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목요일] 예수그리스도 (마르 8,27-33)

2019. 2. 21. 오전 6:5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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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예수그리스도 (마르 8,27-33)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 (창세 9,1-13)
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5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7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고 수난을 예고하신다. (마르 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창세 9,1-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13)

 

본문에 언급된 계약은 홍수 이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거라.'(창세6,18) 이제 그 약속이 현실이 되어 체결되고 있는 것이다(창세9,9).


이처럼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대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가족들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황폐해진 세상의 모습에서부터 다시 살아가야 할 앞날을 우려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재차 찾아 오셔서 장래를 보장해주는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


창세기 9장12절에 보면,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라는 말이 나온다. 

'표징'으로 번역된 '오트'(oth)는 '징조', '기호', '증거'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어떤 물증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맺으시되, 의심많고 변덕스러운 인간이라도 이 계약을 굳게 신뢰할 수 있도록 너무나 뚜렷한 증거물로서 무지개를 세우셨다. 

그러나 '계약'(berit) 그 자체는 계약을 보증하는 '표징'(오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따라서 계약은 그 증거물에 의해 보증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


'무지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쉐트'(qesheth)는 일차적으로 '활'(1사무2,4)이란 뜻도 있다.

활의 모양이 무지개와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한 단어가 활에도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활의 모양을 본따서 동일한 이름을 무지개에 적용했는지 그 순서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도구의 이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지개가 활로 비유된 사례는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에도 나온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신화에는 무지개가 쿠자(kuzah)神이 사용한 무기였으며, 싸움이 끝난 뒤에 이를 구름 사이에 걸어 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바빌론 신화에서도 무지개는 므로닥(Marduk; 예레50,2)신(神)이 악한 신(神) 티아맛(Tiamat)을 물리치는 활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 신화들은 무지개, 즉 활을 하늘에 걸어 둔 것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 세상을 다시는 홍수로 심판치 않겠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선언을 확증하는 증거로서 무지개를 하늘에 두셨다는 성경 말씀이 다소 와전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구름'에 해당하는 '아난'(anan)과 '모아 들이다'(덮다)에 해당하는 '아난'(anan)동일한 어근이며, 다만 '구름'의 모음이 장모음이란 점만 다르다. 

본문에서 '모아들이다'(덮다)로 변역된 '아난'(anan)의 어원적인 의미는 '드러내다', '나타나다'이며, 특별히 '장애물로서 개입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의 주어 '하느님'이란 사실로서 자연현상의 배후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을 '하느님께서 하늘을 가리우기 위해 구름을 나타나게 하실 때'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구름 고난과 위험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에도 여러번 사용되었다(에제30,3.18; 32,7; 34,12).

하지만, 먹구름 속에서도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평화의 무지개를 준비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신앙인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짙게 하늘을 덮은 구름 속에도 찬란한 무지개가 감추어져 있음을 믿으며, 난관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지개란 표징을 주신 이유가 계약에 대한 하느님 자신의 기억을 위한 것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 불변하시는 하느님의 기억에 그 계약의 바탕을 둠으로써, 결단코 계약의 파기나 망각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 만천하가 다 알수 있도록 확실하게 해 준 것이다.


따라서 무지개를 볼 떄마다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도 잊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계약을 신실히 지켜 가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 약속에 따라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우리를 인도해 가실 그분의 강력한 의지인 것이다(2베드 3,13).


마지막으로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국지적인 홍수는 발생할 수 있지만, 바로 노아 홍수와 같은 이 세상 전체를 멸하는 그러한 홍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한 심판 자체가 없을 것이란 의미는 절대 아니다.


성경은 이 세상 마지막 날 사람들이 노아의 시대와 같이 먹고 마시며 향락에 젖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불현듯 재림하셔서 홍수 심판보다도 훨씬 두려운 불의 심판으로써 모든 죄악된 것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마태24,38.39; 2베드3,6.7).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항상 깨어서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복음(마르8,27~33)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3)

 

마르코 복음 8장 3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고 나온다. 베드로는 마르코 복음 8장 31절주님의 수난 예고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던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통해 얻을 것으로 고대했던 모든 영광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코 복음 8장 21절'반박하기 시작하였다'에서 '반박하다'에 해당하는 '에피티만'(epitiman; to rebuke)원형 '에피티마오'(epitimao)'경고하다', '경계하다', '책망하다', '꾸짖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르코 복음 8장 33절에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라고 하시며 엄중히 꾸짖으시는 것을 감안할 때, 이미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힌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매우 거칠게 대들었던 것알 수 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서,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진 채 예수님을 향한 그릇된 열심과 애정으로 불타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을 이용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 8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막아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신다. '사탄아'에 해당하는 '사타나'(satana; satan)'적대자'를 뜻하는 '사타나스'(satanas)의 호격이다.

