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5주간 목요일]페니키아 여인의 믿음 (마르 7,24-30)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다.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며 자신을 낮춘 이교도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다. (마르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미켈란젤로,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중 '하와의 창조'>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2,18~25)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2~24)
'갈빗대'에 해당하는 '첼라'(tsela; rib) 앞에 정관사 '하'(ha; the)를 연결한 것은 여자를 만든 '갈빗대'가 창세기 2장 21절에서 밝힌 아담에게서 취한 바로 그 갈빗대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와 남자가 본래 분리할 수 없는 한몸이었으나, 하느님께서 그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셔서, 비로소 이제 남,녀 양성(兩性)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창조 방법은 다른 동물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다른 동물은 암,수 함께 여러 쌍을 동시에 창조하셔서 그 짝이 되게 하셨다(1티모2,13).
따라서 동물은 그 특성에 따라 수컷 한 마리가 여러 암컷을 거느릴 수도 있고, 때로 짝짓기 대상을 바꾸고 교미가 끝나면 암,수 각자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한 남자가 꼭 한 여자만을 배필로 삼아야 하며, 또한 본래 한몸이므로 죽음이 갈라 놓기 전까지는 결코 헤어져서는 안된다(마태10,9; '혼일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
이와 같인 혼인 제도는 인간의 창조와 동시에 주어진 신성한 것이다.
한편, '그를 사람에게 데려 오시자'에 해당하는 '와예비에하'(wayebieha; and he brought her)를 직역하면, '그러자 그분이 그녀를 인도하셨다'이다.
여기서 '그러자' 혹은 '그후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계속적 '와우'(wau; and)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담에게 데려가기 위함이며, 여자가 창조된 후에 즉시 그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음을 나타낸다.
여기 본문은 '인도하다', '출가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 '뽀'(bo)의 사역형이 사용되어 여자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녀를 몸소 아담에게 인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는 것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시고 몸소 결합시키셨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창세기 2장 23절의 원문에는 '이야말로(이것을)'에 해당하는 지시 대명사 '조트'(zoth; this)가 3번 반복된다.
즉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을 가리키는 '이야말로'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에 결합된 '이야말로', 그리고 '여자라 불리리라'와 결합된 '이야말로'가 있다.
이 세 개의 단어가 모두 여성형 단수 지시 대명사인데, 동일한 단어가 이렇게 3번이나 반복된 것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한 여자를 바라보는 아담의 기쁨이 너무나 컸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뼈'에 해당하는 '에쳄'(etsem; bone)과 '살'에 해당하는 '빠사르'(basar; flesh)는 몸 전체를 대표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뼈'도 '몸'으로 번역된 적이 있고, '살'도 '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와같이 '몸'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각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해 나아오고 있는 여자를 본 아담의 기쁘고 감동적인 마음을 잘 보여 준다.
또한 '뼈에서 나온 뼈','살에서 나온 살'이라는 표현은 '뼈 중에 가장 소중한 뼈', '살 중에 가장 소중한 살'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혈육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창세기 2장 23절전 까지는 사람을 가리킬 때 '아담'(adam)이라는 단어가 쓰였다(창세1,26 2,5.15).
그러나 창세기 2장 22절에서 '여자'에 해당하는 '잇샤'(ishah; woman)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고, 2장 23절에서 '남자'에 해당하는 '이쉬'(ish; man)라는 단어도 처음 나온다.
'남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ish)는 성경에서 2183회 정도 사용되며, 여기처럼 주로 '여성'과 대비되는 '남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 단어의 정확한 어원은 모르지만, '강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또한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샤'(ishah)는 여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남자'를 의미하는 '이쉬'(ish)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781회 정도 나오는데, 대부분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여기서 '떠나'에 해당하는 '아자브'(azab; will leave)는 '남겨 두다', '끊다', '짐을 부리다'는 뜻으로서 원래 속했던 집단과 관계를 청산하고 떠나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결합하여'에 해당하는 '따바크'(dabaq; be united)는 '붙좇다', '속하다'는 뜻도 있는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상호 완전한 소속감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된다'에 해당하는 '하야'(hayah; will become)는 '~이다', '~이 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 '떠나'는 미완료형으로, '결합하여'와 '된다'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다.
