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토요일]변모사건(마르 9,2-13)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한다. (히브 11,1-7)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셨는데,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신다. (마르 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히브11,1-7)
히브리서 11장 1~3절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인지 믿음의 정의에 대한 서론적 설명이다.
'믿음은 ~이다'라는 표현에서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 '에스틴'(estin; is)은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항구적으로 항상 그러함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다'라는 사실이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핵심어인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티스'(pistis; faith)는 고전 희랍어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혹은 신에 대하여 갖는 '신뢰' 또는 '진실성'이나 사업상의 '신용', '보증', '증명'등을 의미하여 다양하게 쓰였다.
원래 이 어군의 단어들은 '계약이나 약정을 존중하는 행동'을 나타냈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회의론과 무신론이 난무하는 시기에는 '피스티스'가 신들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신념'(conviction)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라고 번역된 '엘피조메논 휘포스타시스'(elpizomenon hypostasis)에서 우리는 '보증'으로 번역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substance; realization; assurance; guarantee)에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는 '밑에 놓다', '기초를 두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휘피스테미'(hyphistemi)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문자적으로는 '아래에(hypo; 휘포) 서 있는 것(stasis; 스타시스)', 즉 '토대','기초'라는 의미이다.
이런 뜻 외에도 '본질', '실체', '확신', '확고성', '보증'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다.
이제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① 일부 파피루스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는 '보증'이라는 의미에서 소유권을 입증하는 문맥에 쓰였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권리 증서이다', 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있는 천상의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즉 믿음이라는 보증물을 내보일 때 천상의 것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확실하게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② 초대 교회 몇몇 교부들은 이 단어를 '현실화'(realization)의 개념으로 보았다. 믿음이 장래의 바라는 것들을 현실적으로 발생하게 해준다고 본 것이다.
③ '실체', '실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믿음이란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바라는 것들을 실질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붙잡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④ 초대 교회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부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견해로서 '토대', '기초'(foundation)라고 보는 견해이다. 말하자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바라는 것들')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면, '믿음이란 희망을 지탱해 주는 토대로서 희망하는 것이 허상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보증해 주는 실체'라는 의미가 된다.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번역된 '프라그마톤 엘렝코스 우 블레포메논' (pragmaton ellengchos u bllepomenon)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일들의 증거' 라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에 해당하는 '우 블레포메논'에서 '블레포메논'(bllepomenon)은 '보다'(see)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블레포'(bllepo)의 수동태 분사이다.
따라서 '우 블레포메논'은 인간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실체들의'로 번역된 '프라그마톤'(pragmaton)의 원형 '프라그마'(pragma)는 고전 희랍어에서는 '행위', '사물', '사업', '논쟁'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일'(사도5,4), '사실', '일'(루카1,1)등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란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일들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 등은 믿음이라는 장치를 가져야만 신뢰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확증'에 해당하는 '엘렝코스'(ellengchos)는 '밝히 드러내다', '폭로하다', '납득시키다' 등을 뜻하는 동사 '엘렝코'(ellengch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고전 희랍어에서는 '증거', '확인'등의 의미를 지닌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겉으로 밝히 드러내주는 것, 확실하게 하는 것 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누가 못 믿는가?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을 누가 못 믿는가? 그리고 관찰, 실험, 검증에 의해 과학적으로 이미 사실(fact)로 밝혀진 것들을 누가 못 믿는가?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의 어두운 차원을 뛰어넘어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태양이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두운 먹구름 넘어 태양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차원인 것이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2)
여기서 '옛 사람들'로 번역된 '호이 프레스뷔테로이'(hoi presbyteroi)에서 '프레스뷔테로이'의 원형 '프레스뷔테로스'(presbyteros)는 '늙은', '나이 많은'을 의미하는 '프레스뷔스'(presbys)의 비교급으로서 '나이가 더 많은', '노인' 또는 '장로', '원로' 라는 의미이다(마태26,3; 사도2,19).
고전 희랍어에서는 처음에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더 늙은'(older) 이라는 뜻을 나타냈지만, 후에는 '더 존경받는'이라는 의미가 첨가되었다.
