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 17일 목요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안식을 주겠댜. (마태11,28-30)
제1독서<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탈출3,13-20)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16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17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19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화답송>시편105,1과 5.8-9.24-25.26-27(◎8ㄴ) ◎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과 이적을, 그분 입으로 내리신 판결을 기억하여라.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 주님은 당신 백성을 크게 늘리시어, 그들의 적들보다 강하게 만드셨네. 저들의 마음을 바꾸시어, 당신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고, 당신 종들에게 간계를 부리게 하셨네. ◎
○ 그분이 당신 종 모세와, 몸소 뽑으신 아론을 보내시니, 저들 가운데에서 그분의 표징들을, 함족 땅에서 이적들을 일으켰네. ◎
복음<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11,28-3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 (탈출3,13-20)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4-15)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라고 번역된 '마 셰모'(ma shemo)에서 '이름'을 뜻하는 '솀'(shem)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솀'(shem)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어떤 사람을 부르는 데에만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성격이나 신분 또는 운명등을 반영하였다(창세17,5.15; 32,28).
따라서 과거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았으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창세14,22; 16,13; 17,1).
창세기 14장 2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으로, 창세기 16장 13절에서는 하가르가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으로, 창세기 17장 1절에서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전능한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불렀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한편 고대 근동의 임금이나 군주들은 사신을 보낼 때, 그 사신에게 자신의 권위를 전적으로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이 담긴 인장을 주거나 아니면 그 인장이 찍힌 편지를 주었다. 모세는 이러한 차원에서 하느님의 신임을 요구한 것이다.
'나는 있는 나다'
'나는 있는 나다'의 원문은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ehye asher ehye)이다. '에흐예'(ehye)는 '있다'(창세1,2)라는 뜻의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야'(haya)의 1인칭 미완료형으로 '나는 존재한다'(I am) 또는 '나는 ~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셰르'(asher)는 'that, which, what, who' 등과 같은 관계대명사이다. 즉 '~것', '~자'의 의미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묶어 앞뒤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미완료형은 완료되지 않은 동작이나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개념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묵시1,4.8).
이것은 결코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인가 앞선 원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면서 또한 그 원인에 의해서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여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며, 따라서 모든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우시고 나아가 다른 모든 피조물이 존재할 수 있는 궁극적 원인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유일한 자존성(自存性)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여타 피조물과 비교할 때, 당신의 고유한 본질과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존성을 나타내는 칭호를 당신의 이름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것은 초월적 절대자로서 모든 인과(因果) 법칙을 초월하셔서 자존하시는 분으로서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여타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 근거와 기반이 되시는 하느님의 자존성(自存性)과 영원성(永遠性)과 절대성(絶對性)을 그대로 반영한 이름이다.
또한 이 이름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자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여타 모든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거짓 신들임에 비하여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에흐예'(ehye)라는 말에서 유래된 '야훼'(주님)이란 이름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계약 관계를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되었다.
즉 절대 초월자이신 하느님께서 각 계약을 체결하시고, 그 계약들의 신적 기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계약들이 영원한 하느님처럼 절대 불변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문만을 보고, 하느님의 이름이 이때 모세에게 '에흐예'(야훼)로 비로소 처음 계시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2장 4절의 창조 기사에서부터 이 이름이 발견되며, 더군다나 창세기 4장 26절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 즉 공식적인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탈출기 3장 14절과 15절은 지금 계시를 주시는 분이 영원히 자존하시는 주님 ('에흐예'; 야훼)이심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는 의미를 가지며, 그 이름의 진정한 뜻에 대한 신적 해석이 비로소 이때 온전하게 알려졌음을 드러낸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의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거의 같은 표현입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우리말로도 그리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처음 부르시는 것처럼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을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집회서에서 말하는 ‘지혜로 안식을 찾고 기쁨을 얻으라.’는 권고와 매우 닮았습니다.
“지혜의 멍에는 금 장식이고, 그의 사슬은 자주색 끈이다. 너는 지혜를 영광의 옷으로 입고, 지혜를 기쁨의 왕관으로 쓰리라”(6,30-31).
“나 자신이 얼마나 적은 노력을 기울여, 큰 안식을 얻게 되었는지 너희 눈으로 보아라”(51,27).
구약 성경은 지혜를 얻는 것을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집회서의 저자는 자신의 ‘적은 노력’과 지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적은 노력’은 예수님께 가는 것으로, ‘큰 기쁨’은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비교적 짧은 내용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되풀이됩니다. ‘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에게 배워라.’ ‘안식을 얻을 것이다.’
초대도 안식을 얻는 것도 모두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보다 더 크신 분이시고 그분께는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안식은 예수님의 은총과 복으로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우리도 초대에 응답하며 그분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안식은 인간의 죄의 뿌리가 해결 됐을 때 비로서 얻는다.
복음(마태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무거운 짐 같은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그 율법의 사람의 의(義)로 얻는 안식(安息)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고생하며- 세상의 힘, 돈, 명예, 건강을 지키려 애쓰지만, 그것들로 얻는 안식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쉼, 안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우리의 모든 죄(罪)를 넘겨 받으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흘리신 피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겨 거저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흙인, 죄인인 우리가 하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믿었을 때, 안식(安息)이다.
