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화요일]첫째 와 꼴찌(마르 9,30-37)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자기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키라고 한다. (집회 2,1-11)
1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3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4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5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6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7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8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9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10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하여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르 9,30-37)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집회2,1~11)
집회서 1장 14절에서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경외함'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오늘 집회서 2장 1~11절 말씀은 모든 지혜의 기초요, 시작인 <주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전제 조건이요, 필연적 통과 과정인 시련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으며, 그 시련을 겪을 때 어떤 삶의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계시해 준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집회2,1~7)
거룩하신 주님을 경외하는 인간들이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인간성의 찌꺼기와 본성적인 요소들이 걸러져야 하기 때문에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작업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 단련의 과정이 인간 본성에 반하기 때문에 상당히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붙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동시에 그럴 때 마지막에는 번창하며(3절)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인 선물이 보상으로 주어진다(9절)고 말한다.
오늘 집회서 말씀은 신약의 야고보 서간 1장 2절이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1,3)
먼저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도키미온'(dokimion)은 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단련(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야고보 서간 1장 3절과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만 나타난다.
즉 야고보서 1장 3절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곧 단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되풀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믿음에서의 시련은 그것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의 원형 '휘포모네'(hypomone)는 '~아래에'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다'(마태10,11)란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어떤 상황아래 흔들림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서 '확고부동', '복지부동', '항구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휘포모네'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의 시험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 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 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숙하고 모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섬김이 필요한 때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철이 들어야 한다.>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0-32)
여기서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라는 말과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는 더 이상 활동하시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즉 수난과 죽음을 향해서 곧바로 가시는 중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무리하실 때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보다는 ‘말씀’과 ‘가르침’에 더 집중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슨 뜻이냐고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는 말을, “그런 말씀을 듣는 것도 싫어하였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태도는 ‘수난 예고 말씀’은 듣기 싫은 말씀이고, 그런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듣기 싫은 말씀이니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도 싫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누리시기는커녕 그런 수난을 당하시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처음에 하신 일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 이유, 목적 등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루카 24,25-27.44-46)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3-3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데, 또 그 수난과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열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철이 안 든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는 사도단 안에서 누가 가장 높으냐는 문제, 즉 서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수제자로 임명하셨지만(마태 16,18), 다른 사도들의 서열 문제는 정리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사도들이 서열 문제나 자리 문제로 다툰 일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 사이의 서열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수제자로 임명하신 일에 대해서도 다투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베드로 사도를 수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그를 수제자로 임명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논쟁’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무슨 신학 토론이나 논쟁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끼리 다툰 일입니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라는 말은, 자기들끼리 그런 문제로 다툰 것을 제자들 자신들도 창피하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5-37)
여기서 ‘첫째가 되려면’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첫째’가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 가르침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꼴찌가 되어서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겸손’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면, 상대방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겉으로만 낮추는 것이고, 겸손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겸손과는 거리가 멉니다. (만일에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낮춘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기가 높은 사람이라는 의식 자체를 버려라.”입니다. (자기가 상대방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예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철이 든 모습입니다.)
진정한 겸손의 모범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인 척 하시면서 사신 분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똑같이 사셨고, 여느 사람보다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입니다.(필리 2,6-8) 신앙인은 예수님의 그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가장 낮은 사람들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그 가장 낮은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가장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또는 “예수님을 섬기는 일은 곧 가장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다.”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장 낮고,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연결하면, ‘가장 낮은 사람들’과 예수님과 하느님이 하나가 되는데, 이것은 가장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과 예수님을 섬기는 일과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