본절에서는 신약에서 흔히 쓰이는 '원로'의 의미가 아니라(1베드5,1), 히브리서 저자와 독자들의 공통된 조상, 즉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약 시대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살았던 모든 조상들'을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11장 4절 이하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대별 믿음의 영웅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며, 동시에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거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인정을 받았습니다'로 번역된 '예마르튀레테산'(emartyrethesan; were well attested; were commended)은 '마르튀레오'(martyreo)의 과거 수동태이다.
이 '마르튀레오'동사의 뜻은 '증언하다', '어떤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다', '어떤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사실을 확증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동태로 쓰인 것은 거명된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증인이 바로 하느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거하셔야만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속임을 당할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는 진리의 근원이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그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셔야만 진정한 신앙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마르9,2~13)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아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2~4)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13절까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9,2~8)과 그것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눈 사건(마르9,9~13)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앞의 마르코 복음 8장 2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을 성부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신 사건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보여 주는 의미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 복음 8장 31절에 나오는 첫번째 수난 예고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힘이 없어 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이며, 단순히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예표하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뜻을 갖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르8,29)과 첫번째 수난 예고 (마르8,31) 이후에 있는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 생애의 중대한 전환적 의미를 지니기에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다(마태17,1~8; 루카9,28~36).
마르코 복음 9장 3절에서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내재하고 있던 충만한 신성 (콜로2,9)의 표출로 말미암아 주님의 옷은 광채로 빛나며 새하얗게 되었다.
여기에서 '빛났다'로 번역된 '스틸본타'(stilbonta; shining; dazzling)는 여러 차례 문지른 금속 따위가 번쩍이며 빛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스틸보'(stilbo)의 현재 분사형이다.
변모산에서 주님의 옷은 마치 금속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새하얗게'로 번역된 '류카'(leuka; white)의 원형 '류코스'(leukos) 역시 '빛나는', '찬란한'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 5장 36절과 요한 복음 4장 35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상적 존재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하면서도 흰 색깔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도 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사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의 기사에서는 마태오 복음(17,2;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과 루카 복음 (9,29;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의 기록에 있는 기사는 빠져 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주님의 얼굴도 찬란하게 빛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9장 4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원문에는 마르코 복음 9장 3절과 4절이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나타나'로 번역된 '오프테'(ophthe; there appeared)는 '보다'는 뜻을 지닌 원형 '호라오'(horao)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부정과거 수동태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성령님, 또는 천상적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보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다인들에게 '모세'와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서(2열왕2,11) 유다인들이 다시 올 것을 대망했던 예언자이며(마르9,1),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36,5) 유다인들은 하늘로 산 채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던 인물이다.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므로, 이들이 예수님께 나타나 그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 성경을 결코 부정하거나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며, 율법과 예언서의 약속의 말씀과 예언들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마태5,17참조).
희망의 미래를 삽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살아가면서 과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이미 지난일 입니다.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훈 삼아 오늘을 살아야지 거기에 매여 있으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로 주어진 오늘을 살아갑니다. 물론 오늘의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의 기쁨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이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견디고 즐기되 앞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만큼 미래를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를 살아갑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삽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에 수고와 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꿈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절벽인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계성을 올바로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오상의 비오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9,5)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왜 초막을 만들고 싶어 하였을까요? 지금 순간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체험하지 못하였던 황홀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여준 것은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견디라는 위로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이요, 약속된 미래가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거기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좋은 순간이라고 거기에 안주해서도 안 되겠지만 성경이나 신심서적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 성체조배를 하거나 성체를 모시면서 지녔던 귀한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힘이 되어야 합니다. 등산을 하면서 산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정상에 오른 사람과 오르지 않은 사람이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 하면서 얻은 좋은 기억과 체험이 신앙생활에 활력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헛된 환상을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기도하는데 촛불이 변하였다든지 성모님 얼굴이 나타났다든지…..그래서 다음에 기도할 때는 그 이상한 현상이 또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분심에 빠져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만큼, 이 지상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활은 미래의 일이지만 오늘 여기서 미래를 살지 않으면 영광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미래를 희망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1,29) 이제 영광의 특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