흙, 그 없음이 더러운 양심의 죄가 대속(代贖)의 십자가(十字架)로 해결되어 얻는 쉼, 안식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당신의 제자라 하신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무거운 짐 같은 신앙, 고생인 세상의 것으로 안식을 누리려 했던, 그 자신을 버리고 참 안식을 주는 ‘그리스도의 멍에,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다.
(루가14,27)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내 죄(罪)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흘리신 피,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곧 구원의 새 계약으로 지고 따르는 것, 그리스도인 이며 그분의 제자다.
(히브8,7-10) 7 첫째 계약(율법)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10 그 시대(옛 계약)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새 계약)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구약(율법, 옛 계약)을 신약(십자가, 새 계약)으로 결론 짓지 않으면 결함, 곧 ‘죽음의 법일 뿐이다.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미사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사 제물이 아닌 그 제사를 “다 이루었다” 하신 새 계약의 말씀으로 먹는 것이 자유, 안식이다. 곧 내 뜻(소원)을 이루기 위해, 내 의(義)를 쌓기 위해 ‘제사 제물인 살과 피’로 먹는다면, 피의 새 계약이 주시는 하늘의 용서, 자유, 평화, 쉼, 안식은 얻지 못한다. 모두 ‘고생하는 무거움 짐’일 뿐이다.
(창세2,2)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쉼, 안식, 하느님께서 창조를 엿새 동안 하셨다. 그런데 이렛 날에 ‘다 이루었다’ 하신다. 왜? 첫날부터 엿새째 날 까지 하신 모든 창조 안에 구원의 뜻, 의미를 깨닫게 되면 쉼, 안식이라는 것이다.
(갈라6,15) 5 사실 할례(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2코린5,17) 17 누구든지 그리스도(십자가, 피의 새 계약)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사람)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들 마음 안에 충만 하소서. 새로운 피조물(사람)로 새 창조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말씀 안에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의 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은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는 '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는 '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은 '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3장,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는 '카이'(kai; and)와 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은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gentle meek)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키며(마태5,5),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는 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 (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을 취하셨고(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셧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는 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을 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이 ‘야훼(에흐예)’, 곧 ‘있는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야훼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나는 있을 것이다.’ 또는 ‘나는 있다.’입니다. 이 낱말은 명사가 아니라 있음, 곧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붙여지는 의미 없는 낱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특징, 곧 ‘우리와 함께 항상 계신 분’, ‘아브라함 때도, 이사악 때도, 야곱 때도 계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도 늘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라는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 받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참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음을, 당신이야말로 참된 ‘야훼’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밝히시며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권고하십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프라위스’입니다.
이 낱말은 본디 히브리어 ‘아나빔’(가난한 이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온유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온유한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마태 5,5 참조).
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그 땅, 하느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25년 07월 17일 목요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시면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고 하십니다.
지금 지고 있는 짐도 힘든데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니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마리의 소를 ‘함께’ 부려 밭을 경작하였기 때문에(1열왕 19,19 참조)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 말씀에는 우리가 멜 멍에를 당신께서도 함께 지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멜 멍에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멍에는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서적 또는 심리적 부담이나 제약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쓰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면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감, 부담감, 일의 성사 여부에 대한 초조함을 지고 살아갑니다.
수많은 일이 내 뜻과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음에도 모든 것이 내게 달린 듯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지라고 하심으로써 일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여 일의 진행,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은 당신의 몫이며, 우리는 그저 당신의 일을 당신과 함께해야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셔야 할 몫은 그분께 맡겨 드리고, 그분 뜻대로 일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멍에를 멥시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배워야 산다.
(마태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멍에,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배우면 안식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에 안식이다. 십자가의 복음, 곧 그분의 피로 죄가 없어져 마음이 편하고 가벼운, 그 안식을 얻는 새 계약을 배우라는 말씀이다.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에페1,7. 2,13)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은혜)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2,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히브9,14. 10,22)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10,22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배운 대로 삽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의로움을 위한 율법, 계명으로 지키려 열심히, 혹은 억지로 드리는 제사(자기열심)로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안식이 없는 그 헛된 신앙, 헛된 삶, 길에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율법과 제사와 계명은 예수님의 대속, 그 단 한 번의 제사로 새 계약이 다 이루어졌음을. (히브10참조)
(히브8,12-13)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율법))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로마3,20-21.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제사와 윤리)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새 계약, 예수)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도덕과 윤리, 사람의 교리와 규정으로 지켜 자기 의(義), 명예, 재물을 위한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사는 이들에게 그 세상의 힘의 원리로는 절대 안식을 얻지 못하니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진리로, 새 계약으로 주셨으니 하늘의 용서, 생명으로 안식을, 곧 그동안 법, 규정으로 짊어졌던 근심, 죄 의식을 주님의 십자가에 버리고 가벼운 마음, 편안함, 그 자유, 안식을 누리라는 말씀이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 다음 12장에서 예수님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려 주신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올바른 신앙이란 바쁘게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해 놓으신 구원의 진리, 새 계약을 배워 하늘의 용서, 생명,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