'떠나'가 미완료형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혼인이 지금까지 부모에게 속해 있던 상태에서 떠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 인격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로서 부모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계속해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결합하여'와 '된다'가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혼인이란 남녀가 단지 육체적, 형식적인 결합이 아니라 상호간에 노력해서 서로가 상대에게 속해서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마태19,6).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마르7,24~30)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27)
원문의 성경은 마르코 복음 7장 26절에서 그 여자가 청하고 있는 것과 마르코 복음 7장 27절에서 예수님 역시 그 여자의 요청을 거부하시는 대답을 모두 미완료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5장 22~26절에는 마르코 복음보다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먼저 그 여자가 예수님께 소리지르며 자신의 딸을 고쳐 주기를 원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이에 제자들이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 주어 빨리 보낼 것을 요청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15,24)고 딱 잘라 대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도와주기를 간청한다.
바로 이런 상황 아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르코 복음 7장 27절에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만 그 여자의 계속적 청원과 예수님의 계속적인 거부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과정을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거부의 말씀을 하신 사실을 소개하며, 의도적으로 그 여자의 소원에 대해 보다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반대로 예수님의 계속적 거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간청하는 그 여자의 믿음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7장 27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5장 26절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 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직역하면 '너는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게 되기를 허락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다'에 해당하는 '아페스'(apes; let)의 기본형 '아피에미'(aphiemi)는 '허락하다'는 뜻이며,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잃어버린 양으로서의 유대인들을 향한 사목이 예수님께는 우선이기 때문에(마태15,24), 그 일을 하도록 당신을 '내버려 두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먼저'로 번역된 '프로톤'(proton; first)은 여러개 중에서 '첫번째'라는 뜻으로서, 이 단어 또한 지금 예수님의 관심이 우선적으로 유대인에게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단어는 둘째, 셋째 등의 다음 순서가 있는 것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추후에 이방인에게도 있을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로마1,16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가까이에서 듣고 수많은 기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어도, 여전히 영적 무지와 불신앙적 거부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많은 슬픔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유대인들이 당신을 거부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는 자신의 사명을 다시 고취하기 위하여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자가 도움을 구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가 갖고 있는 유대인을 향한 당신의 관심을 그 여자에게 내비추고 계신다.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비록 표현적으로는 이방인인 그 여자를 무시하는 투의 말씀을 하시고 계시지만, 그 이면에는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기에 경멸적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유대인을 향한 자신의 관심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한 그 여자가 하느님의 은혜로운 기적을 과연 수용할 믿음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신 것이다.
한편, '강아지들에게'로 번역된 '토이스 퀴나리오이스'(tois kynariois; to their dogs)의 기본형 '퀴나리온'(kynarion)은 야생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나 '작은 강아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강아지들'이란, 앞에 사용된 유대인을 의미하는 '자녀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여 '개들'(강아지들)로 지칭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을 향하여 갖고 있는 당신의 우선적 관심을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표현을 빌려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 여자를 향한 경멸조의 말씀을 던지신 것이다.
결코 예수님께서 이방 여자를 경멸하시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그런 경멸조의 말을 듣고도, 오히려 자신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아지의 처지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렸다.
그 결과로 그 여자의 딸은 즉각 치유받았으며, 그로써 이방 여자의 놀라운 믿음이 증명되었고, 예수님께 칭찬까지 받게 되었으며(마태15,28),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역사(役事)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유대인이 식탁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껏 누린다면, 자신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도 받아야 하겠다는, 지극히 겸손하고도 진실로 강한 의지와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써 이렇게 놀라운 주님의 축복을 이끌어 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라고 청하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며 거절하십니다.
당시에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여기면서, 이방인들을 멸시하여 ‘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에서도 그렇지만, 사람을 개에 비유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독설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사명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선포하는 것임을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자주는 아니지만 이방인 지역에 가셨고, 거기에서도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들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자세입니다.
그 여인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자칫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지혜롭게 자신의 요청을 반복하는 재치, 딸에 대한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탄복하시며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도할 때, 그때마다 주님께 감동을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보여 준 간청의 항구함과 강한 믿음, 또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자세는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