 

신약 성경의 36회 용례 중에서 34회가 모두 그리스도와 하느님 자체, 또는 그분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영적 세력인 '사탄'을 일컫는 말로 쓰였고, 나머지 2회여기와 그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3절의 '베드로'에 대해 쓰였다.

베드로도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주님의 적대자였다고 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자가 너무나 쉽게 주님의 적대자로 전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최종목적인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해서 반드시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거칠게 대드는 사탄의 조정을 받고 있는 베드로의 기운에 조금도 눌리지 않으시고,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고 담대하게 그를 뿌리쳐 버리신다. 

그리고 '내게서 물러가라'에 해당하는 '휘파게 오피소 무'(hypage opiso mu; get behind me)에서 '물러가라'로 번역된 '휘파게'(hypage)'휘파고'(hypag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너는 지금 당장 내 뒤로 가라'는 뜻이며, 사탄의 도구가 된 베드로에게 상징적으로 스승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라야 하는 제자로서의 본분과 위치를 지키라는 뜻이다. 

제자란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존재이지,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가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한이 없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3절에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이 더 첨부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스칸달론 에이 에무'(skandalon ei emu; you are an obstacle to me; you are stumbling block to me)에서 '걸림돌' 혹은 '넘어지게 하는 자'에 해당하는 희랍어 '스칸달론'(skandalon; an offence)'올무', '함정'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모케쉬'(moqesh)'걸리다', '거치다', '장애물'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미크숄'(mikshol)에 대한 70인역(LXX)의 역어 '길에 놓여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떤 장애물'(걸림돌) 혹은 '다른 이를 범죄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의 베드로의 행위가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 할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로서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유도하는 범죄의 행위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을 수 없다며 극구 만류하는 베드로의 말과 행위는 예수님의 공생활초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탄의 유혹의 목적과 같이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다.


끝으로 '너는 ~생각지 ~ 하고'에 해당하는 '프로네이스'(phroneis; you do have in mind)의 원형 '프로네오'(phroneo)'마음에 두다', '중히 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단지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바로 이것에 집착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하느님의 일임을 나타낸다.


또한 이 구절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현재의 진행중인 동작을 나타내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까지도 베드로의 마음이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목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놓는 참 신앙고백  


우리는 마르코 복음의 후반부로 가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복음의 전반부(1,1-8,26)는 감춰져 있고 힘겹게 성장해 가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합니다. 한편 베드로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후반부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얘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로 향하십니다. 이곳은 기원전 2-3년에 헤로데 필리포스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려고 요르단강 근원지에 세운 도시입니다. 염소머리를 한 자연신 판(pan) 숭배에 빠진 동굴로 특히 유명한 이 이교 도시에서, 매우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이 고백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8,29). 이어 그분께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8,32).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시며 그를 엄하게 꾸짖으십니다(8,33).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과 구원행적으로 듣고 보아왔지요. 그런데도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 못하는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먼저 고난을 겪고 십자가상의 죽음을 거쳐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그리스도이시지요. 

제자들은 역설과 신비로 가득한 주님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과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현실을 뿌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인간됨, 곧 인성(人性)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분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광에 이르실 하느님이심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제자라면 겪어내야 할 수난과 죽음을 빼놓아버린 고백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자들은 참된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체험하고 난 뒤였지 않습니까? 제자들의 신앙은 그렇게 서서히 성숙되어가는 역사적 여정이요,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성장해가는 순례라 할 것입니다. 

나의 내면과 살아가는 처지가 바로, 이교 신을 모신 동굴이 있는 또다른 카이사리아의 필립비로 둔갑해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내가 원하는 인간적인 면모에만 사로잡힐 때는 없습니까? 목숨을 내놓은 희생을 외면한 채 내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거짓으로 고백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질책과 엄한 경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나와 무관한 괴물이 아니지요. 내가 제자다움을 망각해버릴 때, 말과 생각으로는 능숙하고 화려하게 주님에 대해 말하면서 십자가를 거부할 때, 그 순간 사탄이 되어버림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험한 세상을 사는 것 이상으로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유혹도 만만치 않지요.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목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어놓음으로써,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집중하는 길임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사람의 일에 한눈을 파는 사탄이 되지 않도록 저를 사로잡아주시어, 당신의 일에 몰두하는 행복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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