 서로 대조되는 단어를 대구시키는 과장법을 통해 교훈이 전달된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작은 도덕적 잘못이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예리하게 지적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더 큰 잘못, 즉 마치 들보와 같은 결함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들보와 같은 결함은 자신이 가진 죄악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형제에 대하여 사랑이 없는 가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7장 1절과 2절에서는 동사가 복수 2인칭으로 사용된 것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 7장 3절에서는 동사가 단수 2인칭으로 사용된 것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7장 3절에서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개개인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지적하는 심정으로 단수 2인칭을 사용하신 것이다.
2025년 06월 23일 월요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남을 심판하는 일은 쉽지만 남에게 심판당하는 일은 매우 견디기 힘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고치는 것보다 남의 결점을 판단하는 일에 더 익숙한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내리는 판단과 단죄를 그대로 내가 받는다면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기준대로 우리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심판하지 말라는 말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식별을 하지 말거나 악을 단죄하는 것을 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행동에도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를 죄인과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되듯 결점이나 실수로 사람을 규정하거나, 그것들을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은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형제자매의 마음으로 꼭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면 먼저 기도해야 하고, 상대의 선을 추구하는 순수한 사랑과 내 눈의 들보를 먼저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자비의 모성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자비 없이는 ‘상처 입은’ 이들, 곧 이해와 용서,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브라질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2013.7.27.).
우리는 대체로 자신은 지적받고 조언받기를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의 결점은 고쳐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형제자매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라고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서로 도우면서 ‘사랑하라’고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핵심 속성이자 그 최고 형태는 바로 ‘인내’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오늘 가족과 공동체 생활에 방해되는 나의 들보는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善惡의 法을 빼내어라
(마태7,1-5)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 심판의 말을 생각지도 이웃에게 전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공부하자~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눈의 들보가 무엇일까? 자신 안에 들어있는 욕망(慾望)이다.
(창세2,16-17)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하느님께서 세우신 나무를 선악(善惡)으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셨다. 나무는, 우리(쓴물-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인 나무 하나다.(탈출15,25) 곧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신, 그래서 깨끗한 의인으로 재창조하시는 구원의 새 계약인 십자가(十字架) 나무다.
*계약(契約, 스타오로스)- 기둥, 나무를 뜻한다. 악(惡, 죄)을 대속하여 생명을 주시는 그 진리의 나무(새 계약의 말씀)를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해 선악의 법으로 먹어 버리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와는 그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다(죽인 것)
(창세3,4-5)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뱀, 사탄이다. 그 하느님처럼 선악의 판단을 인간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유혹(誘惑)이다.
(창세3,6)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 ‘하느님처럼,’ 의 그 거짓된 말(유혹)을 듣고 쳐다본 눈, 욕망의 눈이다. 욕망이 들어있는 그 위선(僞善)의 눈, ‘들보’다.
그 선(善), 악(惡)의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여 본다. 자신부터 판단한다. 선악의 눈으로 보니 “어? 나 부끄러운 사람 이었네” 이렇게....
(창세3,7)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 알몸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으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알몸을 부끄러운 죄로 스스로 판단했고,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까지 만들어 입었다.
*두렁이(하고르)는 띠로 진리를 뜻한다. 선이 악을 대속해서 생명을 주는 그 창조주의 진리를 피조물인 인간이 선과악의 판단으로 스스로 만들어 입은 그 자신의 열심(의)을 진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창조주 하느님의 자리에 앉은 교만, 큰 죄다.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말씀을 도덕과 윤리의 선악의 말로 먹고, 모든 사물(사람),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현상)들 까지 그 선악의 눈으로 보면서 이웃에게 전한다면 반드시 그 선악의 판단, 심판으로 자신도 죽고 다른 이도 희망이 없는 심판으로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선악의 판단을 할 수 없다. 뱀(악)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악을 알아야 선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께만 선이 있고, 인간은 모두 악이다.> 죄를 알아야 하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 드림이 마음으로부터 진실된 감사(感謝)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2코린5,15) 15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로마14,13) 13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 선악의 말, 인간의 계명, 사람의 규정과 교리가 구원의 장애물, 걸림돌이다.(마태15,9 티토1,14참조)
(1코린4,3-5) 3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 어둠 속에 숨겨진 마음속 생각, 속셈을 칭찬 하신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속셈, 욕망, 그 모든 것이 죄(罪)임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그 죄악들을 대속하신 십자나무,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약으로 깨끗이 씻어 용서하시고 ‘보시니 좋다’ 칭찬하신다는 말씀이시다.
그 모든 일의 과정을 하느님의 말씀이 주관하시며 이끄신다.(히브4,12참조)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의 진의(眞意)인 것이다.
(마태6,34)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독서(창세12,2-3) 2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 아브람이 받은 복(福)은 하늘의 생명이며 그에 대한 믿음(信)이다. 하느님께서 “떠나라”하신 땅으로 아브람이 떠날 때 그는 하늘의 복에 대한 믿음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75세까지 자식이 없었기에 그 자식(복)을 얻을까 해서 떠난 것이다. 그랬던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만들어(이끌어) 가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그렇듯 하느님께서 우리 삶 전체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통해 선, 구원을 이루신다.(로마8,28참조)
그래서 우리에게 악으로 생각되는 모든 슬픔, 고통, 시련 들까지 선, 구원의 재료가 되기에 그 악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로마5,20참조) 그러나 그 악에 멈춰 있다면 곧 예수님의 십자가 그 새 계약의 피로 받는 용서, 의로움을 모르고 그 죄로 계속 힘들어 하며, 계속 스스로의 열심히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이 진짜 악(惡), 죄(罪)다.
그러니 육의 욕망을 위한 내 눈에 들어있는 선악의 말, 그 들보를 버리고, 십자가의 복음, 그 하늘의 덮으심, 대속, 그 진리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봐야 그의 티끌(죄)을 진리의 복음, 새 계약의 말씀으로 빼내어 줄 수 있는 것이다.
☨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어 구원을 완성하신 천주의 성령님 감사 하나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